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작가를 한 권의 책으로 만나는 일은 늘 즐겁다. 어느 작가의 글은 삼삼하고 담백하게 다가왔고, 또 어느 작가의 글은 숨죽이고 읽을 수밖에 없었다. 한 권을 다 읽었을 땐 집을 보는 나의 시선이 그 어떤 때보다도 깊어지고 섬세해졌다. 집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묶인 에세이집이지만, 반복된다는 느낌이 전혀 없이 모두 다 다른 이야기로 새롭게 다가왔다. 집이란 존재는 한 글자의 명칭으로 뭉뚱그려지만, 사실은 사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탄생하는 하나의 생명체,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이겠지. 열 가지 집을 글로써 방문하며 나와 함께 호흡할 나의 집이 생길 그날을 꿈꾸었다.
자식으로 산 세월이 제법 될지라도 자식을 낳아 길러보진 않았으니, 감히 부모 입장의 모든 마음을 이해할 순 없다. 사람 사이엔 분명 상성이 존재하고, 자식도 부모도 어김없는 사람이라고 되뇌일 뿐. 악마로 태어나 사랑할 수 없었든, 사랑받지 못해서 악마가 되었든, 사랑 없이 악만 남게 된 관계는 명백한 비극이고 파국이다. 세상에 한 인간을 내보내고 평생 곁을 지킨다는 일이 절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세 남매를 낳아 정말 똑같은 사랑으로 기른 나의 어머니가 진정 대단하다는 것을, 잠 못 이루며 읽어낸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절감했다.
전혀 다른 8명의 사람들이 써 모은 소설집 같았다. 아직 글로써 세워진 정체성은 약하지만, 다채로운 접근과 시도가 돋보인다. 나란 사람은 한꺼번에 많은 걸 기억하지 못해서, 보통 이런 단편 소설집을 읽고 나면 가장 기억에 남는 한두 편의 여운에 나머지 소설들은 금세 묻혀버리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절반이 넘는 이야기들의 잔상이 책을 덮고 난 이후에도 오래도록 남았다. 하나의 단편소설에 장편소설 못지않은 시공간을 담아내면서도, 서두르거나 뭉뚱그리지 않고 차곡차곡 의미를 쌓아나간다. 어려운 말이나 화려한 수식 없는 담백한 문체가 8개의 세계를 술술 읽어 삼킬 수 있게 도와주었다. 다만 독자가 스스로 사유할 만한 여백을 곳곳에 남겨두면 더 좋았을 것같다.
어릴적 이사를 하던 날, 엄마가 내다 버린 책 더미를 열심히 파헤쳤다. 거기서 꺼내온 건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가물한 오래된 요리책들이었다. 어린 아이에게 요리책은 따라 해먹어보고 싶은 욕구보다 가만히 앉아 정독하고 싶은 욕구에 더 잘 맞아떨어졌더랬다. 이제 그 책들은 온데간데 없지만, 그 안에 차려져 있던 몇가지 음식들은 아직도 내 안에 꿈처럼 남아있다. 그림의 떡. 이 속담의 참뜻을 나는 아마 요리책 안에서 찾아냈던 것 같다. 그 때의 추억이 좋아서였을까, 간만에 손에 들어온 묵직한 요리책이 반가웠다. 이번에도 역시나 한 장 한 장 꼭꼭 씹어 삼키듯 정독했다. 오로지 요리만을 위해 꾸며진 공간에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이 주는 아늑함이 허기진 마음을 충만하게 채워주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칼도 다루고 불도 다룰 줄 아는 어엿한 사람이 되었고, 그에 걸맞게 71가지 음식을 하나씩 해먹고 싶은 의지도 샘솟는다. 그 처음은 아마도, 생김새는 익숙하나 이름이 생소한 로메인 겉절이가 될 것 같다. 으아 맛있겠다!
나는 단편소설집을 좋아한다. 여러 작가의 소설을 엮어 만든 책은 더더욱. 지구력이 부족해 긴 글을 소화하는 걸 어려워하고, 시를 즐기기엔 행간의 여백을 채우는 능력이 부족하니 짧고 굵게 여러 색의 여운을 남기는 단편소설이 좋을 수밖에. 제목 때문일까. 소설 하나하나 한 문장 한 낱말을 되뇌고 새기며 읽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 마땅한 문장들이 많기도 했다. 망각이 결코 축복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 앎조차 망각해버리려는 우리들이다. 이 책은 굴러왔거나 스며든 재난에 휩쓸려 우리 곁을 스쳐간 이들을, 이 우주 어딘가를 떠돌며 분명 우리와 함께하고 있을 그들을, 망각의 구덩이에서 꺼내어 바로 보라고 들이민다. 불가항력 앞에서 무기력을 자각하며 온 우주를 원망하게 되더라도, 기억하는 것만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무엇이라고. 속삭이다가, 외치다가, 어느 순간 울부짖는 듯한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