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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199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작가 중에서도 특히 자기만의 색깔이 느껴지는 작가, 은희경씨는 글을 너무나 매력적이고 치명적으로 잘 쓰신다. 은희경 작가님을 처음 알게 된 건 <새의 선물>이다. 열두 살 이후로는 삶을 다 알아버려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는 어린 진희의 태도에 굉장히 놀라면서도 조금씩 이해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던 기억이 난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는 새의 선물의 속편 같은 작품이다. 주인공 진희가 어른이 되고 난 후의 이야기랄까. 서른이 된 진희는 더욱 냉소적이고 삶에 초연한, 날카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로 자신을 철저히 구분하며 삶에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자신의 삶을 관조적인 태도로 바라보는 그녀의 태도는 여전하다.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진희는 현석, 종태, 전남편 상현 등 세 명의 남자와 엮여 있으며 이들과 인연을 풀어가며 소설이 전개된다. 진희의 사랑방식은 로맨틱한 사랑도 아니고 무척 솔직하고 냉소적인, 일명 쿨한 사랑. 어떤 사람들에게는 약간은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다. 그녀는 사랑에서도 어느정도 균형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애인은 셋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상대에게 집착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게 한다고 본다. 사랑이 한 곳에 쏠리면 무거워지기 때문에 짐을 나누듯 항상 만날 수 있는 애인을 나눠두는 것이다. 이 사람이 떠나도 다른 사람이 있기에 사랑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는 모든 사랑을 즐기지만 깊숙하게 들어가지 않는다. 그 상대도 유부남도 가리지 않고 다양하다.
자신의 전부를 걸어 사랑을 하기보다는 상처 입기 두려워 어느 정도 거리를 띄우는 사랑을. 사랑을 즐기되 몰입하기 않는 것이다. 삶을 불신하기에 사랑도 불신하는 그녀는 사랑에서도 거리를 둔다. 인생에 있어 사랑은 필수이지만, 변하지 않는 사랑을 없다고 생각한다.
결혼과 이혼, 임신과 낙태, 불륜과 양다리까지 서슴치 않는 그녀는 사랑의 대상에 집착하기보다는 사랑이라는 행위 자체에 중심을 둔다. 사랑을 상실할 수는 있지만 사랑에 패배해서는 안된다는 것. 더 잘 사랑하기 위해 사랑에 대해 의심하고 이리저리 문제삼는 것이다. 다만 깊이 들어가지 않는 사랑을 고수한다. 단 하나에 매달려서 집착하게 된다면 삶은 그녀를 불행에 빠뜨릴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녀는 계속하여 방황하게 된다. 하지만 사랑이란 것은 나 혼자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통제하에 두고 싶어하는 진희에게는 더 힘들게 느껴질 것이다. 상대의 마음까지 통제하고 나만의 계획대로 할 수는 없으니까.
소설은 사랑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사랑에 대한 우리의 편견, 사유방식을 바꿔 놓으려는 듯하기도 하다. ' 사랑은 이러이러 해. 이런 것들이 사랑이야' 라고 선을 그어 놓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일침을 놓는 듯한 이야기. 나는 진희의 삶의 방식을 전부 다 동감하는 건 아니지만 또 어느 부분에서는 작가에게 나도 모르게 설득을 당하는 듯하다. 어떤 부분은 공감하고 이해되는 것 같기도 하고. 두고두고 곱씹어 볼만한 아리송송한 어구들이 많다.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그녀의 사랑방식이 슬프지만 약간의 이해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너무나도 다른 사람의 삶이지만 어느 정도 공감이 간다. 진희의 선택과 가치관 역시 수많은 사람의 삶의 방식 중 하나이니까.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답은 없지만 우리네 삶의 방식은 모두가 다양하고 제각각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녀 특유의 삶의 방식도 잘못된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의 사랑방식을 따라가고 싶지는 않다. 그녀가 취하는 쿨한 태도는 인생과 적당히 타협하려는, 길게 보면 사랑이든 어떤 것이든 끝을 보지 않기 때문에 또한 발전도 변화도 별로 없을 것 같아서이다. 어떤 경우에는 바닥을 찍을 만큼 온 몸을 깊게 담아 경험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사랑이든 뭐든 간에.
