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9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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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친부살해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며,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소설의 이론』)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읽고 나니 루카치의 이 말이 비로소 절실하게 다가온다. 살아가는 방법을 잃고 표류하는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지표로 삼아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방황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소설이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이었다.

 친부살해는 더 이상 놀라운 사건이 아니다. 드미트리가 친부 살해 용의자가 되었을 때는 전 러시아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었을지 몰라도 보험금을 노리고 가족 전체를 살해하는 일도 심심찮은 요즘엔 별로 놀랍지도 않다. 그저, “아! 또 개망나니 하나 나타나셨구나” 싶다. 한국 남자에게 시집 와서 시아버지와 친척 남자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자살한 외국인 신부도 있기에 아버지와 한 여자를 두고 경쟁한다는 스토리조차 요즘은 딱히 선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역사서를 뒤져봐도 그런 경우는 숱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친부 살해’ 사건에서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을까? 


 아버지란 존재는 더럽고 불쾌하더라도 자신을 존재하게 한 물리적 존재다.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해지지 않는, 피를 다 뽑아내고 새 피로 채워 넣어도 새로워지지 않는 DNA를 물려준 자, 정말 문제적 존재다. 몹시 닮았으나 절대로 같지 않은 존재가 부자 관계이다. 게다가 이 아버지 표도르는 자식을 버렸다! 낳기만 하고 버렸다. 심지어 스메르쟈꼬프는 강간의 결과물이다. 자기 존재의 뿌리부터 깊은 혐오감을 갖게 한 아버지, 무슨 근거로 아들들에게 아버지를 사랑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비의 자애와 자식의 효심이라는 끈이 ‘살해’라는 사건으로 끊어졌을 때 삶의 모순은 극대화 된다. 자기 존재의 근거인 아버지를 살해하는 일은 자기 존재를 근본에서부터 부정하는 것이다. 자신을 혐오하는 자가 타인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타인에 대한 혐오와 살인사건이 비일비재하여 더 이상 놀랍지도 않은 여기는 ‘지옥’이다. 조시마 장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지옥은 결코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568) 아니, 사랑이 뭐길래? 장로의 사랑은 전수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신에게서 인간으로, 아비에게서 자식으로, 나에게서 타인으로. 타인에서 타인으로 연결되는 믿음이 사랑이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했듯이 아비는 숨만 겨우 쉬는 허약한 존재를 이 땅에 낳고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보살피고 자식은 그렇게 보살펴 준 사람에게 언제나 기댈 수 있는 믿음을 갖는 것이 사랑이고 그런 사랑을 바탕으로 타인에게도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은혜를 베풀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갖는 신뢰와 애정이 사라진 세상에서 타인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을 리가 있는가? 사랑을 먼저 시작해야 할 사람은 아버지이다. 신은 대가 없이 인간을 사랑했으나 표도르는 약하고 어린 아들들을 버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미쨔의 법정을 통해 이미 아버지 표도르를 단죄했다. 이미 그 전에 동네에서 비난 받는 인물로서 그는 사회에서 대접받지 못했다. 게다가 아들들은 모두 그가 죽기를 바랐다. 세상에서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지옥을 살다 갔다.


 친부 살해는 사랑의 기초가 사라진 것을 세상을 의미한다. 사랑을 남녀간의 낭만적 사랑으로 축소시키면  얼마나 사랑이라는게 얼마나 변덕스런 것인지 미쨔와 까쨔, 그루센까와 표도르의 수많은 여성편력이 보여주지 않던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조시마 장로의 설교를 통해 아무 대가 없이 베푸는 자비,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와 믿음이 사랑이라는 것을 밝혔고, 이런 사랑의 윤리가 사라진 세상은 고통이고 비극임을 알린다. 루카치가 별을 보고 길을 갈 수 있어서 좋았겠다고 부러워했던 세상의 인간은 적어도 별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려고 노력을 했다. 무엇이 더 좋은 삶인지를 가리키는 별들을 향해 자신의 삶을 지향해 가는 삶이 사라진 때가 지금이다. ‘친부 살해’ 사건이 놀랍지 않은 세상이란 아무도 별이 가리키는 방향을 가야 할 길로 믿지 않고, 더 이상의 노력도 없는 그런 지옥 같은 삶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을 자기가 걸어야 할 길로 알고 살았던,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음흉한 아버지 표도르는 자식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의 삶은 좌표 없는 삶의 말로를 보여준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당시로서는 선정적인 소재였던 ‘친부살해’를 소설에 도입한 것은 무엇보다도 세상의 고통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하고 해답을 찾기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부처님이 성문 밖에서 생로병사의 고통을 직시하고 돌아와 인간은 왜 저런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가를 고민했던 것처럼 도스토예프스키는 ‘친부살해’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이 만연한 비윤리적 문제가 어디서 기원하는 것인지를 깊이 생각했던 것 같다. ‘친부살해’는 소돔의 표징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경악할 사건의 주인공 오이디푸스 신화가 고대 그리스 사람들에게 인간의 한계와 운명 앞에 겸손함을 가르쳤다면 무신론의 시대에 벌어지는 “친부살해”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운명 지운 신도 없고, 자신이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미쨔의 법정에서 인간이 인간을 판단하는 게 얼마나 우스운지를 보았다. 그 속에 진실은 없다. 각자의 스토리만 있을 뿐이다. 변호사가 미쨔를 변호한다는 게 고작 “살인을 했으나 살인은 아니다”였다. 하~! 이제 웃음도 안 나오게 익숙한 ‘법리’다. 살인 사건은 증발하고 검사와 변호사의 법리 다툼만이 남았고, 그런 핫한 사건에서 출세를 바라는 법복 귀족들과 호사가들의 수다만이 법정에 가득했다. 거기 무슨 죄의식과 참회와 회개와 책임이 있는가? 사람은 언제나 잘못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진실한 사과를 바란다. 진심 어린 사과란 자기가 그 일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친 후에 나오는 고백을 말한다. 녹음기 틀어 놓듯, “진심으로 죄송합니다”를 반복해도 그게 거짓임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그러므로 법정에서의 선고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죽을 때까지 시베리아 유형을 가든 미국으로 도망치든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면 어떤 형량을 내려도 그것은 죄에 대한 벌이 될 수 없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친부살해’를 통해 인간의 윤리를 다시 수립하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시도 같다. 역사 이래로 인간은 동물들도 하지 않는 잔혹한 짓을 해왔다. 이게 과연 인간의 본성인가? 이렇게 서로 죽이고 갉아먹으려고 태어났는가?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걸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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