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책마을을 가다 - 사랑하는 이와 함께 걷고 싶은 동네
정진국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초등학생 때, 그러니까 한창 우리나라가 86 아시안게임이네, 88 올림픽이네 하면서 국제적 행사에 열을 올리던 시기, 도로재정비와 가로수 심기, 노점상 대거 정리등등 그야말로 온나라가 손님맞이 준비로 정신이 없던 그 80년대, 그리고 곧이어 '지구촌시대'란 말을 내 이름보다 더 자주 듣게 되던 90년대 초반. 

<유럽의 책마을을 가다>의 마지막 페이지를 다 읽고 책을 덮으면서 불현듯 내 어린시절이 떠오른 건, 어쩌면 지금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정겨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거제국민학교(그 때는 초등학교를 이렇게 불렀으니까) 하교 종이 땡땡땡 울린다. 책가방과 실내화가방을 손에 든 아이들은 곧장 집으로 가는 법이 없다. 학교 근처 문방구에서 100원짜리 오락을 하거나 그 중 몇명은 책방에 들러서 이것 저것 둘러본다. 어린 나 또한 익숙한 걸음을 옮겨 책방의 유리문을 힘겹게 열고 들어간다.

"은선이 왔구나, 오늘은 학교에서 뭐 배웠노? 오늘은 전과 사러 왔나 아니면 어린이문예 새로 나온거 보러왔나?"

서점 아저씨는 다른 손님의 책을 포장해주시면서 나에게 인사를 건네주신다.

"언니들처럼 니도 책 많이 읽어야한다. 그래야 나중에 커서 훌륭한 사람된데이~문예반에서 시 쓰는거는 재밌고?"

어떤 때는 딸 넷을 키우느라 정신없으신 우리 엄마, 아빠보다 책방아저씨가 내 학교생활을 더 잘 아신다. 나와 언니뿐만 아니라 우리 반 친구들, 아니 어쩌면 우리 초등학교 전교생의 생활기록부가 마치 서점아저씨의 머리에 컴퓨터처럼 입력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담임선생님보다 더 꼬치꼬치 물어보기도 하고 아이들의 공부에 잔소리도 하시고..그래서 한 때는 책방 아저씨의 딸, 아들들은 얼마나 피곤할까 하는 앞선 걱정도 혼자 하곤 했던 것 같다.

 그 시절 책방은 동네 사람들에게는 사랑방같은 곳이다. 어른들은 신문과 잡지를 사가면서 사회, 정치에 대해 시민논객마냥 한 마디씩 생각을 나누며, 젊은 아가씨들은 유행하는 하이틴잡지를 사가면서 좋아하는 연예인의 브로마이드나 부록을 챙겨받아간다. 책방 아저씨는 건너편 3층 단독주택에 사는 언니가 세또래 팬이고 그 친구는 변진섭인가 하는 가수의 팬인거까지 다 아시고 미리 부록을 챙겨놓곤 하신다. 중, 고등학생 언니 오빠들은 책방 구석에 서서 책을 읽고 가기도 하고, 학습지나 참고서를 둘러보면서 책방 아저씨와 학교 선생님 흉을 보기도 하고, 이번 중간고사 망쳤다며 우는 소리도 한다.

<유럽의 책마을을 가다>에는 런던이나 파리, 로마등 유럽의 대도시에 있는 이름있는 대형서점을 말하는 책이 아니다. 마을 이름도 발음하기 힘든, 우리나라로 치자면 전라도나 강원도등 그 안에서도 산을 몇 개를 넘고 더 들어가서야 나오는 무슨 면, 리같이 작은 동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은 동네가 책과 만나면서 주민이 하나가 되고, 다양한 중고서적들, 고서들, 번역본과 이름모를 예술가들의 자서전등 책과 관련된 문화 행사들을 열어가면서

주민들이 하나로 일치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저자(정진국)는 스위스, 프랑스, 베네룩스 3국, 스칸디나비아 나라들, 독일, 영국, 아일랜드의 조그만 책마을을 직접 찾아가며 그 감상을 여과없이 전한다. 유럽도 시골과 도시의 경제적 문화적 수준의 차이가 크고 무엇보다도 농사에만 의존하던 시골사람들의 삶이 날이 갈수록 힘들어지는 상황에서 다른 돌파구를 찾아야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이미 터져나오고 있단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의 책마을은 주민들의 화합도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을의 경제성장에도 큰몫을 하고 있다. 바자회나 북페스티벌등의 문화행사를 열어 관광객을 유치하고 그 관광객을 대상으로 숙박업이 성행하게 되면서, 마을에 새바람이 일고 있다. 젊은이들이 떠나버린 늙은 시골마을이 아니라 책을 통해서, 마을 곳곳 수십곳의 책방들을 통해 유럽의 마을들이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중고책이라 하면, 책의 내용과 가치보다는 무게만을 달아 중고책값을 매기거나 아니면 재활용에 같이 폐기해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한 특정 대기업의 이름아래, 대형서점들이 동네의 작은 영세 서점들을 하나씩 잡아먹어가고, 거기에 온라인 서점까지 가세를 하여 동네 서점은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어린 시절 사랑방이자 마을 회관같던 책방들이 동네사람을 하나로 이어주던 그 역할을 이제는 기대할 수 가 없다. 발전과 편리라는 이름아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은 아닐까.....

 <유럽의 책마을을 가다>를 읽으며, 그러한 공간이 우리나라의 버려진 혹은 젊은이들이 떠나버린 작은 시골동네, 어촌마을, 깊은 산속 벽지에도 하나 둘씩 생겨나서 그 곳들이 정신적, 문화적으로 풍요롭고 사람냄새나는 곳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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