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피아빛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6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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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사진의 언어이고 세상의 영혼이란다. 그림자 없는 빛이 없고 고통 없는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지." 그것은 돈 후안 리베로가 십칠 년 전 아르마스 광장의 스튜디오에서나를 가르치던 첫날 해준 말이다. 지금도 그 말이 잊히지 않는다. 그러나 앞서나가지 말아야겠다. 나는 이 이야기를 한 걸음, 한 걸음 한 마디 한 마디 있는 그대로 들려줄 생각이다.

281쪽


아우로라 리밍 델 바예, 길고 이국적인 이름만큼이나 특별한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아우로라(aurora)라는 이름은 리밍黎明(여명), 동이 트기 전에 태어난 그녀에게 가족들이 지어준 이름이다. 한자와 영어가 뒤섞인 이유, 그것은 길고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아우로라의 외할머니는 운명의 딸 엘리사, 외할아버지는 샌프란시스코의 중의 타오 치엔으로 두 사람은 이방인의 역사를 지녔다. 아우로라는 미명의 기억속을 헤매며 출생의 비밀과 자신의 뿌리를 알고 싶지만 그 누구도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일련의 경험을 통해 그녀의 숨겨진 과거, 뜨거운 애증으로 덮혀있던 그것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작품 <세피아빛 초상>에서 사진작가가 된 아우로라의 "세피아빛 초상"은 그녀의 근원을 되짚어 줄 표식이며 모호한 기억속 "영구적 선명함"을 남기기 위한 매개체를 의미한다. <세피아빛 초상>에서는 자주적인 여인들이 다수 등장한다. 아우로라의 기원을 역행하며 만난 그녀 주변 여성들은 각기 다양한 사연을 품고 있다. 아우로라의 외할머니 엘리사 소머스, 어머니 린 소머스, 할머니 파울리나 델 바예, 숙모 니베아 등이 등장한다. 그 중 파울리나 델 바예는 델 바예 가문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만약 실존인물이었다면 칠레 역사에 한 획을 그었을만큼 대단한 인물이다. 탁월한 선견지명으로 재화의 흐름을 귀신같이 알아차리던 그녀는 농수산물 수출입, 부동산 등 돈이 되는 것이라면 과감히 투자했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실패한 종목이 있었으니, 그것은 자식사업이다. 파울리나는 미국에서 세 아들과 조카 세베로를 부족함 없이 원조한다. 그러나 파울리나의 이 철없는 수혜자들은 린 소머스를 조우하며 이야기는 또 다른 국면을 맞는다.

그렇게 닷새 동안을 울기만 했고 타오 치엔이 투여한 진정제도 소용없었다. 닷새째 되는 날 엄마가 뺨을 두 번 세게 때리면서 현실을 똑바로 보라고 나무라고서야 울음을 그쳤다. 경솔한 행동을 저질렀으니 이제 대가를 치르는 수밖에 없지 않니, 넌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라 엄마가 되는 거다,

...중략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한탄함녀서 세월을 보낼 생각일랑 아예 마라, 지금 산책을 나갈 테니 당장 코 풀고 옷을 입도록 해라, 앞으로는 비가 오나 천둥이 치나 반드시 하루에 두번씩 산책을 하게 될 거다, 엄마 말 알아들었니? 네. 린은 대답했다.

114-115쪽

샌프란시스코의 혼혈아이자 빼어난 미모를 지닌 린 소머스는 순간의 열정을 삭히지 못한 일로 아이를 임신한다. 그렇다, 주인공 아우로라 리밍 델 바예는 이렇게 탄생했다. 그 누구보다 축복받아야할 아우로라의 탄생은 델 바예 가문의 부끄럼이자 린 소머스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린 소머스의 입장에서 아우로라의 탄생은 비극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상황의 희생양이었을 뿐.) 어머니는 강하다고 하던가, 린 소머스의 모친 엘리사는 비극을 견딜 새도 없이 아우로라 리밍을 거둔다. 그렇게 아우로라의 유년시절은 엘리사의 보호와 타오 치엔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하지만 아우로라는 알 수 없는 악몽만 반복할 뿐 행복했던 그 시절을 상기시키지 못한다. 델 바예 가문의 치부로 여겨질 뻔한 아우로라는 훗날 파울리나 델 바예 가문에서 성장하며 남다른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리고 카메라와 글에 담긴 가족의 역사, 가계의 숨결을 차차 알아가며 한 여성으로 변모한다.

