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의 정원에서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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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죽기 사흘 전, 너는 여전히 생통드라에 있다. …나는 걸으면서 다음번 책은 너에 대해 쓸 거라고, 너에 대해서만 쓸 거라고 말한다. 너는 웃는다. 척문장도 이미 정했다고 네게 말한다. '내가 이 생에 감사한다면, 그건 네가 있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이다. 너는 걸음을 멈추고 네가 세상에 없다면 무엇을 쓸거냐고 묻는다. …내가 네게 말한다. 언젠가 네가 더는 이 세상에 없다 해도, 계속해서 이 삶에 감사하고 사랑할 것이라고. 너는 웃음을 터뜨리며 환한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아주 좋다. 그렇게 하는 게 훨씬 좋지. 다음번 책에 그 말을 그대로 쓰겠다고 약속해줘….' - 그 때 우리는 이미 죽음에 대해 잊어버렸다. 공기를 가르며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이 아직도 한참이나 멀리 있는 것처럼.


이 작품은 크리스티앙 보뱅이 1995년 연인 지슬렌을 잃은 뒤 그 다음해인 1996년 출고한 작품이다. 지슬렌은 세상에 없다. 하지만 보뱅의 세상에서 그녀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에서 보뱅은 지슬렌의 죽음을 인지하고 있지만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울러 그녀를 회상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면 마음을 추스리는 것부터가 보통일이 아닐 것 같은데, 보뱅은 슬픔을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개인적으로 첫 장에서 지슬렌이 세상을 떠난 상황에 대한 서술에서 울컥했다. 너무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어보진 못했지만, 죽음이란 그런 것 같다. 도처에 존재하지만 닥치기 전에는 그 의미를 전혀 가늠할 수 없는 것. 지슬렌은 본인에 대해 쓴 책을 읽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어떤 작품을 탈고했을까? 몹시 궁금해진다. 아마 [그리움의 정원에서]와 같은 먹먹한 작품은 아니었을 성 싶다.

[그리움의 정원]작품을 접하며 크리스티앙 보뱅이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 작가에 대해 아는 것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작가에 대해 분석한 소개글을 읽어도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만 읽어도 느낄 수 있었던 '맑은 문체'를 지녔다는 보뱅의 글.

너는 시간의 끝에서도 마흔네 살, 마흔다섯 살이다. 너는 늙는 것을 두려워했으나 이제 더는 늙지 않는다. 시간이 종말을 고할 때까지 네 이름을 읊조리는 내 혀끝에는 핑그르르 세 번 돌다가 공중에서 두 번 춘추는 첫 눈송이의 서늘함이 남을 것이다. 첫 눈을 보게 되어 기뻤다. 행복하기도 했고 불행하기도 했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더는 늙지 않는 지슬렌의 존재는 흔적도 없이 녹아내리는 눈처럼 그렇게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는 세상에 존재하는 중이 아닐 뿐, 존재했었고 보뱅의 작품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한 모든 공간에서 존재할 것이다. [그리움의 정원]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지슬렌과 그녀를 둘러싼 모든 존재들이다. 그녀와 나눈 대화, 파리에서 함께 본 '옛날 영화', 생세르넹의 나무들, 그녀가 사랑한 생통드라…. 모든 것들이 지슬렌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그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다.

너로 인한 그리움과 공허와 고통마저도 내 안으로 들어와 나의 가장 큰 기쁨이 된다. 그리움, 공허, 고통 그리고 기쁨은 네가 내게 남긴 보물이다. 이런 보물은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죽음의 시간이 올 때까지, '지금'에서 '지금'으로 가는 것 뿐이다.

또한 그는 연인을 잃었음에도 매상황에 감사하는 태도를 잃지 않는다. 아마 카톨릭문학상을 수상한 그의 태도는 어떤 맹목적인 믿음이 기반이 되어있지 않을까 싶었다. 소개글처럼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꾼 작은 글의 정원'이기 전에 보뱅 스스로의 아픔을 보듬고 잊고 싶지 않은 존재를 추억하는 작품이다. 내가 세상을 떠난다면 나를 사랑했던 사람이 이 작품을 읽어줬으면 좋겠다. 나를 잃었다고 너무 슬퍼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보뱅과 같이 세상을 떠난 그녀를 어둠속의 한줄기 빛처럼 작품으로 승화시키지는 못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질퍽한 어둠속에서 방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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