줄거리에 중점을 두어 읽기보다는 작가의 통찰있는 문장과 글에 더 눈이 간다. 문장과 통찰 자체만 보아도 굉장히 임펙트 있는 작품이다. 단어와 단어 사이까지 촌철살인의 아포리즘은 생각을 이끌어내는 데에 탁월함이 느껴진다. 문장 그대로 기억하고 싶은 부분이 많은 소설이다.소설 중간중간 진희의 입장에서, 또는 작가의 시선으로 통찰해 놓은 문장들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착 감긴다. 책을 덮고도 여운이 남은 만한 그녀의 수많은 문장들. 진희가 살고 있는 환경, 그속에서 그녀가 바라보는 것들, 그녀의 삶의 태도와 생각들을 적은 부분들은 필사를 하고플 정도로 좋다. 정확하고 완벽한 답을 주지 않지만, 이리저리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마지막 페이지에 문학 평론가 김미현씨의 해설도 읽는 맛이 있다. 해설을 보고 새롭게 다시 보이는 부분도 있고, 내가 간과하고 지나갔던 부분의 의미를 좀 더 깊게 해설해주니 다시 한번 소설 앞 장을 뒤적이게 된다.
사랑에 집착하고 싶은 마음, 사랑에서 집착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도를 잘 이끌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파멸로 이끄는 것도, 사랑을 하게 만드는 것도 사랑에의 의지이니까. 의지가 과다하게 심해지면 집착이 되기도 하고 의지가 덜해지면 사랑에 냉소적으로 변해버리기도 한다. 진희는 사랑에서 집착이 싫어 관조적인 태도를 취하고 깊이 들어가는 것을 꺼려했을까? 사랑을 지혜롭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어떤 방법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진희의 사랑이 좀 더 따뜻하고 자신을 더 내보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을 하게 되면 누구나 그 마지막 사랑이 되고 싶어 하지만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사람의 마음과 삶은 변하고 흘러가기 마련이기에 그 마지막이 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랑을 춤에 비유한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비록 마지막 춤을 추게 되는 것이 내가 아닐지라도 지금 현재 춤을 추는 것에 충실할 수 있기를. '마지막 춤의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의 상대와 춤을 즐기는 것이 마지막 춤을 즐기는 방법' 이라는 문장이 여운으로 계속 남는다.
누구나 마지막 춤 상대가 되기를 원한다. 마지막 사랑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마지막이 언제 오는지 아는 사람이 누구인가. 음악이 언제 끊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마지막 춤의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의 상대와의 춤을 즐기는 것이 마지막 춤을 추는 방법이다.
우리는 누군가 만나고 헤어진다. 또 다시 누군가를 만나고 다시 헤어진다. 삶을 살면서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있듯이. 소설 속 진희도 크고 작은 만남과 헤어짐을 연속해서 겪게 된다. 이 반복은 만남과 헤어짐, 사랑과 고독, 현실과 환상, 등과 같이 짝을 이뤄 반복된다. 사랑에 관해서도 완벽한 결론은 없다. 영원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반복되는 것뿐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나름의 답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사랑과 고독, 우리의 인생과 그 이면에 관한 예리하고 날카로운 사유를 담은 소설을 만난 것 같다. 수려한 문장과 통찰은 어느 고전 책들에도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시적인 표현도 중간중간 있는 것 같고 은희경 작가의 색깔이 짙은 작품인 것 같다. 기억하고픈 부분이 많아 포스트잇도 많이 썼다. 촌철살인의 문장들은 많지만 아래에 대표인 예들을 몇개 적어본다.
