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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두 권짜리인 데다가 요즘 책답지 않게 글자 크기도 작고 빼곡해서 분량이 많아 보였다. 하드 커버도 아니고… 정가가 9,000원이니, 책의 내용이나 품질 대비 가격 수준이 적절한 듯싶다. 내용도 없고 분량도 짧은 소설을 글자 크기 키우고 행간 넓힌 다음 하드 커버로 씌워서 8,000~9,000원씩 받아먹는 소설들보다는 훨씬 정직해 보여 좋다.
내용은 책의 분량만큼이나 알차다. 두 권 포함, 700페이지에 달하는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읽기 전에 이 작가의 국적과 배경을 파악하고 약간의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미국이나 일본, 중국, 유럽 등이 아닌 터키라는 생소한 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현재가 아닌 1500년대 말의 이슬람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내용은 유럽의 화풍과 중국의 화풍이 유입되어 혼란을 겪고 있는 이슬람 세밀화가들의 얘기이다.
특정 서술자나 작가의 시점에서 이와 같은 얘기들을 풀어 나갔다면, 분명 지루해서 연신 하품을 해대거나 몇 장 읽지도 못하고 책을 덮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오르한 파묵은 이슬람 세밀화가들의 혼란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추리소설과 시점의 변화라는 방식을 택했다.
이야기 구조는 궁중의 어느 한 세밀화가의 죽음을 시작으로 그 살인자를 찾아내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카라와 세큐레의 사랑과 두 사람의 결혼을 둘러싼 얘기들이 공존하는, 병렬 구조 형식을 띄고 있다. 세밀화가의 살인 사건에 카라와 세큐레의 가족이 연루됨으로써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되는 소설의 내용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권의 첫 장을 넘겨본 독자들은 알겠지만, 이 소설은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첫 장의 제목 또한 ‘나는 죽은 몸’이다. 각 등장인물 – 카라, 세큐레, 에스테르, 에니시테 등 – 의 시점에 따라 문체가 달라지기 때문에 작가의 시점으로 서술한 여타 책들보다 감정 표현도 자유롭다. 평범하게 서술될 내용들을 당사자의 입장에서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마치 줄리안 반즈의 <내 말 좀 들어봐>와 흡사하다.
‘당사자의 입장에서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은 인물에 국한되지 않는다. 개, 나무, 금화, 말 등 동물과 사물을 의인화해 마치 그들이 말을 하고 있는 듯 서술되고 있으며, 이들을 통해 시대적 혹은 사회적 배경을 일부 보여주는 점은 배경에 대한 장황한 서술로 일관하는 여타 외국 소설들과 차별화되어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