린이 아우로라를 가졌을 때, 파울리나가 전쟁을 격을 때 등 <세피아빛 초상>은 격동의 시기에 현명한 여성들이 내린 결단을 다룬다. 그들은 이기적이지도, 편파적이지도 않았다. 가족이라는 틀을 깨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지키고 현실을 직시했다. 그래서 <세피아빛 초상>을 읽으며 우연히 접한 기사가 생각났다. 2006년 개봉한 영화 <괴물>에는 어머니가 등장하지 않는다. 아래 첨부한 어째서 영화 <괴물>에는 어머니가 등장하지 않는가에 대한 봉준호 감독님의 견해 중 일부다. 이사벨 아옌데의 작품뿐만 아니라 위기의 찰나에 "어머니"의 역할은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괴물>은 한강둔치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평범한 한 가정이 손녀이자 딸, 조카인 현서가 괴물에 납치되자 돌연변이 괴물과 맞서 싸운다는 내용. 그런데 이 가정에서는 어머니를 볼 수 없는 점이 흥미롭다.

...중략

이에 대해 제작사 측은 "봉준호 감독이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영화 속 가족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부족한 데다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빠져든다. 그러나 자식을 잃은 어머니는 그 순간부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용기와 지혜가 나오기 때문에 어머니가 자식을 구하는 설정은 당연하게 인식되기 때문이라는 것.

...중략

이 제작사 관계자는 "또한 봉 감독은 기본적으로 여자가 위험에 닥쳤을 경우 남자보다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영화에 어머니를 등장시키지 않았다"고 전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이사벨 아옌데의 작품은 페미니즘 성향이 강하다. 작품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들이 여성이고 남성이 조력자 역할로 등장한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혁명적인 여성들에는 틀림없으나 적지 않은 한계점이 드러나 아쉬운 점도 있었다. 첫번째로 아우로라는 델 바예 성을 물려 받았기 때문에 가문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파울리나와 살게 된 순간부터 리밍이라는 이름을 버려야했다. 아우로라가 칠레로 입국하면서 이름에 남은, 당시 사회 소수자인 중국의 분위기를 지워야하는 이유와 어머니쪽 혈통을 단절시켜야한다고 마음먹은 파울리나의 결정 때문이다. 여성지향적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아우로라의 모계를 그녀의 삶에서 모조리 지워버린다는 설정은 극단적으로 느껴졌다.

두번째, 위기 상황에서 공격적 성향을 띠는 인물들은 대부분 남성이며 대립관계의 여성과 여성은 결국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남성적인 모습이 폭력을 내포하고 있거나 여성적인 모습이 화합, 평화 등과 같이 비폭력을 대표한다는 한계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물론 파울리나 그 자체로 진취적이고 다채로운 여성을 보여준 것은 맞다. 그러나 이런 구도는 이전의 여타 페미니즘 소설에서 이어지는 인위적인 틀을 지울 수 없었다.

<세피아빛 초상>은 <운명의 딸>, <영혼의 집>과 이사벨 아옌데 3부작으로 불리는 대작 중 하나이다. 위대한 엄마와 강인한 딸, 주체적인 여성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세피아빛 초상>의 흡입력있는 전개는 3부작의 다른 작품에 대한 호기심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이사벨 아옌데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조만간 남은 두 작품을 접하지 않을까 싶다. 남미 소설이 생소하기도 하고 특정 성향이 강한 작품의 경우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곤 했는데, 근래 읽었던 작품중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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