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에 담배를 물고있는 천사가 집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씻은 컵 세 개를 손에 들고 항상 내게 말씀하셨다. "절대 세게 쥐면 안 돼. 깨지거든." …더러워진 그릇은 하루에 두 번 다시 태어난다. 그것은 일상의 수수께끼 같은 진부함이 밀려왔다 밀려 나가는 조수와도 같은 움직임이다. 나는 손으로 하는 '옛날 방식'의 설거지를 좋아한다. …아버지가 내 손을 잡아주었다. 눈을 감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손만이 느껴졌다. 나는 그 손길이 나를 온전히 보호해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작아져 있었고, 몸과 영혼을 그 손에 맡겼다. 다소 묵직하고 주름진 그 손은 나의 피난처, 확신, 모든 믿음이 되어주었다.
127-129쪽
또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보뱅의 아버지는 분명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설거지를 하는 아버지를 천사라 칭하는 아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설거지를 조수와도 같은 움직임이라 표현한 보뱅도 만만치 않다. 이 작품에서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단상.
세상은 성인들로 넘쳐난다. 순교자들 말이다. 나는 저 두 단어를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는 날마다 늘고 있는 그들을 '알츠하이머'라 부른다. 점점 더 늘어나는 그 병이 우리에게 기본으로 축소된 삶을 선물한다. 고단하고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일들, 물건을 사고 타인을 질투하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전부인 현재 생활의 모든 질서에서 우리를 해방한다. 이들에게는 삶이 아닌 삶, 한 번도 삶이었던 적이 없는 삶은 끝이 난 것 이다. 그들의 눈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해 두려울 정도로 열려있다. 그들이야말로 세상을 허물어뜨리는 형이상학적 질병의 먹잇감이다. 우리는 그들을 살아있는 보물처럼 여겨야한다. …비록 아버지는 나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었음에도 내가 누군지 여전히 알고 계셨고, 나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133-135쪽
어린 동생이 죽었을 때, 죽은 자식에게 마지막 입맞춤을 하려다가 전염병이 옮는다는 경고와 함께 의사에게 뺨을 맞았다는 보뱅의 아버지 이야기는 어쩐지 울컥한다. 자식이 나보다 먼저 죽는다는건 상상도 못할 고통일 것이다. 비록 보뱅의 아버지는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어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 그러나 보뱅을 사랑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고,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은 고통을 잊지 않았다. 그렇기에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버지, 노인들을 가장 근본적인 것들만 품고 소박한 삶을 영위하는 성인이라 칭한 것이다. 죽음과 가까워지는 병을 앓는 사람들을 보며 보뱅은 우리 모두가 한 줌의 부스러기로 끝나는 존재들이라 일컫는다. 허나 죽음과 가까워질수록 살아있음의 기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보뱅은 세월의 흔적에 바스라진 그들에게서 천사의 흔적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