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
나카무라 코우 지음, 현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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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아주 재미있었달까 그렇다.
정말이지 소소한 이야기일 수 있겠다. 남동생이 있었으면 하는 누나의 남동생이 되고,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이력서를 쓰고,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호신술 연습을 하고, 수수께끼의 소녀를 만난다. 사람들은 모두 따뜻하고 산뜻하고, 주인공은 늘 차분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 듯 보이고, 주인공의 말과 행동은 꼭 아기처럼 귀엽기만 하다. 그것도 좋다.

그렇지만 내가 자꾸 눈길이 가는 것은, 그보다는 주인공이 품고 있는, 끝내 털어놓지 않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사실 그야말로 이건 '리셋 증후군'이다. 주인공은 모든 것을 지우고 다시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시작'이란 '리셋'의 다른 말이다. 그러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게 당연하다. 이력서의 한 줄 한 줄을 채우는 일이, 지하철역 즉석사진기에서 사진을 찍는 일이, 새 재떨이를 사오는 일이, 심지어는 다림질까지, 모두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일이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니 동작 하나하나, 감각 하나하나 모두 차근차근 배우고 익혀나가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런 게 좋다. (과장이지만) 죽음 이후, 멸망 이후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생활. 차마 말할 수 없는 캄캄함 없이는 시작되지 않는 행복.

리셋 이전에 대해 주인공이 이야기한 것은 단 세 마디였다. 그나마 둘은 "아니에요"와 "그런 것하고는 달라요"다. 어쩌면 별것 아닌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는 새로 시작했고, 앞으로도 수수께끼의 소녀와 데이트를 하고, 우산고양이 노래를 부르고, 다림질을 할 것이다.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 한자와 료의 일생이 앞으로도 행복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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