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목 지음 / 난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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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시간 동안 천천히 일어난 기적을 만지는 것이다. 눈으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의 형체가 바로 내 앞에 있는 한 명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재> p.11"



겨울과 너무도 잘 어우러지는, 쓸쓸하고 황량하지만 너무도 아름다운 소설 <재>를 만났다. 느리게 흐르는 이야기 속 꿈을 꾸는 듯한 시어들은 둔중한 속도로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시간을 좇는다. 편안한 의자에 앉아 <재>를 펼쳐들면 내 시간도 따라 더디게 흘렀다. 등장인물은 주인공 '나', 그의 고등학교 시절 친구였던 '모', 모의 누나인 '현'과 현의 아들 '섭', 그리고 주인공의 연인 '수'이다. 주인공 '나'의 독백으로 이어지는 소설은 모진 마음을 먹은 가시가 돋힌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야기의 집을 쌓는다. 이 집은 황량하고 슬프지만 아름답다! 좋은 문장을 발견하면 인덱스 테이프로 표시를 해두는데 <재>는 그런 표식이 의미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아름다웠기에. 



"젊음은 때로 실패와 낭패를 미리 살기도 하는데 그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잠깐씩 나이 밖의 시간을 빌리는 친구들 말이다. 

나 역시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없었다. 나는 되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청소년이었으니까. 흔히 찾는 이유처럼, 나 자신이나 가족에게 특별한 사건이나 사연, 그로 인한 난감함과 난처함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그 나이 때 친구들이 대개 그렇듯이 뜻대로 되는 것이 있을 리 없었고, 또 다들 읊어대는 그 삶의 뜻이란 게 무엇인지도 모르겠는, 그래서 조금은 우울하고 그래서 어눌한 학생이 나였다. 

 <재> p.40"



소설의 화자 '나'는 조금은 우울하고 어눌한 학생이었다. 뜻대로 되는 것도 없고 그 삶의 뜻이란 것도 모르겠는. 반대로 모는 중학교 때까지 축구 선수로 뛰었고 전교 석차 상위권에 머무를 정도로 성적도 좋았다.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우연힌 기회로 모와 친해졌다. 모와 함께 지금은 빈 집인 그의 본가를 찾아 술을 잔뜩 마시는 일탈을 저지른다. 그저 잠깐 나이 밖의 시간을 빌려 술을 마시곤 대화를 나눈다. 가족이나 진학, 진로, 성적 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계절 이야기, 꽃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라도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모는 "걔는 뛰는 걸 보면 있잖아. 이상하게 모든 게 다 납득이 돼. 뛰어나구나, 영리하구나, 천재적이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은 정말 저것밖에 모르는구나.(p.48)"라고 말한다. 단 하나의 불로 세상 전부를 태우는 사람. 마라도나 이야기는 축구에 관한 이야기이자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정말 인간은 남의 불행을 통해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행한 사람들은 더 불행한 사람을 필요로 하고, 부정한 사람들은 더 부정한 사람을 필요로 하며, 마음에 치부가 있는 사람들은 다른 이의 사랑을 치부로 만든다. 그런 사람들은 이야깃거리가 필요하지만,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이야기 밖으로 나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그저 적당히 멀리,보일 듯 말듯한 곳에 있어야 한다. 사라지기를 원하지도 않으며 잊을 용의도 없다. 자신의 레이더가 닿는 딱 그만큼의 거리에 남아 자신들에게 포착되어야 하고, 그로써 뒷담화 소스를 언제든 제공해야 한다. 

한국소설추천 <재> p.54"



이야기는 전환되어 모가 세상을 떠나고 장례식장에 고등학교 동창들이 모인다. 모의 누나인 현은 미혼모이고 그녀의 아들 섭은 발달장애아이다. 섭의 특별함은 현을 불편한 사람에서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현은 속 모를 미혼모에서 아픈 애 엄마가 되었다.(p.53) 장례식장 자리에서조차 모자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현은 누군가 자신을 애처롭게 볼 때 "동정할 거면 차라리 돈을 줘."라며 자신을 통해 뭔가를 얻었다면 대가를 지불하라고 했다. 남의 불행을 통해 살아가는 사람들, 불행한 사람은 더 불행한 사람을 필요로 하고, 부정한 사람들은 더 부정한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기에.


"훗날 수는, 내가 이 사랑에 더 성실했으니까 괜찮아, 라고 말했다. (...)

처음 나는 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에도 성실과 불성실이 있어서 어떤 사랑을 부지런하고 어떤 사랑은 게으르다는 말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성실이 필요하다면 그것이 사랑일까. 저녁마다 나에게 오기 위해 수에게는 성실함이 필요했을까. 성실해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 말하자면 사랑은 이미 성실을 속성으로 가지는 것은 아닐까.

<재> p.81"



"결혼은 사랑을 의무로 만드는 것이라고, 의무가 된 사랑이 사랑일 수 있느냐고, 수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제도가 된 사랑은 관계에 대한 권력으로 작동될 뿐이라는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재> p.82"



주인공과 수는 9년을 사귀고 4년 동안 함께 살았다. 수와 함께 있어도 더는 수와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들이 함께 알고 있던 단어들이 다 옛말처럼 무용해져버렸고 둘은 헤어졌다. 헤어지면서 수는 주인공에게 말했다. "내가 이 사랑에 더 성실했으니까 괜찮아." 그는 사랑에도 성실과 불성실이 존재하고 어떤 사랑은 부지런하고 어떤 사랑은 게으르다는 그녀의 말에 납득하기 어려웠다. 수는 설치미술가로 마지막 고별 파티를 하고 유학을 떠나기로 했다. 목재로 만든 수의 작품을 태워 고기를 구워기로 한 고별파티에서, 주인공은 모와 비슷한 사람을 본다. 열아홉의 모가 서른을 넘기면 영락없이 그 얼굴이었을 사람을 보지만 이유없는 망설임 때문에 그를 외면한다. 그런 다음 모를 재회한 건 모의 영정사진이었다. 모는 그 다음날 재가 되었다. 주인공은 '탄생은 지나간 폐허를 시연하는 것이고, 생명은 끝없이 죽음을 확인하는 과정(p.152)'이라고 탄생, 생명,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실은 <재>의 절반 정도를 읽고나서야 이 작품이 소설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에세이인줄 착각했던 것이다. 그만큼 이야기가 내밀하고 사적이다. 사랑과 사랑 후에 남는 것들, 만남과 이별 후에 남는 이야기, 탄생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름답고 쓸쓸한 시어들로 그려져있다.. <재>의 문장들이 다 좋았다!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가며 읽고 또 다시 읽을만큼, 넘겼던 페이지를 다시 돌아와 또 한 번, 다시 한 번 읽을만큼. 너무 좋아하는 책을 만나면 이상하게 더 책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가 어려워진다. 얼마나 좋고, 무엇이 좋은지 이야기하는 게 무용하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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