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차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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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들의 이야기다. 


경제학 용어로는 신용, 대중적으로는 대출과 빚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화폐 경제 시스템의 마지막 단면을 볼 수 있는 이야기다. 화폐 경제라는 바다 위에서 성장이라는 배를 타고 표류하는 난민들의 이야기를 추리소설로 그리고 있다. 부정하고 싶지만 우리는 난민에 불과하다. 우리들의 힘으로 천천히 운행했던 나룻배를 버려두고 석유로 운행되는 성장의 배로 이동한 결과다. 


나룻배와 달리 성장의 배가 뜨기 위해서는 거대한 바다가 필요했다. 성장의 배가 크면 클수록 바다 물도 더 많아져야 했다. 처음에는 상품과 서비스만으로 채워진 바다였지만 소비의 정점에 다다른 바다는 더 이상 커질 수 없었다. 더 이상 성장의 배를 띄우기 어렵게 되자 자기 증식이 가능한 화폐는 바다에 화폐 자신을 쏟아 부었다. 


현대사회에서 화폐 경제에 속박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니, 오히려 더욱더 그 시스템 내부에 깊숙히 들어가기 위해서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다. 상품 교환을 위한 대체 수단이었던 화폐가 이젠 소유 목적이 되어 버린, 돈이라는 수단이 삶이라는 목적을 뒤흔드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있다.


소설은 무채색이다.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은 MRI로 몸의 구석 구석을 찍어가는 모습과 유사하다. 욕망, 사업, 대출, 인신매매, 신용정보 그리고 IT 시스템의 폐기물이 흑백 화면에 등장한다. 주인공 수사관은 MRI 판독 의사와 같이 그 화면들 하나하나에 주시하며 사건의 범인을 추적한다. 흑백 화면의 마지막, 범인과 조우하는 순간, 소설은 그 무엇도 묻지 않는다. 그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는다. 소설의 모티브가 된 화폐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화폐가 우리의 삶을 포획하고 있는 지금, 화폐에 대한 질문은 온전히 우리 삶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나? 화폐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우리 공동체는 이런 폐단을 예방할 수 없는가? 


흥행을 위해 영화 화차는 빨간색, 노란색으로 남녀의 사랑을 흑백 화면에 덧칠했다. 관객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감독이 덧칠한 그 아래 웅크리고 있는 것은 화차가 아닌 화폐라는 것을, 그리고 화차를 읽고 화폐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11 총선이 허무하게 끝난 지금, 아쉽지만 그 화폐는 투표라는 정치 행위에 담겨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지만 버려지지 않고, 보호 받는 난민이라도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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