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3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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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새로운 심리적 측면


 이반이 생각한 대로 인간은 사악하다. 인간이 하는 짓을 보면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의 이런 자기 혐오를 멈출 수가 없는가? 이에 대한 답으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신에 대한 믿음을 갱신할 것을 주장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신과 교회에 대한 선입견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신을 떠올리지 말자) 물질 충족에만 빠져서는 노예의 길을 면하지 못한다. 남의 자유를 빼앗아 빵을 주는 것은 억압이다. 타인을 살게 하고 자신을 살리는 방법은 사랑의 실천임을 조시마 장로의 설법으로 누차 강조한다. 


세상을 새롭게 개편하기 위해서는 사람들 스스로 심리적 측면에서 다른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형제가 되기 전에는 형제애란 싹틀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우선 “고립”의 시대를 끝내야 합니다. 그것은 지금 도처에서 군림하고 있으며 아직 그 시기가 오지도 않았습니다. 왜냐면 지금 모든 사람들은 자기 얼굴을 최대한 부각시키려고 애쓰면서 자기 자신만의 성취된 삶을 누리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충만한 삶의 완성 대신 단지 완전한 자살행위를 이끌어낼 뿐입니다. 왜냐하면 자아 실현의 성취 대신 완전한 고립에 빠지기 때문에 스스로를 감추며 자신이 가진 것을 숨기고 결국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멀리하고 자신으로부터 사람들을 멀리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532-533)

 

 조시마 장로는 젊은 시절의 살인 사건을 감추고 자신에게 찾아오는 신사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고립을 끝내라고. 그래야 사람들의 사람들이 새로워 질 수 있다고 한다. 『죄와 벌』에서 뽀르삐리는 삶으로 뛰어들라고 했다. 고립을 끝내려면 우리 모두 서로 연관되어 있는 형제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마치 부처님이 연기를 설명하시듯 조시마 장로가 사람은 독단적으로 살 수 없다고 설교한다. 사실 대심문관의 말대로 신은 인간을 무제한적으로 믿었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신을 따르는 자유로운 사랑을 기대했고, 대가 없이 퍼주는 무한대의 사랑과 용서, 죄 없이 남의 죄를 대신하는, 오직 주기만 하는 사랑을 보였다. 그러니 인간은 그런 사랑을 믿을 수 없다. 왜냐면 인간 차원에서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은 행하셨다. 무조건적인 사랑.


 무신론이 팽배해지면서 인간에게 사랑이란 ‘나를 따르면 사랑할 것이다’처럼 조건절 사랑밖에 보이지 않는다. 호홀라꼬바 부인이 잘 보여준다. 그녀는 선행을 하면서도 그들이 자기를 존경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한다. 우습지만 그게 아주 대표적인 인간의 사랑이다. 그러니 반대의 경우, 나에게 악행을 저지른 자라면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 이것이 신을 들먹거리는 인간의 사랑과 응보다. 하지만 신의 사랑은 조건절이 아니다. 하늘이 비를 내리고 햇빛이 비쳐 오는 게 무슨 계약 조건이 있던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왜 부모와 자식을 신과 인간의 관계와 비유했을까 생각해보니 무조건적 사랑에 있는 것 같다. 지금은 자식 사랑에도 조건이 붙는 추세이긴 하지만(-_-;;) 처음 태어났을 때 고물거리는 생명에게 생명수처럼 쏟아 부어지는 사랑에는 조건이 없지 않은가? 피를 젖으로 바꾸어 먹이는 사랑이 신의 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내팽개친 표도르는 결국 스스로를 공격한 꼴이다.

 

 이반과 호홀라꼬바 부인, 그리고 많은 이성주의자들과 과학 신봉자들, 합리주의자들 그리고 우리들은 주고 받는 계약 속에 사랑과 응보를 생각한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적인 해결방안, 즉 ‘신을 향한 믿음 속에 선의 실천과 인간의 갱생’ 같은 얘기를 쓴 그를 정말 철 지난, 보수적인, 전근대적인 이야기라고 치부하고, 정말 쓸데 없는 얘기 잔뜩 길게도 써놨다고 욕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비난은 이반 수준에서 볼 때 할 수 있는 비난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신은 이반이 설정한 인간적인 현상의 신이 아니다. 그는 신이 고통 받는 약자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행복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대심문관은 그런 신이었다. 인간들은 그런 신을 원한다며 자기들은 소수의 선택된 자가 아닌 대다수 허약한 대중에게 빵을 주고 그의 자유를 지배하고, 기적을 보여주면서 양떼로 이끌었다고 자부했다. 그러면서 신에게 더 이상 오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신을 밀어낸 자리에 있으려고 하는 사람 신. 인신(人神)이다.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은 인신일지 모른다. 무질서하고 악한 세계가 아니라 정리되고 인과응보가 딱딱 맞아 떨어지고 배고픈 자에게 빵을 주고, 믿음을 원하는 자에게 경외를 보여주는 세계. 균질하고 말끔한 세계. 이반과 우리 모두 어떤 질서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것 같다. 사실 자연법칙은 무질서도가 높아지는 방향인데도 끊임없이 치우고 정리하고 깔끔을 떨어대는 인간. 죽으면 썩어질 몸들이 무질서를 거부한다. 이반이 원하는 것처럼 악행에 대한 응보가 제때 제때 이뤄질 수가 없다. 한꺼번에 즉각적으로 이뤄지지도 않는다. 그건 인간의 바람일 뿐이다. 이반은 보통 인간들의 바람대로 악에 대한 응징을 대신해 줄 신을 찾았다. 그런데 이반의 생각이 굉장히 위험하다. 만인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은 만인을 노예로, 자기 질서에 복종하는 사람을 원한다. 

