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중 열린책들 세계문학 30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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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질서하고 악한 세계


사실 인간의 ‘동물적인’ 잔혹성에 대해서는 간혹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은 동물들에게 너무나 천부당만부당하고 모욕적인 이야기겠지. 동물들은 결코 인간들처럼 그렇게 잔인할 수 없어, 기교적이고 예술적일 정도로 잔인할 수 없거든. 호랑이는 그저 물어뜯고 찢어 놓는 것밖에 못해. 호랑이한테 설혹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귀를 밤새도록 못으로 박아놓을 생각은 하지도 못할거야…나는 악마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필경 인간이 창조해 낸 것이라면, 자신의 모습과 흡사하게 창조해 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418)


 이반의 말에 격하게 공감이 된다. 악마는 인간을 닮았다.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역사는 인간 잔인함의 기록이다. 이반의 말대로 먹이 사슬 관계의 동물들은 재미로 죽이지 않는다. 굶주림을 면하는 정도 외에는 배부르게 먹지도 않는다. 다종다양한 ‘맛’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이반이 수집한 자료들도 놀랍게 잔인하지만 우리가 이반의 말에 공감하는 이유는 그런 일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 악에 대한 응보와 정당한 대가를 바란다. 이반도 무고하게 고통 받는 자들을 불쌍히 여긴다. 그런데 이반은 처음에 이렇게 말했다. “사실 인간이 신을 고안해 낸 거지. 그런데 기묘하고 놀라운 것은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그런 생각이 인간처럼 야만스럽고 사악한 동물의 머리에서 떠올랐다는 거야. 그런 생각은 그만큼 성스럽고 감동적이며 현명한 것인 동시에 그만큼 인간에게 명예를 안겨 주기도 했지.”(411) 이반이 생각하기에 악마와 신은 모두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 낸 것이다. 야만스럽고 사악한 인간이 성스럽고 명예로운 자신의 모습을 추구하며 신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이반도 인정한 것은 인간이 현재 제 모습보다 더 훌륭해지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별로 공감하지 않아서 잔인한 짓을 가장 많이 한다. 세상은 온통 무질서하고 악하다. 이반은 신이 있다고 믿지만 너무나 비참한 사람들의 고통과 눈물을 밟고서 이루어진 세계라면 거부하겠다고, 신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자못, 비장하기까지 하다. 필요한 것은 악에 대한 응징이다! 이반은 신이 응징하지 않는 악독한 자들을 벌주고 싶어한다. 더 나아가 인간이 단죄하는 신이 되고 싶어한다. (人神) 그렇지만 그의 말대로 신과 악마 모두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 냈다면 왜 신을 실천하지 못하고 잔인한 악마의 유혹에 빠지는가? 신이 걸었던 명예로운 길보다 잔인한 악마의 길을 따라가는 것은 신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가 아닌가? 이반이 지은 “대심문관” 서사시를 보면 그는 사람들을 신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너무 어렵고 고되고 힘든 길이므로 우선, 악에 대한 응징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그 악마에 대한 인간의 ‘응징’은 어떻게 하는 것이 정의로운가? 강간의 자식인 스메르쟈꼬프가 강간범인 자기 아버지 표도르를 살해한 것은 정당한가?


만일 네가 나의 아내를 강간하면, 나는 네 자식의 살을 너에게 먹일 것이며, 나의 자식은 너의 살아남은 자식들 가운데 한 명의 손에 의하여 죽을 것이며, 그는 다시 나의 자식의 자식에 의해서 살해되고 말 것이다. 또한 만일 너의 독수리가 나의 토끼를 잡아먹으면 네가 보호해주는 왕은 자신의 딸을 나의 제물로 바쳐야 하며 이는 곧 그의 아내가 남편을 죽일 것임을,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아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임을 의미한다”(오레스테이아)

 


