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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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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다. 줄거리를 쓸 수 없는 소설이다. 처음엔 스무고개 같은 느낌이었다. 화자가 무엇일까? 누구일까? 스무고개는 이내 수수께끼로 변주한다. 내겐 의식의 흐름 기법 작가로 울프와 뒤라스가 양대 산맥이었다. 오늘부로 독보적인 원탑 작가가 갱신되었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호그와트 마법 주문 같다. 그의 글도 방금과 같은 식이다. 지금 현재 바로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된다.







∣ 내가 여기서 당신에게 쓰는 것은 하나의 회로도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것: 그저 지금인 것. (p.15)


∣ 하지만 언어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두 글자로만 이루어져 있다: 있다. 있다. (p.41)


'현재, 지금, 있음' 세 가지 키워드가 얇지만 절대 술술 읽히지 않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둥둥 떠다녔다. 읽음과 동시에 살아 움직이는 문장들. 이미 쓰여진 글에서 느껴지는 동시성. 문장이 살아 일렁거린다. 심리적인 깊이가 수심처럼 아득하다. 물 같은 글은 흘러간다.


∣ 나는 당신에게 자유를 주고 있다. 먼저 양수 주머니를 찢는다. 그다음엔 탯줄을 끊는다. 그러면 당신은 혼자서 살아 있게 된다. 나는 태어날 때 자유로워진다. 그것이 내 비극의 원천이다. (p.54)


흘러서 양수까지 거슬러 오른다. 살아 있는 글에선 생명력이 느껴진다. 자유를 얻어 탄생하고 비극과 같은 삶을 견딘다. 마치 죽기 직전 살아있음으로 남기는 생명력을 쥐어짠 유서 같은 글이다. 다채로운 심상을 담고 있어 결코 어둡거나 우울하지만은 않다. 문학에 재즈가 있다면 이 책과 같을까. 소외된 소수가 만들어낸 재즈처럼 저자만의 리듬을 가지고 오직 흐른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거기엔 몹시도 심원한 행복이 있다.

내가 여기서 당신에게 쓰는 것은 하나의 회로도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것: 그저 지금인 것. - P15

하지만 언어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두 글자로만 이루어져 있다: 있다. 있다. - P41

나는 당신에게 자유를 주고 있다. 먼저 양수 주머니를 찢는다. 그다음엔 탯줄을 끊는다. 그러면 당신은 혼자서 살아 있게 된다. 나는 태어날 때 자유로워진다. 그것이 내 비극의 원천이다. - P54

나는 말들 너머에 뒤엉켜 있는 관능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문구들 속에서 나 자신을 구현한다. 문구들이 조용히 노크하면 거기서 침묵이 뿌옇게 솟아난다. - P31

나는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안다: 즉흥적으로 지어내고 있다. 그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음악을 즉흥적으로 지어내는 재즈, 청중 앞에서 즉흥을 풀어 내는 재즈, 격정에 빠진 재즈처럼 하는 것뿐인데. - P33

내가 하는 말은 피상적으로만 들으라. 그러면 의미의 결여에서 하나의 의미가 탄생할 것이다. 내게서 높고 밝은 삶이 불가사의하게 탄생하는 것처럼. 말들의 무성한 밀림은 내 느낌과 삶을 빽빽하게 뒤덮고,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내 바깥에 남아 있는 내 것으로 변형시켜 버린다. - P37

나는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쓸 때면 익명이 된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나의 깊디깊은 익명성. - P53

나는 말들의 흐름으로 글을 쓴다. - P55

당신은 나를 이해하는가? 하지만 너무도 너무도 지친 나는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다. 이 피로에서 나를 해방해 줄 수 있는 건 죽음뿐이니까. 나는 떠난다. 돌아왔다. 다시금 나는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모든 것을 마주한다 ㅡ 이것이 나 자신을 창조하게 될 방식이다. 이런 식으로: - P137

설령 당신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말하기는 곧 구원이 되기에 나는 말을 해야만 한다. - P138

자연의 부조리함. 침묵이라고 하는 것. ‘신‘은 너무도 거대한 침묵이라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한다. - P139

당신이 무언가를 볼 때, 본다는 행위 자체는 형태를 갖고 있지 않다ㅡ당신이 보는 대상은 형태가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있다. 보는 행위는 말로 표현될 수 없다. 또한 당신이 보는 대상 역시 어떤 때는 말로 표현될 수 없다. - P145

아, 삶은 너무도 불편하다. 모든 게 죄어온다: 몸은 요구하고, 정신은 멈추지 않는다. 삶이란 피곤한데 잠을 잘 수 없는 상태와 같다ㅡ삶은 성가시다. 당신은 몸과 정신 그 어느 것도 벗어 둔 채 걸어 다닐 수 없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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