 

 대심문관은 욕심쟁이가 아니다. 드러나는 악행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존경 받을 것 같다. 이게 문제다.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 헷갈린다. 현실세계에서 누가 더 잔인한가? 눈앞에서 자식을 죽이는 놈이 잔인한가? 아니면 존경 받으며 인간을 노예로 삼는 놈이 잔인한가? 대심문관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 같으면서도 존중하지 않는다. 개돼지 취급을 한다. 만인을 행복하게 했다는 성취감에 도취되었고, 밥만 먹여주고 욕구만 충족시키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게 더 불쾌하지 않은가? 물론 인간은 빵 없이 살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대심문관은 저열한 장사꾼이다. 인간이 가장 기본적으로 충족해야 할 욕구를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적이다. 자유를 바쳐라, 그러며 먹여주겠다. 빵과 경배를 거래한 인신. 인간이 감각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경외감을 사특한 기적과 거래한 인신. 그는 인간의 노예근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빌헬름 라이히 이전에 이렇게 인간의 노예근성을 잘 파악한 사람이 있을까 싶다.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다. 신이 준 자유를 누군가에게 반납하지 않고서는 살지 못하는 부자유스런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의 자유 따위 기대도 안하고 그냥 시키는대로 나의 왕국에서 행복하게 살아라. 그리고 신에게 비아냥거린다. ‘당신, 사람 너무 잘 믿어’ 



당신은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비밀을 알고 있었고, 모든 사람을 무조건 당신 앞에 경배토록 만들기 위해 당신에게 제시된 유일하고 절대적인 깃발을, 지상의 빵의 깃발을 자유와 천상의 빵이라는 미명하에 거부하고 말았소. 그리고 나서 당신은 끊임없이 무슨 짓을 저질러 왔는지 잘 살펴보시오. 모든 것에 자유의 이름을 내걸었던 것이오! 당신한테 말해 두지만, 인간이라는 불행한 존재들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지녔던 자유라는 선물을 한시 바삐 넘겨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 고통스런 고민은 없는 것이오. 그러나 사람들의 자유를 지배할 수 있는 자는 오직 그들의 양심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 뿐이오.”(446-447)




 독재자는 무서운 얼굴을 하지 않았다. 악마는 친절하다. 그들은 우리의 생활에 스며들어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의존하게 만든다. 노예복지주의다. 다 너희들을 잘살게 해주려는 것이다. 나만 믿고 따라라. 따르고 싶다. 자유롭게 생각하라고 하는 게 오히려 고문이다. 대심문관은 신이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만 줬을 뿐 그 이후를 책임지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더 높은 차원의 신인神人이 되기보다 나의 왕국에서 배부르고 등따숩게 생각 없이 살기를 바랄 것이다. 방황하는 사람들을 붙들고 인솔한 것은 ‘나’다. 그러니 당신은 꺼져!


 여기서 신의 세계와 인신의 세계가 충돌한다. 신의 세계는 인간이 갈망하듯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된 세상이 아니다. 표도르 같은 역겨운 존재도 있고 조시마 장로 같이 성스러운 사람도 있다. 호홀라꼬바 같은 여자도 있고 그루센까 같은 여자도 있다. 살해 용의자로 몰려서 대오 각성하는 경우도 있고, 자식에게 죽임을 당할 때까지도 제 잘못을 모르는 남자도 있다. 신의 세상은 이렇다. 더럽고 추하고 모순적이고 무질서하고 제멋대로이다. 영원한 생명과 안식을 얻는 세계가 아니라 삶과 죽음이 뒤섞인 곳이다. 이반이 인정하지 못하고, 우리가 인정하지 못하는 세계를 인정해야 한다. 이제서야 이 책의 만 앞에 적어둔 성경 구절이 이해가 간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죽어야 산다. 이런 모순을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면 이반이 된다. 미쨔는 방탕한 생활 끝에 알았다. 자신의 진정한 죄는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 마음 그 자체이며 자신은 유형을 가서 벌을 받으면서 새롭게 태어나게 됨을! 미쨔는 삶의 모순을 깨닫고 실천하기로 마음 먹었다. 미쨔가 유형지로 떠나든 미국으로 도망을 가든 그는 어디서든, 얼굴을 바꾸고 싶을 정도로 확 바뀐 새로운 존재가 될 것이다. 


