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문을 잘못 내렸을 때는 수정된 공문으로 다시 기안하면 된다.(물론 처음부터 잘 작성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현장은? 만일 발견하지 못한 오류로 인해 불량품이 대량으로 출고된다면? 부주의로 인해 재정적, 인적 사고가 발생한다면?
현장과 밀접한 업무를 맡았던지라, 노즈에의 긴장을 공감할 수 있었다. 실수는 곧바로 사고로 이어지는 업무를 하며 근무 때마다 긴장했던 나날이 떠올랐다. 그저 막연히 자신이 없었다는 노즈에, 노즈에는 긴장과 숙달을 반복하면서 업무로 인정받아간다.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고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거쳐야하는 과정이라지만, 어쩐지 남일 같지 않아 오래 머무른 단락이었다.
직장 생활 이야기를 다룬 작품을 읽을 때면 공감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책의 엔딩 크레딧>은 달랐다. 기술직과 본부의 관계, 영업 관련 교섭, 이례사항에 대한 대처, 디지털화로 인한 인력 감소 등 모든 부분이 공감되었다. 특히 디지털화로 인한 인력감소는, 재직 중인 회사가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터라 더욱 와닿았다.
초심이 옅어지고 무기력한 시간이 잦아진다. 그래서 재직 기간이 길어 질수록 나 자신을 회사의 부속품으로 여기곤 한다. 열정을 가져볼까? 그런데 요즘은 일을 너무 열심히 하는 젊은이는 되려 바보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MZ 세대가 말하는 직장인, 일은 딱 정해진 만큼만, 그 이상 그 이하도 하지 않고 남는 시간은 자기계발과 재테크에 쏟는다. 생각해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재직 중인 곳이 직원의 능력을 확실하게 인정해주고 성과주의적 면모가 강한 직장이 아니면 대부분 그렇게 된다. 안타깝지만 나도 그렇게 변하고 있다.
<책의 엔딩 크레딧>은 열정으로 꽉찼던 언젠가 우리의 모습을 비춰준다. 작중 우라모토는 인쇄가 모노즈쿠리(혼신의 힘을 쏟아 최고의 물건을 만드는 것, 혹은 그 장인)라고 언급한다. 이런 우라모토 뿐만 아니라 <책의 엔딩 크레딧>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열과 성의를 다한 그들의 소명의식이 모여 책이 완성된다.
<책의 엔딩 크레딧> 편집자는 작가가 창작을 하고 편집자가 편집을 하고 마케터가 홍보를 하는 곳의 뒤편에서 누군가가 필름을 출력하고 인쇄판을 만들고 제본을 한다는 걸 독자들도 조금쯤 알아주길 하는 마음에 출간을 결정했다고 설명한다.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맡은 일에 대한 열정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어쩌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그들이 가진 마지막 소명의식으로 세상이 굴러가는 것은 아닐까. 복직은 멀었고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보이지 않는 이름이 되어 빛나는 결과물을 만들고 싶어졌다.
P.S
<책의 엔딩 크레딧>을 읽고 알게 된 상식, 책의 페이지는 16의 배수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