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잡범에 대한 수사 보고 - 유용주 장편소설
유용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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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주 작가는 한겨레TV, 인터뷰 영상을 통해서 만났다. 걸걸한 인상에 걸맞게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찰떡 같이 찰진 맛이 있었다. 능숙한 칼질로 양파를 썰고 술상을 보면서 박남준 시인, 권정생 선생, 스콧 니어링, 데이빗 소로를 롤 모델로 거론하더니, 이젠 예수님 나올 차례라는 농을 들으며 사람 좋게 웃는 얼굴에서 무수한 사연을 읽을 수 있었다. 거친 체험이 만들어낸 그의 삶이 궁금했다. 


소설 속 주인공, 즉 작가는 중학교 학력으로 일찌감치 도시의 밑바닥 직업을 전전한다. 한마디로 바닥 인생을 살아간다. 그런 와중에 검정 고시도 보지만 결국 실패한다. 마음은 선량했지만, 괄괄한 성격과 넘치는 체력은 마초의 기질도 있어 보인다. 그리고 잘 어울릴 것 같은 군에 입대한다. 누구나 졸병 때는 마찬가지지만, 그곳의 생활도 사회만큼 힘들었다. 그러나 졸병이라고 같은 졸병이 아니었고, 그곳에서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별을 경험한다. 


그런데, 그가, 소설의 주인공이 사회와 군대에서 차별과 멸시를 경험할 때 마다 그것이 ‘참 자연스럽다’고 생각되었다. 그가 어처구니 없이 남한산성 군 형무소까지 들어갔어도 당연한 수순으로 생각되었다. 왜 그에게만 그런 궤적이 생기는지 의문이 들지 않았다. 힘들고 억울했겠다 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것은 그가 가야 할 길로 보였다. 오히려 일말의 안도감이 있었다. 나 대신 누군가 당해야 할 사람이 있어야 했고, 그에겐 불행했지만, 나에겐 다행히도 그 자리에 그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혹은 이야기에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연극은 배우와 관객이 몸과 몸으로 만나서 상황마다 다른 삶을 만들어 낸다. 어제와 오늘의 연극이 다르고, 이 관객 저 관객마다 느끼는 삶은 다르다. 반면 소설은 고정된 움직이지 못하는 텍스트를 매개로 독자와 대화를 한다. 따라서 독자는 종종 소설 속 주인공이 된다. 격렬한 욕망을 같이 느끼고, 사랑의 기쁨, 이별의 슬픔을 경험한다. 헌데, 유용주 작가의 소설에서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서글서글한 얼굴이 그런 편견을 만들었을까? 힘 깨나 써서 사고도 쳤을 것 같고, 그야말로 잡스러운 사건에 연루되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그런 편견이 그의 자전적 체험인 이 소설을 읽으며 그대로 그에게 투영되어, 불편하고 공감하며 안타까웠던 감정의 밑바닥에 묘한 느낌을 똬리 치게 만들었을까? ‘사람의 운명은 어느 정도 지 생긴대로 가는거다.’ 지하철에서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내가 이해되지 않았다. 허접스런 녀석.. 


헌데, 그건 변명도, 조작도, 한줌의 거짓 상상력도 발견하기 어려운 그의 글 때문 아니었을까? 소설가의 역할, 문학의 기능 같은 어려운 이론은 모르겠다. 다만 그의 글은 투명한 유리상자 속의 어떤 것 같이 여과 없이 다가와서 그에게 아주 당연한 듯 보였다. 내가 주인공으로 대입되지도 않았고, 주인공과의 대화도 단절되었다. 그건 온전히 그의 이야기였고 그만이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공기같이 투명한 그의 소설은 주인공을, 유용주라는 작가를 나에게 보냈다. 문학을 통해서, 결국 비극을 통해서 그의 삶이 정화되듯이 나의 삶도 정화되면 좋으련만, 그의 소설에서 그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보내야 한다. 어느 잡범에 대한 수사보고도 그에게 보내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잡범의 수사보고를 작성해야 한다. 투명하게 작성하다 보면, 나의 삶도 온전히 나의 것이 되리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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