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봄빛
정지아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1.
사람은 누구나 외로움에 발목 매이기 마련이다. 외로움은 어떠한 형태로든 누구에게나 진득하게 달라붙는다. 외로움을 잘 타는 사람이건 타지 못하는 사람이건, ‘소멸’의 화자처럼 외로움을 모르는 사람이건 간에 말이다. 그래서 내가「봄빛」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된 건 외로움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외로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거나 자기 자신의 외로움에 대해 관조적인 자세를 취한다. 마치 작가의 시선처럼 자신의 외로움에 관해서도 담담하기만 한 것이다. 그래서 보는 우리는 더 가슴이 아련하다. ‘못’과 ‘양갱’의 화자들은 몹시 외로운 존재들이다. ‘못’에서 건우 씨는 말 그대로 ‘반벵신’이다. ‘반벵신’인 그의 옆에는 안 좋은 소리 다하면서도 그의 곁을 지키는 작은 어머니가 있지만 그와 감정적으로 소통하지 못한다. 오로지 그의 유년 시절과 연장선 사의 현재의 건우씨와 소통할 수 있는 존재는 그의 누이 뿐이다. 하지만 그는 소통에 미숙하다. 그래서 유일하게 그가 소통하려 드는 누이와의 소통에서도 억지를 부르고 떼를 쓸 따름이다. ‘소멸’의 여자 화자는 외로움이란 감정 자체가 결여된 사람이다. 그녀는 ‘건우 씨’보다 더 불행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유일한 대상조차 만들지 못한다. 하지만 건우 씨와 그녀의 차이라면 그녀에겐 먼저 소통을 바라고 다가오는 타인이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마저도 지치게 만들었다. 소통은 상호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그와 달랐기 때문에 둘은 소통에 실패하고 만다. 마치 그녀의 아버지처럼 ‘자신의 진정한 힘을 모두어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그녀에게 소통이란 무의미한 감정 소모쯤으로 생각되었을지도 모른다. 「봄빛」에서는 이 소통의 과정과 이에 대한 조금 남다른 견해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소통의 어려움과 소통의 필수불가결의 여부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살아간다.
2.
「봄빛」은 아주 더딘 시간 속에 서 있다. 「봄빛」을 읽고 있노라면 나는 할아버지네로 올라가는 오르막의 시작에 서 있었다. 오르막의 시작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서 있었다. 할아버지는 항상 오르막의 끝, 대문 앞에서 소나무처럼 꼿꼿한 자세로 잿빛 마고자를 입고 서 계셨다. 초등학교 시절, 멀찍이 오르막의 끝, 대문 옆에 서 계신 할아버지는 내게 소나무만큼이나 크게만 느껴졌다. 나는 「봄빛」을 읽으면서 계속 그 시간 속으로 불러들어졌다. 소설은 마치 얼핏 정지되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삶은 속도가 더딜 뿐, 세월이 바뀌듯 조용히 흘러간다. 우리가 관심을 갖고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모를 뿐이다.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지 않아도 산이며 들판이며, 심지어 작은 틈새에도 잡초는 자라난다. 소설 전반에는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전라남도의 사투리가 잘 구사되어 있다. 물론 독자들의 고향은 제각기이겠지만 사투리에서 강한 향토성을 느낄 수 있었다.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수록작 ‘풍경’에서는 노모와 자신의 집 근처를 떠나보지 못한 남자가 등장한다. 남자는 철저히 그 집 근처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외부인을 만날 기회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본 유일한 여자의 알몸이자 후에, 욕정을 느끼는 대상이 그의 큰 누이일 정도니까 말이다. 남들이 보기엔 그의 삶은 그의 집 둘레에서 멈춰져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삶 또한 흘러간다.
「 영원처럼 느리게 그러나 쏜살같이 빠르게 시간이 흘렀다. 아랫마을부터 기어올라온 어둠 이 어머니와 그를 집어삼키고 산 정상을 향해 달려갔다. 낡아 부스러질 듯한 두 개의 기 둥처럼 어머니와 그는 세월을 버티고 있었다. 」
단지 그들의 삶은 더디게 흐른다. 그래서 집중력 없는 우리는 그들 삶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할 따름이다. '양갱'과 '스물 셋, 마흔 셋'의 화자는 닮아있다. 두 화자 모두 믿었던 남편의 불륜이란 배신을 경험한다. 하지만 두 단편 속의 그녀들은 무기력하다. 그런 남편에게 욕을 하지도, 심지어 붙잡지도 못한다. 그리고 그녀들은 떠난 남편들을 애매하게 가슴 속에 담아두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녀들은 남편이 떠났던 그 때, 그 모습 그대로 정체되어 있는 것 처럼 보이면서도 움직이고 변해간다. '양갱'에서는 고모라는 존재를 통해서, '스물 셋, 마흔 셋'에서는 영인이라는 푸르르고 싱그러운 존재를 만남으로써 말이다. 봄빛에서는 급박하게 변해가는 도시 사회에서, 다소 느리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의 더딘 움직임을 눈치 채지 못할 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분명히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3.
「봄빛」은 삶의 단편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책 속에서의 삶은 정지된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소설 자체가 풍경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서 급변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그들의 삶의 한 단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의 삶엔 커다라고 획기적이며, 파격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요즘 같이 비 인륜적이고 충격적인 사건, 사고가 하루를 멀다하고 일어나는 현대 사회에 「봄빛」에서의 사건들은 전혀 새롭지 않다.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소소한 일들일 뿐이다. 반벵신인 건우씨에게는 매 해 찾아오던 누이가 단지 다리를 다쳐서 찾아오지 못했을 뿐이고, 그나마 유일하게 그의 집을 찾던 하우댁이 더 이상 나이를 먹어서 그와 그의 노모를 찾아오지 못하겠다고 말했을 뿐이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도 요즘 세상엔 더 이상 놀라운 일이 되질 못한다. 불륜도 동성애도 그닥 파격적이지 못한 세상에 「봄빛」은 그저 그들의 단편적 일상을 느리게 보여줄 뿐이다. 그 보여주기의 방식은 너무나도 치밀하고 견고하다. 유려한 묘사와 틀 잡힌 구성은 감탄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담담한 이야기와 더불어 이런 요소는, 엽기적이고 빠른 것에 익숙해져 있는 영상 세대들에겐 지루함의 요소가 될 수도 있다. 「봄빛」이 동인문학상 최종 후보작에 남았을 때, 작가 신경숙이 한 말이다.
'전라도 방언이 지리산 근처의 새소리처럼 느껴졌고, 우리가 잊어버린 사람들이 새롭게 빛을 타고 탄생하는 소설집. 언어 선택이 너무 정성스럽고, 구성도 탄탄하지만 그래서인지 꽉 짜인 문틀처럼 답답한 느낌도 준다'
무언가 하나 빠지지 않고 치밀하기만 한 완벽은 우리에게 답답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봄빛」을 읽는 내내 나는 디지털 시대 속에서 아날로그를 만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봄빛」의 문제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나는 「봄빛」이 좋다. 작가의 문체는 향기롭고 친절하다. 그런 문체로 작가는 담담하면서도 다정하게 얘기한다. 자칫 했다간 코 베여가는 세상에서 '조금 여유롭게 천천히 가도 괜찮다'며 우리를 격려하는 것이다. 느리게 가는 자들을 지나치지 않는 소설, 그들을 소외시키지 않고 그렇다고 그들이 부담스럽지도 않을 정도로 따스한 자연광을 내리쬐어주고 있는 소설, 바로 그것이 「봄빛」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