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0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황가한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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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본 그는 불현듯 이 모든 것의 낯섦에 충격을 받았다. 이곳, 이 사람들의 집 마당에서, 밀랍으로 광낸 승마부츠를 신고 가서, 말채찍으로 초조하게 자기 종아리를 찰싹찰싹 치면서, 이 시커멓고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자신. 그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이 사람들을 향한, 발치에 누운 남자를 향한 분노를 느꼈다. 그것은 낯익은 낯섦이었다. 마치 자신의 일부가 몸밖에서 자신을 구경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무시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그 감정을 떨쳐냈다. 그 감정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적인 충동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우유부단과 유약함이라 생각하고는 두 팔로 들 것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63쪽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배반]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등장했다. 이전에 출간된 [낙원]을 읽고 알 수 없는 상념에 빠진 기억이 난다. [낙원]과 같은 문학 작품을 단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작열과 습윤이 오가는 아프리카 대륙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신비감, 야생성 등의 묘사가 생소했다. 그래서 이번에 출간된 [배반]에 대한 기대도 몹시 컸는데, 역시나. 또 다른 충격으로 머리가 멍 해졌다. 압둘라자크 구르나는 잔지바르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학업을 마친 후부터 영국인으로의 삶을 선택한 디아스포라적 작가다. [배반]은 무리 속 이방인의 이야기를 다채로운 시각에서 풀어냄과 동시에 자전적인 이야기가 가미한 독특한 작품이다. 특히 '배반'이라는 요소로 왜 누군가는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느껴졌다.

[배반]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이야기는 작은 연결고리로 이어져있으며, 책을 덮은 뒤에는 다시 1부로 돌아와 한 번 더 읽게 되는 묘한 끌림이 있었다. 반절 즘 읽으며, 작품의 제목이 왜 [배반]인가에 대한 물음의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서로 다른 그들은 사랑을 했고, 사회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미움과 동경이 응축된 그곳은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최소한의 도덕이었다. 그러나 2부에 도달해 파리다, 아민, 라시드 남매 중 막내 라시드가 영국으로 유학을 결심하면서 "배반"의 의미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배반"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미움, 불신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수반되는데 반해,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배반]에서 "배반"은 감정이 배제된 느낌이었다. 그래서 원제를 찾아보았다. 원제는 Desertion, 배반이라기 보다는 배반감을 느낄만한 개체를 이르는 듯했다.

Desertion

황폐, 황폐한 상태

내버림, 내버려진 상태

탈영

황폐, 내버려짐보다 "탈영"이라는 뜻에 눈이 갔다. 탈영은 "기피할 목적"으로 "지정된 장소"에서 이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황폐해졌거나 내버려진 곳, 혹은 그렇게 될 예정인 특정 장소를 "기피할 목적"으로 떠난 상황을 Desertion이라 부르는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남아있는 그들의 집거지가 누군가에게 기피해야할 장소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로 "배반"이 되었다. 떠난 사람은 고통을 함께 나누는 동지가 아니라, 황무지를 뒤로한 채 앞을 나아가는 배반자다. 확실히 "배반"이라는 단어는 조금 감정적으로 느껴졌다. 원제를 찬찬히 살펴본다. 감정의 불순물을 걷어내고 상태만 설명한 이 단어, Desertion. 다만 다시 생각해보니 "버려짐", "황폐" 등과 같은 제목은 남아있는 사람들을 너무 혹독하게 만드는 제목인 것 같기도 하다.

[배반]에서는 두 이방인을 주로 다루고 있다. 1부는 아프리카 내의 영국인, 2-3부는 영국 내의 아프리카인이다. (압둘라자크 구르나는 잔지바르출신이지만, 작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소는 탄자니아-케냐다.) 1부에 등장하는 마틴 피어스는 식민국 국적인 영국사람이다. 백인이라는 그 자체로 식민지 사람들에게 경외와 두려움을 일으킨다. 그렇다고 상처투성이의 이 백인과 몇 안되는 식민지의 백인들이 흑인을 우습게 보는 것은 아니다. 다른 문화권에서 자리 잡은 소수는 어찌되었건 상대적 약자다. 그래서 식민국의 그들도 식민지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내재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마틴 피어스가 그렇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한다는 명목하에 겨우 목숨만 구한 걸인의 행색으로 발견되었으니 말이다.

2-3부는 좀 더 보편적으로 매체에서 다뤄진 이방인의 이야기다. 선진국으로 떠나, 고향을 뒤로한 채 그곳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다만 [배반]의 화자 라시드가 영국으로 떠나며 겪는 불필요한 사건들은 그리 자세하게 묘사되어있지 않다. 대신 작가는 영국인을 선택한 라시드와 조국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비참한 상황을 대비시켜 "배반", Desertion 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는 쪽을 택한 듯 했다.

[배반]은 단순히 이민자들과 그들의 운명을 다룬 소설이 아니다. 식민시대의 상처가 대를 이어감에 따라 어떻게 대물림 되었고, 그것이 치유되어가는 과정을 담담히 적어내려간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삶 자체이다. 압둘라자크 구르나는 이 작품을 통해 한쪽를 옹호하고, 단순히 피해자였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배반]은 압둘라자크 구르나에게 선택할 수 없었던 조국과 선택한 내 나라의 입장에서 적힌 이국적인 시선의 아름다운 회고록이다. 식민시대의 사람들에게 연민의 목소리를 보냄과 동시에 독자들이 겪어보지 못했던 그들의 아픔을 이해했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 스며든 작품이었다. 생소한 배경과 흥미로운 등장인물, 흡입력 있는 전개로 시선을 끌어당긴 작품인 2021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배반]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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