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연인
우르스 비트머 지음, 이노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따뜻함과 씁쓸함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노숙한 문장이 중도에 읽기를 포기하지 않게 해준 것이 다행스럽다. 하지만 20세기 전반기 스위스의 교양있는 중산층의 가족사는 지금 여기에서는 너무 멀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사실 이 소설은 '어머니의 연인'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소설에서도 반복되는 말이지만, 어머니의 '기질'에 관한 이야기로 읽힌다. 어머니가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던 어떤 기질; " 어쩌면 그녀의 기질이라는 건, 그녀가 종종 시선을 내면으로 향한 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머릿속의 고열을 느끼면서 방 한구석에 굳어진 채로 서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 그럴 때 그녀의 내부에서는 충만한 광채와 빛의 세계가 펼쳐졌다." 전 시대의 낭만주의적 우울 또는 열정과도 같은 그 기질은 그러나 전쟁을 겪으며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는 한 예술가-사업가 부르주아와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의해 좌절당하고 억압당한다; "이제 그녀의 기질이라는 것은 정확히 다른 사람들과 같은 것이 되는 것이었다. 정상적이 되는 것. (...) 그녀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는 덥고 추운 것도 느끼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기질은 항상 건강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여든두 해 만에 자신의 생을 견디기를 포기한다 - 세상에, 여든두 해라니.

나는 전 시대 유럽의 우울과 열정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러니 그것이 왜 20세기에 들어 일종의 여성적 정신질환으로 여겨져야 했는지도 알지 못하고, 실은 (상관없지만) 그 패배와 몰락이 조금 불만이기도 하다. 조금 다른 문제지만, 유럽의 정신질환을 2차대전이라는 트라우마로 수렴시키는 방식은 조금 안이하지 않은가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어머니의 연인>은 그렇게 해석하지도, 그렇게 해석되도록 쓰고 있지도 않다. 다만 따뜻하고 씁쓸하게만, 주마등처럼 후루룩 그 장면들을 반추할 뿐이다.

어쩌면 그것이 '어머니'의 기질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가 노숙한 작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단은 후자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원래 노작가는 모든 지나간 것들에 대해 말함으로써 모든 것을 지나가버린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아닌가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