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영과 젊은 그들 - 아나키스트가 된 조선 명문가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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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된 우당 이회영(1867~1932)님을 소개하면 대대로 문벌이 높은 삼한갑족(三韓甲族) 출신이고 10대조 백사 이항복부터 영의정만 9명을 배출한 집안이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명문가의 자손이, 아나키스트로서 평생을 바쳤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벌이 높은 집안의 후예로 인간의 절대 자유와 절대평등을 주장하는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고 목숨까지 바치며 투쟁했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더욱이 대한제국이 망하고 한일합방이 되면서 작위를 받은 이들이 대부분 내로라하는 유력 가문 출신인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1910년 일제의 강제 한일합방 체결 이후 국가에 위기가 닥치자 몇달 뒤 이회영과 여섯 형제는 일제와 싸우고자 전 재산을 정리한 후 만주로 망명했다.

여섯 형제가 가산을 정리하는데 급하게 팔다 보니 제값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회영 형제들이 마련한 자금은 약 40만원의 거금이었다. 당시 쌀 한 섬이 3원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를 2000년대 쌀값으로 단순 계산하더라도 약 600억원이나 된다고 하니 엄청난 거금이 아닐수 없다.

이회영과 형제들은 사회 고위층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인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진정으로 실천한 인물들인 것이다.

이회영은 헤이그 밀사파견을 주도, 고종의 국외 망명 추진, 신흥무관학교 설립, 조선 아나키스트 운동노선지의 발행자금 부담 등 엄청나게 많은 일을 했다.

항일무장투쟁으로 나라를 되찾고, 되찾은 나라를 바로세우기 위한 교육이 이회영이 평생에 걸쳐 실천한 삶이었다.

이렇게 많은 일을 했던 이회영 일가는 극심한 가난으로 끼니를 못 잇고 굶은 채 누워 있었을 정도로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이회영은 만 65세 때 새로운 투쟁을 위해 상해로 가기위해 배 밑바닥에 숨어있다가 일제밀정의 밀고로 체포돼 여순감옥에서 고문 끝에 순국했다.

일제시대 빼앗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 모든 재산과 삶을 바친 이회영과 형제들의 삶을 돌아보고 배우는 것은 이땅에 자랑스럽게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살고 있는 우리들이 마땅히 해야할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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