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샤 페이지터너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지음, 정영문 옮김 / 빛소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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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지음, 정영문 옮김

빛소굴 펴냄


"그 모든 세월은 어디로 간 거지? 우리가 죽은 후에는 누가 그 시간들을 기억할까? 작가들은 글을 쓰겠지만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릴 거야. 모든 것이 보존되고, 가장 사소한 것까지도 새겨진 어떤 곳이 어딘가에 있을 거야. 파리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 거미가 그 파리를 먹어치웠다고 해보세. 그것은 우주 현상의 일부이고 그러한 사실은 잊힐 수 없네. 그러한 사실이 잊혀야 한다면 그건 우주에 오점을 만들어 내는 것일세. 내 말이 이해되나?"

-398쪽


<쇼샤>의 주인공 아렐레 그라이딩거는 보수적인 유대교 집안 태생작가다. 그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규율 안에서 자라왔지만 자유로운 가정의 순수한 소녀 쇼샤(쇼셸레)와 가까이 지내며 행복을 느낀다. 제1차 대전이 일어나며 자연스럽게 쇼샤와 멀어지지만 그녀를 결코 잊은 적 없는 아렐레, 쇼샤가 등장하는 꿈은 죽음과 영원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래서 아렐레는 쇼샤는 어딘가 살아있을 것 같았지만 동시에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을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아렐레는 쇼샤와 멀어지고 도라라는 여성과 교제를 시작한다. 도라는 스탈린주의자로 러시아를 찬양하며 폴란드와 달리 자유가 충만한 곳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녀는 신념에 따라 러시아로 떠난다. 하지만 러시아로 떠난 동지들이 감옥에 갇히거나 총살을 당하는 참상을 목격한 후 바르샤바에 남아 언제 고발될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돈벌이를 위해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현실에 치이며 자연스레 쇼샤를 잊어가던 와중, 작가 클럽에서 모이스 파이텔존과 가까워진다. 자연스레 파이텔존과 가까운 첸트시너 부부와의 교류도 잦아진다. 아내인 셀리아는 겉으로는 보수적이고 정갈한 아내이지만 파이텔존과 부정을 저지르는 사이로, 아렐레와도 가벼운 스킨십을 갖는 사이로 발전한다.

아렐레는 작가 클럽에서 또 다른 부부와 가까워진다. 미국 부자 샘 드라이만과 배우 베티 슬로만으로 베티는 아렐레와 접선하자마자 이성적인 호감을 내비친다. 베티는 쾌락주의를 탐미하는 여성으로 성공을 위해 나이가 많은 샘 드라이만과 함께 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아렐레의 능력을 높이 사는 인물중 하나 뿐만 아니라 그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돕기 위해 노력한다.

가볍게 관계를 갖고, 종종 거짓말을 하는 속세의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는 아렐레, 그는 쇼샤를 찾아간다. 번뇌로 가득찬 세상이 아닌 순수와 맑음으로 가득찬 그녀가 그리웠기 때문이다. 쇼샤는 어릴적 모습 그대로였다. 성장을 하지 않은 것인지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어린 시절 쇼샤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아렐레는 쇼샤와 유대인 전통 방식으로 혼례를 치룬다. 아렐레는 쇼샤와 함께하며 지난 시절을 성찰하고 내적 세계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으로 돌아간다.

"어머니, 우리는 아이를 갖지 않을 거에요."

"왜? 하느님은 세상과 유대인이 있기를 바라셔"

"하느님이 무엇을 바라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하느님이 유대인이 살기를 바라셨다면 히틀러 같은 작자들은 애당초 만들지도 않으셨을 거에요."

(...)

"어머니, 그 무엇도 다하우나 다른 지옥 같은 곳에서 고문받은 유대인들에게 위안을 주지는 못할 거에요."

"위안이 있다면 죽음 같은 건 없다는 것이지. (...)"

280-281쪽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에도 비슷한 문장이 등장했던 기억이 있다. 핍박받는 삶, 언제라도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삶에서 유대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짓수는 적었다. 그래서 아렐레는 살아남기 위해 속세의 삶을 선택하며 정체되어 있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결국 아렐레는 태초의 순수, "쇼샤"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자신이 잃어버린 이상과 순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쇼샤>는 작가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의 자전적인 작품이라고도 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던 분위기에, 사람들은 고통받아야 했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상실하고, 무엇을 추구하는지 조차 잊어버린 채 하루하루 연명하기에 바빴다. <쇼샤>의 아렐레가 그렇다. 그의 태초 모습은 "전통적인 유대교 집안의 랍비의 아들"이다. 아렐레는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세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것은 생에 대한 고뇌와 자기혐오뿐이다.

아렐레에게 쇼샤는 자신의 잃어버린 모습과 인간성이었다. 남들이 부족하다고 말했던 쇼샤는 남들과는 다른 가치를 잃지 않은 소녀다. 여성으로 자라 자신을 쾌락으로, 상품으로, 선전용으로 무너뜨리지 않은 채 세월을 보낸 소녀다. 모두가 잃어버린 것을 잃지 않은 쇼샤, 그녀에게 죽음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언젠가 다가올 수 밖에 없는 일종의 사건이다.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는 쇼샤의 표현은 어떤 초월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이는 공포에 짓눌려 내면의 고요와 세상의 진리를 잊어버린 사람들에게 경종을 주는 부분이다.

"위안이 있다면 죽음은 없다", 비단 죽음뿐만 아니라 어떤 역경이 닥쳐와도 차분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장이 되었다.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사랑이 스며드는 연말이 되기를 바란다.


리딩투데이 지원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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