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 1930 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
E. M. 델라필드 지음, 박아람 옮김 / 이터널북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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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8일

대문 옆에 크로커스 꽃 한 무더기가 핀 것을 보고 기분이 좋아진다. 상투적이지 않고 매력적인 표현을 찾고 싶어서 "독일 정원의 엘리자베스"가 되었다고 상상하려는 찰나, 요리사가 불쑥 다가와서 하는 말, 생선 장수가 왔는데 대구와 해덕대구만 있네요. 해덕 대구 냄새가 신선하지 않은 것 같은데 대구만 들일까요?

자주 깨닫는 사실이지만 사는 게 그렇지, 뭐.

86쪽


2014년 1월, 영국 멘체스터에서 사온 20대의 첫번째 다이어리가 생각난다. 두꺼운 연보라색 펠트지로 뒤덮인 꽃무늬 자수의 무지 노트, 그것은 결혼하기 전까지 작성했던 일기이자 배설구였다. 가끔 생각나서 들춰본 일기장에는 왜 이때는 이렇게까지 생각했지? 하던 시절의 부끄럼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는 대단한 작품이다. 나는 10년도 되지 않은 과거를 보며 지우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 저자 E.M.델라필드는 그 과거를 무려 100년이나 보존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수중에서 샅샅이 읽혀지는 중이다. 이 얼마나 용기있는 작품인가.

화자는 기혼 여성으로 아이 둘을 키우는 평범한 여성이다. 그녀는 종종 클럽활동에 참여하며 때로는 본인의 행실에 의문을 품는, 그러니까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수 있는 여성이다. 아니, 되려 상류층 여인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를 읽다보면 어느새 클럽에서 칵테일을 마시고 있는 여인이 되어있다. 일기 형식으로 된 여타 작품과는 달리 아주 자세하게,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했는지 그리고 자그만한 삽화로 그려두기까지 해서 생생하기가 보통이 아니다.



메모 : 프랑스 사람들은 너무 자주 터무니없는 감상주의에 빠지는듯

주어만 바꾸면 내가 쓴 일기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디테일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 '십자가와 열쇠'여관의 S 부인에게 놀라운 소식을 듣는다. 바버라 블렌킨솝의 약혼자라는 남자가 그곳에 묵고 있는데 노부인이 만나주지 않는 다는 것이다. 남자는 나이가 조금 들어 보이지만 굉장히 점잖은 신사라고 한다. 그러더니 내게 묻는다. 아기가 생겨도 히말라야에 가는 게 괜찮을까요? 한참 이런저러 얘기를 주고받은 뒤에야 이 모든 게 남의 사생활이라는 사실이 떠오르다. 어쨌든 뒤에서 쑥덕거리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125쪽

타인의 이야기를 하던 도중 느껴지는 자괴감, 어쨌든 뒤에서 쑥덕이는건 바람직 하지 않다. 100년이나 지금이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다 해놓고서 아차 하는 맘이 드는 것은 다르지 않구나. 가끔 이렇게 사는게 맞나 싶을 때가 있다. 사회적 동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사실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닌데, 표현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비난하고 있는데... 이런 고민은 <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를 읽다보니 말 그대로 '터무니없는 감상주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 사는 모냥 다 비슷한데, 나라고 다를 바 있을까? 이상하게 <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는 근래 읽은 작품 중 가장 큰 위안이 되었다.


기원전 1700년 경 수메르 점토판 속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이야기다.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버릇이 없다', '도대체 왜 학교를 안가고 빈둥거리고 있느냐? 제발 철 좀 들어라.', '왜 그렇게 버릇이 없느냐? 너의 선생님에게 존경심을 표하고 항상 인사를 드려라.' 어디서 많이 본 레퍼토리 같다. 2020년대에서도 들을 법한 고대 점토판 속 어록을 보며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생각보다 사람 사는 일이 별 일 아니라는 사실이 웃기면서 동시에 위안이 된다.

<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는 '이렇게까지 자세히 알아도 된다고?'와 '1930년대 사람이 느끼는 것과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이 별반 다를 것이 없네'가 공존하는 작품이다.또한 페미니즘 작품으로도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된 이래 1930년대 한 기혼여성의 삶을 그려내며 현실적인 여성 그 자체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기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점 또한 대단했다. 아, 오늘부터 일기를 쓰면 2122년에 누군가 내 일기를 읽고 공감할 수 있을까?

그건 후대만이 답할 수 있을 듯.


리딩투데이 지원도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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