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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심장 - 교유서가 소설
이상욱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4월
평점 :
세상은 희극인 듯 보였다가도 부지불식간에 비극으로 변해버리기도 한다. 피해자인 듯 했던 사람이 가해자로 전락해버리는 일도 다반사로 벌어진다. 이렇게 희극과 비극,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죽박죽으로 뒤섞인 세상이 여실히 담긴 <기린의 심장>,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이야기가 불시에 내 폐부를 깊숙이 찌르는, 날카롭고 영민하게 제련된 칼같이 얼굴을 바꿔버린다. 치밀하고도 예리한 문장들에 눈물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비통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무명작가 '이상욱'이 정교하게 쌓아 올린 상상력의 세계는 그 끝을 알 수 없다. 무한한 상상의 공간 속에서 직조된 죽음, 상실, 이별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 <기린의 심장>에 실린 단편들을 관통하는 불행의 언어들은, 현실 속 이야기만큼이나 처참하고 비극적이다.
팬케이크 모양의 우주선을 타고와 식육을 위한 인간 조공을 바칠 것을 명령하는 가브와 적당한 대상을 물색해 평화를 유지하는 어른들, 육체 동기화 기술의 개발로 타인의 신체를 대리 단련해주는 남자의 처참하고도 비극적인 말로,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기린의 심장을 가지려는 소녀와 그 소녀를 제거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K, 마왕을 제거하려 했던 용사의 변절, 맥락없이 죽어간 아이들이 잠든 영안실에 나타나 아이들을 남김없이 집어삼키곤 유유히 사라졌던 붉은 뱀. 이상욱 만의 세계에서 그의 언어로 창조된 이야기들은 현실과 지독하게도 닮아 있다, 현실 그 자체이다.
분노가 치밀어오르면, 잠시 후 슬픔이 그것을 덮고, 슬픔이 목까지 차오르면 그리움이 그것을 덮습니다. 그러다 다시 분노가 찾아오면 마음은 갈피를 잃고 어둠 속을 헤맵니다. 잠드는 것조차 죄스러운 날들이 이어졌습니다.<허물> p.173
아내는 거실에서 목을 맸습니다. 햇살에 눈이 따가웠습니다. 슬프다거나 놀랍다는 감정은 없었습니다. 아내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한동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돌처럼 굳어버린 몸을 억지로 움직였습니다. (중략) 아내를 내리기 위해 안아든 순간 묘한 위화감이 찾아왔습니다. 너무 가벼웠습니다. 땅에 내려놓자 시신이라 생각했던 그것이 기묘한 형태로 구겨졌습니다.<허물> p.175
가난을 벗어나고자, 권력에 맞서고자, 아이를 지키고자 그들 나름의 것들을 지키기 위해 악전고투하던 이상욱의 인물들은 결국엔 좌절되고 만다. 속임을 당한 채 생포되어 어느 조리대 위에 나체로 매달려 죽음을 맞은 어느 시인처럼,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의 죽음을 막지 못해 거실에 목을 맨 <허물>의 아내처럼.
"단순히 눈을 떴다고 마왕이 되는 게 아니야. 스스로 자각을 갖고 악을 선택해야만 비로소 마왕이 되지. 그런데 악이라는 건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거든. 물론 선도 마찬가지지. 차이가 있다면, '선'은 의식적이고 가역적이고, '악'은 충동적이고 비가역적이라는 점이야. 충동적이고 비가역적인 악행. 그게 뭐겠어?"<마왕의 변> p.135
가난, 질병, 고통, 상실, 이별, 죽음. 누군가에게 비가역적인 이 불행의 언어들은 또 다른 누군가에겐 가역적인 것들이다. 물질의 결핍으로 가난하고, 아프고, 누군가를 잃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타인에 불행을 전가하며 물질로 갚는사람들도 있다. 불행의 언어를 가역적, 또는 비가역적으로 인식하는 양극단에 선 인물들의 대비가 선명하다. 나란히 놓여 선명하게 대비되는 그 모습에 눈과 마음이 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