배신은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을 하지 않는 것
(배신이야말로 하늘 아래 새로울 것이 없는 삶을 약간이나마 변형시켜 준다.)
배신과 반칙이 없는 세상이란 누군가 앞서 살았던 삶에 대한 복제일 뿐이다.
배신이란 대열에서 이탈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제 3의 것의 존재를 일깨워준다.
모든 것을 두 가지로 나누는데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제 3의 것은 불온하며 불리하겠지만 말이다
. 그 중에서 가장 불온하고 멋진 배신은 사랑이 아닐까.
사랑은 자유를 배신하고 법치주의를 배신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하고
지속되기를 거부함으로써 사랑 자체를 배신한다.
사랑은 나 스스로 만든 환상을 깨뜨려서 나 자신까지도 배신한다.
비는 땅에게는 생명이고 소녀에게는 그리움이나 약속이고
우산 장수와 나막신 장수의 어머니에게는 인생의 모순된 단면이며
조종사에게는 결항이고 떠나려는 사람에게는 미련,
젓은 빨랫대에게는 노동의 전조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차단기이다.
나는 현석의 뒷모습조차 보지 못했다. 보이는 것은 오직 비뿐이다.
가볍게 살고 싶다.
아무렇게라는 건 아니다.
나는 사랑의 소모를 두려워했다. 마치 광합성처럼 스스로 제 먹이를 만드는 녹색 식물처럼, 햇빛을 받아들이고 물을 길어올려 자기 안에서 스스로 먹이를 만드는 사랑을 원했다. 내 몸속에서 혼자 사랑이라는 먹이를 만들고 그것을 먹으며 생존해가기를 말이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황량한 겨울 들판을 헤매며 타인을 찾아 울부짖고 싶지는 않았다.
밑줄 북북
p.42
그러나 섹스의 깊이는 계속 소리만 질러대는 단조로운 고음부 코러스에 있지 않다. 무반주 첼로 연주처럼 힘 있고 유장하면서도 견딜 수 없도록 고독한 데 있다. 만약 섹스가 터질 듯한 환희의 코러스 뿐이라면 인간은 쉽게 섹스의 바닥까지 도달해버릴 것이며 그 일을 평생 되풀이하고 싶어할 리도 없다. 가장 가깝게 합해지는 순간 가장 고독하게 분리되는 어떤 부조리한 동반ㅡ섹스의 순간에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p.44
삶을 불신하기 때문에 늘 불행에 대한 예상을 하고 그 긴장을 잃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이 겉으로는 강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날지 몰라도 실은 나의 가장 비겁한 면이다. 어떤 일에 자기의 전부를 바친다면 그것만으로 그의 삶은 광채를 얻는다. 하지만 나는 내 전부를 바친 일, 그 끝에 잠복하고 있을지도 모를 파탄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언제나 나 자신의 삶까지도 관객처럼 거리 밖에서 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p.46
상대가 어색한 얘기를 꺼내려 하면 이렇게 나는 내 쪽에서 미리 비약해버림으로써 이야기의 핵심을 흐려놓을 때가 있다. 진지한 말을 농담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내 버릇이기도 했다.
p.75
내가 사는 것은 언제나 현재이며 나는 지속을 믿지 않는 것이다. 내가 왜 일찍부터 삶의 이면을 보기 시작했는가. 그것은 내 삶이 시작부터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차피 호의적이지 않은 내 삶에 집착하면 할수록 상처의 내압을 견디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아마 그때부터 내 삶을 일정한 거리 밖에 두고 미심쩍은 눈으로 그 이면을 엿보게 되었을 것이다.
p.85
결혼 체험이 군 복무나 현장 근무, 해외 연수의 경험처럼 그 사람의 실력을 보장해주는 이력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되지 못할 것도 없다. 어떤 문제에서 사람들은 오직 하나, 딱 한 번이어야 한다는 강박에 너무 쉽게 굴복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반드시 하나뿐라야 하는 것이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결혼도 마찬가지이다.
