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
마리 오베르 지음, 권상미 옮김 / 자음과모음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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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인생,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잠시, 나는 좀 더 나이가 든 내가 스테인이 되어가는 걸 상상했다. 안경 위에 탈착식 선글라스를 덧쓰고, 보트를 탈 때 모두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페도라를 벗지 않겠다고 고집 피우는, 장년(長年)의 여자에게 한없이 다정한 아이 없는 남자를.

195쪽


나이가 들어서도 사람은 한없이 치졸하고 유치해 질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소설이었다. 장녀라는 이유로 탈없고 모나지 않은 딸로 자라나야하는 당위성을 스스로 부여한 이다, 막내딸(이라고 해봐야 차녀지만)이기에 투정과 응석, 관심받는 것에 익숙한 마르테 두 인물의 갈등이 주된 전개다. 그리고 마르테와 동거 중인 남자 크리스토페르와 그의 전처 사이에서 낳은 딸 올레아, 자매의 엄마와 그녀의 애인 스테인이 등장한다. 자매가 철이 없는 것은 고사하고 가장 연장자로 추정되는 엄마의 애인 스테인의 실없는 발언들을 보며 정말 나이를 헛먹은 노인네라고 느꼈었다. 마지막장을 읽기 전까지는.


답은 오지 않았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언제나 이런 짓을 하곤 했다. 둘 중 누구도 나를 생각하고 있지 않을게 분명핟데도, 그들이 혹시 나를 생각하지 않을까, 응답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사람들을 귀찮게 했다.

79쪽

나는 전에는 그 아이를 눈여겨본 적이 없었지만 그 후로 가끔씩 그 애 생각을 했다. 고등학교 시작 전 여름 내내 그 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애는 여자친구가 있었는데도, 고작 그 '엄지 척' 때문에.

100쪽

이다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애정을 갈구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들이 있었다. 물론 작품 자체가 이다의 입장에서 서술되어있기때문에 우리는 이다 이외의 인물 감정선보다 이다의 감정선에 더 집중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장녀로써 겪어온 어떤 배제, 부모의 이혼 후 엄마를 기쁘게 하기 위해 아빠와의 만남을 극단적으로 제한한다거나, 본인보다 동생 마르테에게 초점이 맞춰진 엄마의 관심이 그녀의 결핍을 증폭시켰다. 마르테의 경우는 그 반대이다. 항상 관심받고, 마음가는대로 행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황이 본인의 마음대로 진행되지 않거나, 원하는 만큼 이목을 끌지 못하면 쉽게 토라진다. 이 둘은 마흔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음에도 어른답지 못한 행동을 하곤 한다. 이 것은 독자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이 불편함은 독자의 마음속 저 편 결핍과 과잉으로 뭉쳐진 어른답지 못한 무의식이 일으키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이다, 연애는 어떻게 되가?"

…엄마가 그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스테인이 토라진 척하며 말했다.

"아야, 그것도 못 물어봐? 이것도 '미투'에 해당되나?"

이런 부류의 농담…. 기분 나쁘게도 낯설지 않다(^^). 듣고 싶지 않지만 대부분의 여자라면 회사에서 한 번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이런 소리를 하는 점잖지 못한 중년 남자는 전 세계 어디에나 있구나 싶었다. 아마도 본인은 재밌다고 생각해서 한 발언이겠지? 전혀 재미없다. 스테인은 고집 센 중년남성의 표본이다. 하고 싶은 말은 뇌를 거치지 않고 뱉어버리고, 다른 사람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건지, 눈치채지 못한 척 하는건지 싶을 정도로 하고 싶은대로 행동한다. 그래도 연인인 자매의 어머니에게 만큼은 달달한 연인이다.


내가 물었다. "마르테와 크리스토페르는 얘기하는 중인가요?"

그가 설명했다. "응. 내가 자리를 피해주는 게 좋겠다 싶어서."

…"왜 자식이 없으세요?"

"왜 자식이 없는가." 그가 미간을 긁적이며 내 말을 반복했다.

"그냥 그렇게 됐어 나랑 결혼했던 여자가 가질 수 없었지. 요즘 같으면 기술 진보니 뭐니 해서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또 물었다. "후회는 없으세요?"

…그가 결국 말했다. "후회가 왜 없겠어. 하지만 이 경우엔 후회할 게 뭐가 있나 모르겠어. 좋았겠다고 가끔은 생각하지. 정말 좋았겠다고. 그런데 돌아가신 지 오래된 할머니가 가끔 보고 싶은 정도랄까. 말하자면 말이야."

이 정도의 대답을 할 스테인이라면 눈치없는 척 하며 하고 싶은대로 했다는 것에 한 표. 가장 철없어 보이던 그도 삶의 일가견이 있었음을. 한 차례 폭풍우가 끝나고 이다가 찾은 스테인이라는 점이 재미있었다. 그저 눈치없는 늙은이라고 치부했던 이다가 정작 침묵과 위로가 필요할 때는 가장 연장자인 스테인을 찾았다는 그 점이.


전체적으로 그들은 엉망진창이였다. 단 한 명도 안정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실패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마르테의 임신 후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았음을 고백한 크리스토페르, 아빠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지만 새우를 까주던 아빠를 회상하는 이다 등과 같이 지나가버린 순간을 후회로 남겨둔 이들의 이야기는 다른 양상으로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들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겉으로 안정되어 보이지만 나는 안정적이야! 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마리 오베르의 [어른들]은 그렇다. 읽을 수록 불편하고 어딘가 쿡쿡 거슬리지만, 내 이야기라고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그냥 아는 사람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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