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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섹슈얼리티의 위계 - 누구도 페니스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계정민 지음 / 소나무 / 2019년 9월
평점 :
확신에 차 있는 책이다. 놀랍도록 깊은 연구들은 그 확신을 뒷받침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고, 매우 체계적이며 강렬하다. 저자가 남성 섹슈얼리티에 관한 자신의 경험과 방대한 자료를 탐구함으로써 도출해 낸 이 세계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견고함을 느끼게 한다.
남녀갈등은 요즘 세상에서 넌덜머리가 날 정도로 자주 접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섹슈얼리티'라는 단어는 '남녀갈등'으로 연결되었고, 그 자체로 피로감을 주는 민감한 소재로 여겨져 무의식적으로 멀리하던 참이었다.
어떤 갈등이든, 상대를 이해하려는 의지보다 나 자신을 알리고자 하는 욕구가 더 큰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조금씩 알고 이해하려 노력하면 그래도 모두가 덜 상처받을 거라 믿는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에 끌렸다. 나와 다른 성별을 가진 그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직접 보게 된 이 책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지만, 기대했던 것보다 더 흥미로웠다.
저자는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크게 다섯 가지 - 기혼의 비장애 성인남성, 소년, 독신남성, 남성동성애자, 장애남성 - 로 나눈다. 가장 일반적인 남성의 표상으로 통하는 '기혼의 비장애 성인남성'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그 표상과 다르다는 이유로 숨어야했고, 드러낸 순간 은폐당해야 했던 나머지 네 가지의 섹슈얼리티를 수면 위로 꺼내준다. 시대를 나타내는 거울인 문학작품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남성 섹슈얼리티와의 연결고리를 찾아내어 그들의 역사와 흐름을 드러냈다. 특히 남성동성애자에 대한 내용이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어떤 삶의 경계도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삶의 원칙 중 하나다. 섹슈얼리티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의 사고와 감정, 행위가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위협하거나 파멸시키지 않는다면 그 경계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지켜주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때때로 나와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려다 되려 자기 자신을 부정하게 되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런 상황을 마주한 사람은 혼란스럽다. 혼란이 오래 지속되면 거부감이 들게 되고, 거부감은 혐오감으로 금세 진화한다. 하지만 인정과 존중은 이해와 다르다. 이해가 어렵다면 하지 않아도 좋다. 침범하고 훼손하는 것만은 하지 말자.
이 책을 읽다보니, '나는 과연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됐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이미 묻기도 전에 알았음을 깨달았다. 여성 섹슈얼리티에도 역사가 있을 것이고, 흐름을 통해 체계화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을 찾아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