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다시 묻는다 인문학 공동연구 총서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엮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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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 인간의 삶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특히 AI, 유전자 변형 기술 등이 인간을 규정하던 경계선을 조금씩 희미하게 만들고 있는 지금,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시대적 함의를 지닌다. 인간의 본질은 무엇이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 인간의 가치와 존엄을 묻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교수 14명이 모였다. 이들의 대답을 엮은 책이 바로 이 책 <인간을 다시 묻는다>이다.


책은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정체성, 인간의 영혼과 의식, 인간의 욕망과 좌절, 인간의 본성과 자격이 그것이다. 각 장마다 3-4명의 교수의 글이 실려 있는데, 일반 독자도 큰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는 수준이면서도 글의 깊이는 전혀 얕지 않다. 역시 우리나라 인문학계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교수들이 쓴 글이라 그런지 사유의 깊이에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내용을 몇 가지만 꼽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인간은 종교적인 존재인가ㅡ세속적 신비주의' 파트가 매우 흥미로웠다. 현대 사회에 접어들며 종교 인구는 점차 감소하고 있지만, 재미있는 점은 특정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비유물론적 세계관, 즉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가지는 비율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신비주의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종교가 떠오르지만, 종교와 무관한 신비주의도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세속적 신비주의다. 일반적으로 종교인이 기도 중에 영적 체험을 하는 등의 경험이 종교적 신비주의에 포함되는데, 종교적 맥락 밖에서 일어나는 자연발생적인 합일 체험이 세속적 신비주의다. 이러한 신비적인 경험은 기존의 세계관, 인종, 나이에 상관 없이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다. 세속적 신비주의 경험을 한 사람들은 경이로운 비일상적 경험 속에서 시공을 벗어난 초월성, 나와 나 아닌 차원이 하나가 된다는 일원성을 공통적으로 느낀다.


이러한 세속적 신비주의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하지만, 필자는 글을 읽으면서 이것이 인간은 종교적 존재라는 하나의 징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질적으로 유한하고 결핍이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종교의 비합리성 때문에 종교를 버리더라도, 결국은 영원하고 무한한 어떤 차원을 항상 열망하고 바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수준이 더 높은 이들에게 자연발생적으로 신비적인 합일 체험이 일어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좌우간에 인간 존재의 근원적 종교성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주제였다.


그리고 '영혼은 어디에 있나ㅡ고대 그리스의 인간' 파트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인간은 죽으면 혼백이 육체로부터 빠져나가고, 그 혼백은 허깨비 같은 상태가 되어 하데스의 세계로 간다. 그리고 혼백이 빠져나간 육체는 개와 새의 먹이가 되어 완전히 해체될 뿐이다. 그런데 플라톤의 <파이돈>, <국가> 등을 통해 고대 그리스인의 죽음관이 완전히 바뀐다. 플라톤에 의하면 지혜와 용기, 절제의 덕을 조화롭게 실현한 정의로운 사람들은 상승의 계단을 올라가 천년 동안 행복한 여행을 하다 돌아온다. 반면 정욕에 더럽혀진 영혼은 거의 지옥과 같은 곳에서 천년 동안 고생을 하다가 환생한다. 철학을 통해 정화된 영혼은 육체의 굴레에서 벗어나 찬란한 진리와 참된 존재의 세계인 이데아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이렇게 생성과 소멸이 반복하는 찰나의 세계를 떠나 영원불변하는 존재의 참모습으로 간 그것, 그곳으로 가기 전에 인간의 육체에 묶여 있던 바로 그것이 바로 인간을 진정 인간이게 하는 실체였다. 현 시대에 영혼이라는 개념을 믿는 이들의 수는 줄어들고 있겠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의 삶과 죽음, 영혼과 육체에 대한 논의를 접하면서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의 종교성, 영혼, 꿈, 몸, 인간 본성 등 인간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정말 값지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삶 속에서 최고의 인문학자들의 탁월한 사유를 접하며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다. 인간에 대해, 인간다움에 대해 깊이 사색해보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유한하기에, 찰나에 불과한 인생이기에 오히려 무한한 영원보다도 더 찬란할 수 있고, 신들의 세계보다 이 세상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 필멸의 삶을 사는 인간들이 허락된 시간을 함께하며 어우러져 삶을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이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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