p.92
순간에 깃들이는 짧은 공유의 느낌이 사랑의 한 조각이라고 중얼거렸던 것도 같다.
p.95
재미있는 말을 잘해주는 애인도 있었지만 나는 그보다는 말 없이 바라볼 때 기분이 좋아지는 애인 쪽에 더 마음이 끌린다. 말은 공허한 것이다. 듣기 좋은 사랑의 고백도 많이 하다 보면 지킬 수 없는 맹세가 된다.
p.108
문제라는 것은 어디에나 있다. 문제가 없다는 말은 문제삼지 않는다는 뜻일 뿐이다.
p.115
모든 사람에게는 나쁜 면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때로 그 점이 표출될 때 놀랄 필요는 없다, 이렇게 말하는 편이 좋겠다. 나 자신이 나쁘지 않다고 강변하려다 보면 ‘나쁜 일면을 가진 보통 사람’에서 벗어나 거짓된 사람, 즉 ‘정말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p.125
금기를 깨는 일에 두 번째, 세 번째라는 말은 없다. ‘맨 처음’과 ‘그 다음부터’가 있을 뿐이다. 외도의 경험이 딱 한 번 있다는 말은 어딘가 어색하다. 한번도 없거나 많거나이다. 두 번째부터는 다 똑같다.
p.126
불순한 외박을 추궁당하지 않으려는 데 급급해 친구의 인격을 소모품으로 쓰고 버릴 만큼 사람은 이기적이다. 나는 그러나 그 행동이 뻔뻔스럽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삶의 우스운 면이 바로 이런 경우에 있다.
p.127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살아볼수록 인생은 상투적이다. 세상에는 언제나 흔한 일만 일어난다. 자기 자신에게는 대단한 사연일는지 몰라도 세상 전체로 보면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한 가지도 없다.
p.127
사람은 언젠가는 떠난다. 그러니 당장 사람을 붙드는 것보다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훼손시키지 않고 보전하는 것이 더 낫다. 그것은 내가 끊임없이 사랑을 원하게 되는 비결이기도 하다. 사람은 떠나보내더라도 사랑은 간직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사랑을 할 수 있다. 사랑에 환멸을 느껴버린다면 큰일이다. 삶이라는 상처를 덮어갈 소독된 거즈를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꼴이다.
p.128
이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 상대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아닌지 따져보는 데에 사랑할 시간을 다 써버리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사랑은 누가 선물하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오는 운명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사랑을 하고 안 하고는 취향이며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엄연한 능력이다.
p.160
남자가 스스로를 초라하게 느끼고 있을 때 아내는 그 초라함에 속한다. 아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래도 괜찮다’는 동반자로서의 위로이다. 그러나 애인은 다르다. 멋진 애인의 존재는 ‘당신을 초라하지 않다’는 말과 같다. 그것이 아내와 애인의 다른 점이다. 보통 생각과 달리 애인 노릇은 아내 노릇보다 결코 쉽지 않다. 애인은 늘 매력적이어야만 한다. 애인의 위상이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p.160
사랑을 위로하는 데에는 여러 방법이 있다. 고향풍경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어떤 사람은 고향의 사진을 구해다 보여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다른 멋진 풍경으로 데려가 고향을 잊게 해줄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애인을 소개해 줘 풍경에 대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할 수도 있다. 삶은 우리의 정면에만 놓여 있는 게 아니다.
p.163
나는 사랑했던 남자가 행복하게 살아서 내게 잊혀지기를 바랐다. 사랑은 자주 오고 결국은 끝나는 것이다. 아무리 사랑했어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나미가 노래했듯이 ‘그 시절의 너를 또 만나서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슬픈 인연’이다. 사람의 관계란 끝이 오면 순순히 끝내야만 한다. 아무리 사랑했더라도 그 시간이 지나가버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듯 말이다.
