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9
엘리자베스 인치볼드 지음, 이혜수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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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없는 여인! 아무리 감추거나 극복하려고 해도, 엘름우드 경의 날카로운 눈에는 그의 모든 사랑과 인내심을 시험하기에 충분한 결점들이 보인다는 것을 그녀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어떤 여성이 이런 실험을 좋아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실험에 희생양이 되지 않을 이들은 또 얼마나 적을 것인가!

174쪽


우리는 간혹 말하기 곤란하거나, 너무 많은 설명이 필요할 때 [별 거 아니야] 라는 말로 얼버무리곤 한다. 이야기를 시작하자니 마음이 먼저 요동치고 눈물이 날 것 같지만, 표현하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 [별 거 아니야]라는 말 만큼 단순하고 효과적인 문장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단순한 이야기 : A Simple Story>에 눈길이 갔다. 아마 작가는 단순하지 않은 이야기를 할 것 같아서.

엘리자베스 인치볼드는 제인 오스틴, 에밀리 브론테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작가이다. <단순한 이야기>는 그녀가 출간한 첫 소설로, 18세기의 사회 분위기와 주체적이고 자기 감정에 충실한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을 담았다. 여기서 언급한 "자기 감정에 충실한" 여성은 주인공 밀너양으로, 종교적 관점에서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저릿한 감정 표현과 애정 관계를 제외하더라도 등장인물 간의 오묘한 관계성에 대한 묘사가 아름다워서, 부정적인 표현은 금새 잊혀졌다.

1,2부는 밀너양, 3,4부는 머틸다가 주가 되어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작품을 읽으면서 엘름우드 경(도리포스)이 두 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유사하다고 느꼈다. 그는 방어적, 분노, 수용적 이 세 단계를 거치며 결국 감정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엘름우드 경은 생에 가장 사랑하는 두 여성을 처음부터 사랑했지만, 왜 애틋한 마음을 감추었을까?

첫 번째, 그의 방어적인 태도는 스스로를 결박하는 종교적 교리와 외상으로 인한 제약, 즉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처음으로 밀너 양을 접견했을 때, 엘름우드 경은 도리포스 신부로 종교에 귀의한 몸이었다. 때문에 그녀를 향한 관심과 열정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회피한다. 엘름우드 경은 10여년 만에 머틸다를 만났을 때도 이미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으로 인한 상처가 남아있었다. 딸을 향한 애정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보호자가 되어주었지만 머틸다에 대한 주제가 등장하면 아주 신경질적이고 극도로 예민한 모습을 보인다.

두 번째, 엘름우드 경은 마음의 갈등으로 인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겪는다. 사실 이 부분은 18세기, 19세기 여류소설에서 등장하는 클리셰 중 하나인 듯 한 부분이 있다. 왠지 그 시절에는 감정을 억누르지만 내면에서는 안절부절 못하는 무뚝뚝한 남성이 인기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니. 본론으로 돌아가 엘름우드 경은 당사자인 밀너양과 머틸다에게는 침착한 태도를 유지한다. 반면 두 여성들에 대한 감정을 제삼자에게 분노로써 표출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인다. 몇 번의 기함을 토한 다음에야 엘름우드 경은 그 자신의 마음을 인정한다.

세 번째, 드디어 수용의 단계다. 밀너 양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머틸다를 얼마나 아끼는지를 숨기지 않고 표현한다.

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마침내 터져나왔다. 그녀가 다시 기절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그녀를 깨우기 위해 격렬히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이 기억나지가 않았다. 이 이름 말고는 그 어떤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밀너 양, 나의 소중한 밀너 양"

341쪽

엘름우드 백작, 그가 평생 사랑했던 여인은 밀너 양 단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지켜줘야할 소중한 여식이 있다. 알면서도 외면했던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단순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또한 <단순한 이야기>에서는 단언하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결코, 단언컨대, 절대 등 다시는 상대를 조우하지 않을 것처럼 말한다. 그리고 충실히 단언한 바를 엎어버린다. 혹은 제삼자인 샌퍼드 신부, 우들리 양의 도움을 통해 간접적으로 없던 일처럼 무마시킨다. 이 특징은 앞에서 언급한 엘름우드 경 태도의 연장선이다. 뱉은 말을 지키고자 하는 엘름우드 경의 단언은 스스로를 속박함으로써 감정을 억누르려는, 일종의 주문 같은 역할이다. 갈등이 심화된 내면의 모호한 감정을 번복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마음처럼 되진 않겠지만 도리포스 신부로서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만큼 그는 번뇌한 상황 멈추는 것이 간절했을 것이다.


지향하는 남성상, 여성상, 당대의 가치관에 대해서 직관적이고 단순하게 묘사되어있다. 그러나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의 내적 갈등은 복잡하기 그지 없었던 <단순한 이야기>. 옮긴이의 말에서 <단순한 이야기>의 17년 간극이 독자들에게 호불호가 갈렸다고 한다. 그러나 나의 경우 밀너양과 머틸다를 확연히 대비시킬 수 있어서 되려 좋았다. 여성에 대한 이야기지만 모든 챕터에서 등장했던 엘름우드 경의 서사가 더 와닿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 원치 않던 이별, 원치 않던 만남을 반복하며 독기만 남았던 그가 밀너양을 외치며 눈물을 쏟아내는 장면은 오래 머무를 듯 하다.


본 서적은 리딩투데이 선물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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