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이혁재 옮김 / 더이은 / 2021년 6월
평점 :
절판


가만히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현실 속 사건들에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있다. 누군가를 칼로 찔러 죽이곤 그 옆에서 태연히 식사를 하고, 어린 아이의 생명을 잔인한 방법으로 천천히 꺼뜨려왔으면서 자신은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이야기들이 더 잔혹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 안에 내재해있는 평범한 악의 모습들이 언제든 실체화될 가능성이 커 보이기 때문이고 그로써 그런 사건들에 연루될 경우의 수도 커지기 때문이 아닐까. <진상>의 이야기들은 그런 이야기들이다. 언제고 우리가 피해자가 될수도 또 가해자가 될 수도 있는 그런 이야기.


"가르쳐 주십시오. 왜 제가 인터넷에......"
"그건 모르겠고. 하여간 나와 있다고. 그거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어. 하여간 됐고. 빨리 나가라고. 소문이라도 나서 앞으로 세가 안 나가면 어떻게 먹고살라는 거야. 당신 정말이지 병균 같다고. 빨리 짐 챙겨서 나가라고."
<진상> - 타인의 집 p.17

가이바라는 휴일이면 새벽 5시에 일어나 동네 거리를 돌며 버려진 깡통, 담배꽁초 등을 주워 담으며 거리 청소를 할만큼 건실한 청년이다. 하지만 그에겐 비밀이 하나 있다. 불우했던 청소년 시절, 그는 순간의 판단 잘못으로 전과자가 되어 버린 것. 그래도 출소 후엔 진심으로 죄를 뉘우쳤고 고향을 떠나 낯선 마을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렸다. 그러던 어느 날, 집주인이 당장 집을 나가 달라고 말한다. 가이바라에게는 새 집을 구할 돈도, 의지할 누군가도 없다. "당신이 한 짓은 영원이 남아. 당신 이름도, 무슨 짓을 했는지도 인터넷에 다 나온다"는 말에 집주인에 저항도, 애원도 하지 못한 채 돌아선다.

그가 가진 과거의 비밀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인터넷'이었다. 그의 실명을 비롯한 인적 사항과 구체적인 범죄 사실이 담긴 신문 기사는 몇 년이 지났음에도 손쉽게 검색할 수 있었다. 이에 좌절한 가이바라, 뜻밖에 동네에 홀로 사는 노인 사토가 그의 딱한 사연을 알고는 양자로 받아들이겠다고 한다. 사토는 가이바라에게 양자가 되어줄 것과 그의 집을 물려받아 '집이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머물러달라'는 부탁을 한다. 사토가 가이바라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것은 100% 선의에서였을까? 사토는 과연 이 부탁을 수락하게 될까? 가이바라는 사토의 집에서 굉장히 충격적인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머물러달라던 그 집에서 비슷한 범죄가 되물림되듯 되풀이된다.

10년. 아찔하게 오랜 시간이다. 가슴 끌어 오르는 증오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디 사는 누군지도 모르는 범인을 계속 미워하며 산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때로는 가슴 무너지는 허탈감에 시달렸다. 아들의 목숨을 앗아간 '행위'만을 증오하기란 너무나 힘들었다. 무언가 구체적인 형상이 필요했다. (중략) 하지만 아무리 망상을 부풀려봐도 아들의 생명에 견줄만한 증오의 대상을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진상> p. 150

시노다는 아버지의 회계 사무소를 물려받았고 아들 요시히코에게 물려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요시히코는 살해당했고 범인은 잡지도 못했다. 아들을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아들을 죽인 누군가의 '행위'를 증오해야한다는 사실도 괴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범인을 잡았다는 소식을 접한다. 뜻밖에 범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들로 시노다는 충격에 휩싸인다. 그의 기억 속 아들 요시히코는 한없이 곧고 누구보다 다정한 아이였다. 이어 범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딸 미카는 저주에 가까운 악담을 퍼붓는다. 오빠 요시히코가 싫었다고, 심술궂고 능글맞고 항상 짜증이나 내던 오빠 때문에 괴로웠다고. 뒤이어 밝혀지는 사건의 '진상'으로 시노다는 거대한 슬픔에 휩싸인다. 10년만에 밝혀진 '진상'은 너무나 잔혹했다, 그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평범한 악행이 몰고온 사건이기에.

표제작인 <진상>을 비롯한 다섯 편의 이야기들은 어쩌면 기사의 한 토막으로 지나칠 정도의 사건들일지도 모른다. '진상'을 감추고 싶은 자와 그것을 드러내려는 자, 정반대의 욕망이 꿈틀대는 용광로와 같은 현실은 그런 욕망들이 부딪혀 빚어낸 또 다른 사건으로 혼돈의 도가니가 되어 버린다. 언제고 실체화될 수 있는 우리 안에 숨어있는 평범한 '악', 너무도 평범하고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들이라 더욱 잔혹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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