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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처럼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7
임솔아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6월
평점 :
읽는 내내 시인이 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돋보이는 시적인 문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신기했다. 어떻게 이렇게 소설만 써온 사람이 쓴 소설 같지? 나한테 임솔아 작가는 '소설가'보다 '시인'으로 더욱 익숙한 사람이었는데..
"엄마가 옥상에서 떨어지던 날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채빈에게 물었다. 채빈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언니."
채빈이 나를 불렀다.
"응."
"그날 다 말했어."
p130
줄거리는 간략하지만, 이야기가 풍기는 냄새나 분위기는 기묘하고 인상적이다. 후반부에서 토막토막 서술되는 예빈과 채빈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때는 울컥한다.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한 사람의 어처구니 없는 마지막인데. 그동안 채빈과 예빈이 얼마나 많이, 각자의 시점에서 엄마의 죽음을 곱씹고 상상해왔을지…. 그러다가 문득 열일곱이라는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고 혼자 두 생명을 책임져 온 한 여성의 삶이 가진 무게를 가늠해보게 된다. 상상하기도 버겁다. 내가 어렸을 때 이 이야기를 읽었다면, 예빈과 채빈의 엄마는 그저 어린 날 철없이 아이를 가지고 낳아 고생만 하다가 죽은 여자였겠지.
엄마는 종종 산길을 걸었고, 그날도 그랬다.
산 중턱까지 걸었을 때 갑자기 요의가 느껴졌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참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종종걸음으로 걷다가 엄마는 수풀 사이로 뛰어들어 갔다. 오줌 줄기가 빠져 나오는 순간 벌이 엄마의 엉덩이를 쏘았다. 엄마는 놀라서 얼른 팬티를 입었고, 엉덩이 주변을 맴돌던 말벌 세 마리가 팬티에 딸려 들어가버렸다. 말벌들은 엉덩이를 여러 번 쏘았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독이 퍼져 열이 나고 있었다. 날카로운 것으로 엉덩이를 쑤시는 듯 아팠다. 마땅히 병원에 가야 할 일이었지만, 엄마의 가족은 무신경했다. 엄마는 혼자서 앓았다. 식은땀이 흐르고 어지러웠다. 의식이 오락가락했다. 이틀이 지나도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텅 빈 집에 누워 있다가, 엄마는 혼자서라도 병원에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깥으로 나와 병원을 향해 걸었다. 길에서 전봇대를 잡고 구토를 했다. 한 남자가 엄마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그 남자가 우리 아빠래."
아빠 얘기를 들은 건 처음이었다.
"엄마가 어제 그 얘기를 해줬어?"
"나 집 나갔다가 마트에서 잡혔을 때, 같이 돌아오면서 말해줬어."
그때 엄마는 집을 나가더라도 절대 친절한 남자를 따라가지 말라고 채빈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엄마는 채빈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채빈은 엄마와의 약속을 지켰다. 그 약속이 자신을 지켜주었다고 채빈은 말했다.
p99
어른들의 무심함과 방치가 한 아이의 생을 얼마나 빨리 나이들게 하는지 알기에, 엄마는 그토록 최선을 다해 두 딸의 삶을 감당해내고자 했던 게 아닐까. 예빈과 채빈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이들의 엄마는 '큰'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유나를 잃어버리고서 사람들이 댓글 쓴 거 다 읽었어요. 제가 중국인이라서 개념이 없다고 적혀 있더라고요. 그 사람들 계정에 들어가 봤거든요. '믹스견은 사랑입니다'라고 적혀 있었어요. 임시 보호 봉사활동을 시작해야겠다고 처음 결심했을 때, 여러 곳에 신청서를 넣었는데 다 거절당했어요. 서투른 한국어로 작성해서인 줄 알았어요. 번역가에게 맡겨서 신청서를 다시 작성했지만 마찬가지였어요. 입양을 신청할 때 조건이 중요하다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가족과 떨어져 살고 있는 미혼 여성이 동물들의 보호자 자격을 얻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요. 이상하지 않아요? 동물들은 조건 없이 사랑하길 바라면서 사람의 조건은 세세하게 따진다는 게.
p91
이 소설을 읽다 보면, 곳곳에서 일상에 만연한 차별의식의 모순점들을 마주하게 된다. 너무 익숙해서, 혹은 내 이야기가 아니라서, 생각조차 하지 않고 넘기거나 외면하면서 비롯되는 차별의 지점들. '이상하지 않아요?' 라고 묻는 사람이 곧 이상하거나 유별난 사람이 되는 사회는 잔인하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의구심을 갖지 않으면, 점점 눈이 먼다. 보지 못하게 되면 폭력이 우리 곁에 자리잡는다. 사람은 결코, 나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행해지는 폭력에 무뎌지면 안 된다.
다들 그래요. 농장이냐고요. 사람들은 동물보호소라고 하면 개랑 고양이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무슨 닭을 보호하냐면서, 재밌다는 듯 웃는 사람도 있었어요. 얘들은 여기 아니면 갈 수 있는 보호소도 없어요. 동물인데도 동물보호소에 못 가요. 동물원의 호랑이나 수족관 돌고래한테는 관심이 몰리는데, 풀어주자는 운동도 많이들 하는데, 얘네는 매일 도살되어도 관심을 못 받아요.
p121
사실 이 소설의 가장 큰 줄기는,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르는 폭력을 넘어서 인간이 비인간에 저지르는 폭력과 차별이다. 같은 짐승 주제에 서로 다르다 규정짓고, 종이 다를 뿐인 그들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긴 시간 군림하고 지배해 온 인간에 대한 성찰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크게 확산되지는 않은 듯한 '종차별주의'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은밀하고 은근해서 더욱 충격적이고 재밌었다. (스포가 될 것 같아서 자세한 줄거리는 삼가하겠어요...) 약 1시간 20분 걸리는 출근길 이틀만에 다 읽을 정도로, 잘 읽히면서도 무거운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자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이었다.
난 사실 고통받는 가축동물들을 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직까지 비건을 시도해보지 않고 있고, 인간을 생각할 때만큼이나 그들을 생각할 때 공감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렇기에 더더욱이 나와 비슷한 입장의 독자들이 한 번쯤 읽어보면 좋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만큼 정말로 변화하려면, 오래된 생각의 틀을 깨고 실천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계속해서 어떠한 자극을 받아야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