p.168
맹세란 지키고 싶을 때만 유효하다. 모든 사랑의 맹세는 진실하지만, 사랑이 떠난 다음까지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그 맹세를 지킬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나 사랑할 때만 맹세를 지킨다. 그러므로 맹세란 아무 구속력도 없는 것이다.
p.199
결혼은 연속되는 내 삶의 가운데에 있는 하나의 마디일 뿐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내 삶의 중간 과정이다. 학년이 바뀌어 새로 받은 교과서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공부할 과목만 바뀌었을 뿐 삶이 달라질 것은 없다.
p.221
독신이란 자기 자신의 행동이나 노동을 일일이 의식하며 사는 일이다. 시든 꽃은 내가 버리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꽃병 속에서 썩어가고, 머그잔 바닥의 커피 찌꺼기도 내가 컵을 씻기 전에는 계속해서 그대로 말라붙어간다. 깨진 컵의 유리 조각도 나 아니면 처음 위치에 한없이 엎드려 있다. 신문 역시 내 손으로 들여다놓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현관에 버려져 쓸모없는 폐지가 되어간다. 어떤 순간 그런 것에 염증이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하지 않은 일을 목록이라도 만들 듯 일일이 의식하게 만드는 공간에 짜증이 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동반할 존재라는 것이 귀찮고 벅차게 느껴져 화분 하나조차 두기가 싫어지는 때가 온다.
p.229
가볍게 살고 싶다.
아무렇게라는 건 아니다.
p.234
이번에도 삶은 나를 앞질러 갔다.
아무리 용의주도한 척하고, 미리 잘못될 경우를 예상함으로써 불행에 대비한다고 해도 다 소용없는 일이다. 정해진 일은 피할 수 없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자기가 갈 길을 선택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삶이 내주는 예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뿐이다. 행동은 인간이 하지만 삶은 운명이 결정한다.
p.247
이유가 있는 사랑은 상대로 하여금 이유를 제공해야 하는 부담을 준다. 사랑이 무거워지는 것이다.
p.253
사람의 삶에 헤어짐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음을 완전히 부려놓을 수 있는 장소, 거기에서 영원히 멈출 만한 시간이란 없었다. 삶은 흘러가는 것이다. 그 흐름에 따라 주소를 옮기는 것뿐인데 일일이 헤어짐을 기억할 필요는 없다.
p.259
“나는 희망을 갖는 일이 두려워. 결국 적응하게 되고, 지속되기를 바라고 그런 것들 모두. 희망을 가지는 것은 뭔가를 믿는다는거야. 당신은 그 결과가 뭐라고 생각해? 삶은 늘 우리를 속인다구. 삶은 말야. 믿으라고 있는 게 아니야. 배신을 가르쳐주기 위해 있는 거야.”
p.268
나는 사랑의 소모를 두려워했다. 마치 광합성처럼 스스로 제 먹이를 만드는 녹색 식물처럼, 햇빛을 받아들이고 물을 길어올려 자기 안에서 스스로 먹이를 만드는 사랑을 원했다. 내 몸속에서 혼자 사랑이라는 먹이를 만들고 그것을 먹으며 생존해가기를 말이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황량한 겨울 들판을 헤매며 타인을 찾아 울부짖고 싶지는 않았다.
p.273
누구나 마지막 춤 상대가 되기를 원한다. 마지막 사랑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마지막이 언제 오는지 아는 사람이 누구인가. 음악이 언제 끊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마지막 춤의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의 상대와의 춤을 즐기는 것이 마지막 춤을 추는 방법이다. 마지막 춤을 추자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대답하면 된다. 사랑은 배신에 의해 완성된다고.
p.274
춤 상대가 누구든 무슨 상관인가. 춤을 즐기면 그만이다. 모든 게 다 마지막이다. 마지막 춤이 아닌 것은 없다. 그리고 또한 마지막 춤도 없다. 단지 춤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