 대심문관의 열띤 자기 변론을 듣고 난 신은 그에게 키스하고 나간다. 역시나 한 수 위다. 그의 긴긴 변명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들어주기만 하고 그를 불쌍히 여긴 듯 입맞추고 나가는 신은 어린 자식이 눈 앞에서 잘못한 일에 대해 열렬히 변명을 늘어 놓을 때 그저 들어주는 부모 같다. 사소한 잘못에도 자식이 올바르게 크리라고 믿듯이 신은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싸우랴? 지옥에 떨어뜨리랴? 이런 신은 신이 아니라 인신이다. 신의 침묵과 조용한 입맞춤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대심문관일 것 같다. 


 조시마 장로는 이렇게 설교한다. 인간은 무한 영겁의 세계 속에서 “나는 존재한다, 고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단 한 번 부여된 존재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묘하게 비튼 말이다. 그는 인간의 정의부터 다시 한다. 



“인간에게는 살아 있는 활동적인 사랑의 순간이 한 번, 단 한번만 부여되어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 지상의 삶이 부여되었고 그와 더불어 시간과 제한된 세월이 부여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복에 겨운 존재는 소중한 선물을 거절하고 존중하지도 아끼지도 않고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무관심하게 방치하고 말았습니다.”(568) 



 대심문관의 매끈한 세계에서 노예가 되겠는가? 아니면 신이 너에게 퍼부은 사랑을 믿고 실천할 것인가? 누가 인간을 신뢰하고 있는가? 



 “인간 존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고고한 정신 세계는 어떤 승리감, 증오심과 더불어 완전히 거부되고 축출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자유를 선언하였고, 현대에 들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만, 그들의 자유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그것은 예속과 자살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욕구 충족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증대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이 세상의 교리이며 세인들은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욕구 확대는 어떤 결과를 낳았습니까? 부자에게는 고독과 정신적 자살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질투와 살인을 낳았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권리를 주었으되 욕구를 충족시킬 방법을 미처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하나로 합쳐지고, 이로써 거리를 줄여 나가고 허공을 통해 사상을 전달하는 형제적 관계를 형성해 나갈 거라 사람들은 믿고 있습니다. 아아, 인류의 그 같은 결합을 믿지 마십시오. 자유를 욕구의 증대와 신속한 충족으로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왜곡할 뿐입니다… 자신에게서 과도하고 불필요한 욕구를 끊어 버리고, 이기적이며 자만심 넘치는 의지를 억제하며, 복종의 길에 채찍을 가해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서 정신의 자유와 그에 따르는 정신적 환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551~552)


 원하는 대로 채우는 게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오히려 자신이 노예상태임을 자각하는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노예상태를 끊기 위해 부단히 수련하는 과정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더 이상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게 자유다. 자유는 먼데 있지 않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데 있고 사랑은 먼데 있지 않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파 한 뿌리 던져주는 데서 시작한다. 처음 읽을 때는 몰랐는데 이반이 조시마 장로의 암자에서 가족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함께 마차에 타려고 했던 지주 막시모프를 밀어서 떨어뜨리는 장면이 있다. 이런 사소한 데서 이반이 인정머리 없는 인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인류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은 공상적 사랑이다. 자기 어린 시절이 불행했으면 자기 자식을 그렇게 만들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이반 앞에 나타난 초라한 신사는 제 자식들을 친척 아주머니 집에 보낸 것으로 나온다. 울고 있는 아귀에게 당장 달려가겠다는 미쨔와 대비된다. 소설의 주인공들과 다른 조건과 환경이지만 어쨌든 엉망진창인 지옥을 사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인류를 사랑하지만 개인에 대해서는 적개심만 남는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105)라고 묻는 호홀라꼬바 부인에게 장로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할 일을 다 하신 것입니다.” (105) 가장 쉽고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게 정답이다. 하지만 이반이 그랬고 우리가 그렇듯, 할 수 있는 일은 귀찮아서 하기 싫다. 안락에 빠진 노예상태가 이렇다. 지옥은 그 누구 때문이 아니라 귀찮아서 하지 않고,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안 하고, 너도 당해봐라! 하는 마음에서 하지 않는 내가 만든 지옥이다. 우리는 정말 자유롭기를 바라는가? 자유의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그러나 그 길을 통과한 자만이 그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는 영원한 평화와 안식에 들 수 있다. 그 길을 가라고 도스토예프스키 별이 반짝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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