 복수는 끝이 없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복수의 저주 속에서 용서가 복수보다 한 차원 높은 것임을 배웠을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 전사들이 적을 죽일 수 있음에도 죽이지 않고 어깨만 치고 가는 행동이 왜 죽이는 용맹보다 더 훌륭한 용맹인지 오레스테아의 저주를 들으면 알게 된다. 복수는 끝이 나지 않는다. 복수는 죽음의 재생산이다. 누군가는 멈춰야 멈추는데 멈추는 자가 강자다. 원수도 사랑하는 자가 진정 강자이기 때문이다. 분노로 남의 심장을 겨누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죽일 수 있지만 죽이지 않고 복수의 고리를 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 “밀양”에서 보여주듯 사과와 용서는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이 죄를 짓기 쉬운 존재임을 알았다. 악한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게 아니다. 이반도 그렇고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도 그렇듯 그들은 ‘정의로운’ 사람들이다.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은 응징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살게 하는 지름길이라 여긴다. 사람들에게 해악만 끼치는 ‘이’ 같은 존재를 왜 인간이 단죄하면 안 되는가? 우리도 뉴스를 보면 그런 인간들을 정말 단죄하고 싶어진다. 이것이 선한 사람들도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은 필요하다. 문제는 그 벌 속에 진정한 회개와 뉘우침, 사과, 그리고 그런 죄를 저지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마음이 있는가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무신론의 시대는 형벌에 대한 단죄는 있어도 진실된 참회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죄를 모르고, 감옥에 몇 년 갔다가 나오면 그걸로 다 되었다 여기고 피해자들은 삭일 수 없는 분노 속에 고통 받고 있다. 여기가 지옥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복수의 고리, 무책임 철면피 가해자 재생산과 헤어나올 수 없는 피해의 고통을 벗어나려면 신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의 사랑은 조건적 사랑이 아닌 아니라 대가 없이 퍼붓는 사랑이다. 굶주린 사람에게 파 한 뿌리 던져줄 때 돌아오는 보답을 바라지 않듯, 죽일 놈을 살려주며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게 강자이며 이를 실천하려면 인간이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게 먼저다. 믿음이 없으면 행해지지 않는다. 믿음에서 기적이 나오는 거지, 기적을 보고 믿는 게 아니라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신을 거론하는 것은 이런 차원이다. 믿음이 먼저다. 아무렴. 그렇다. 비록 믿음이 인신(人神)을 자처하는 인간들에 의해 더럽혀졌을지라도 그 오물을 뛰어 넘어 인간을 새롭게 할 갱생할 믿음을 믿어야 한다. 이것이 하늘에 떠 있는 별이다. 그것 말고는 이 악하고 추한 세상에서 인간이 잃은 자유를 되찾고 더 높은 차원의 삶, 신인(神人)의 경지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할 수가 없다. 인류 역사상 어렵고 드물지만 그런 경지에 오른 인간들이 있다. 


 우리(이반)의 이성으로는 신도 악마도 인간이 만들어 낸 인간적인 현상인 것 같지만 그보다 앞서는 것은 신처럼 명예로운 길을 실천할 믿음이다. 이반은 이걸 놓쳤다. 이반의 신과 악마는 인간이 생각한, 인간이 감각하는, 인간적인 형상이다. 인간의 경험을 넘는 영역은 우리가 표현할 수 없다. 마치 물고기에게 육지의 생활을 아무리 말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말하지 못해 보여준 것이 사람들의 죄를 대신 하여 십자가에 매달린 행적이다. 그러니 믿고 시작해야 한다. 믿지 않으면 눈 앞에서 죽은 자가 부활해도 믿지 않으리. 무신론의 맹점은 인간이 만든 신이라도, 그런 선이라도 안 믿는데 있다는 것, 신을 믿으며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은 무신론자다. 다들 분열증자들이다. 신이 없다고 생각하니 어떤 윤리도 불가능하다. 내가 너를 왜 용서하고, 왜 사랑해야 하는가? 무엇이든 허용된다. 목사가 신도의 옷을 벗기고 스님이 유흥주점에 간다. 인간은 이 추악한 세상에서 어디에서 길을 찾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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