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고독한 날 - 정수윤 번역가의 시로 쓰는 산문
정수윤 지음 / 정은문고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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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고독한날#정수윤

 

일본의 전통시 와카.

고대일본에서는 지식인의 필수 소양이었다. 상대와 실력을 겨루는 하나의 시합이 되기도 했고 연인에게 마음을 전하는 방법이 되기도 했다.

5 7 5 7 7 로 마디를 나누어 31자로 노래하는 와카는 우리나라 시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책의 저자는 일본문학을 번역하는 번역가다. 항상 문장을 옮길 때 색체와 이미지를 떠올리며 그 장면을 옮기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그런 그가 와카를 소개하고 거기에 얽힌 자기 이야기를 한다. 가깝고도 먼 이국의 언어와 어원을 조곤조곤 친절하게 알려준다.

 

고등학교 때 일본어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남는 말은 몇 가지 없다. 생각 없이 그냥 외웠던 것 같다. 일본 애니메이션 대사도 몇 개 기억하고 있지만 일본어의 매력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어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갑자기 그 언어에 대한 호기심이 인다. 진작 관심이 갔다면 좀 좋았을 텐데 말이다.

소나무기다리다는 둘 다 마쓰라고 읽는다고 했다. 그래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와카에는 소나무가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선 기다림이라고 하면 -망부석이 떠오르는데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옷고름을 적시는 우리나라와 달리 소매를 적시는 일본도 한복과 기모노의 차이라고 생각하니 재미있었다.

 

일본어로 코는 아이를 뜻한다. 고양이를 뜻하는 네코ねこ도 자는 아이 (네루ねる는 자다는 뜻)에서 왔다는 속설이 있다. 새근새근 잠자는 아이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고양이를 사랑해서 왔을 거라는 저자의 추측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너무 짧은 시에 처음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싶어 저자를 길잡이 삼아 졸졸 따라갔었지만 금방 그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사전지식 없이 먼저 한번 읽어보고 해석과 그의 이야기를 읽어보고 내 이야기를 덧대서 한번 또 읽어보았다. 아기자기한 표현이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어떻게 이런 짧은 글로 마음을 다 나타낼 수 있을까 그 재치에 무릎을 치기도 했다. 나도 한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들었다.

 

감성적인 겨울의 입구에 너무 잘 어울렸던 책.

마지막으로 좋았던 와카 몇 개만 놓고 간다.

 

나의 소매는 썰물 때도 잠기는 먼 바다의 돌

아무도 모르지만 마를 틈이 없구나

 

겨울인데도 하늘엥서 꽃잎이 떨어지는 건

구름의 저편으로 봄이 온 탓이리라

 

잊힌다 해도 저는 괜찮습니다 불변의 사랑

목숨 걸고 맹세한 당신이 걱정될 뿐

 

‘몰래한 사랑‘을 노래한 와카로는 이런 시도 있다.

내 얼굴 보고 사랑한다는 소문 떠돌았나 봐

눈물로 젖어버린 소매 색이 짙어서

하도 울어서 얼굴은 퉁퉁 붓고 소매는 눈물 콧물 닦느라고 한참 짙어졌다. 그 가여운 마음이 좋아서 나는, 이 소박한 작자미상의 시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 P218

날이 쌀쌀해서인지 요즘은 뜨거운 것이 좋다. 완전하게 타오르는 연소. 적당하게 적절히, 그건 말 그대로 적당하고 적절하여 반쯤 식어버린 어묵 같다. 뭐든 인생에서 하나쯤 나의 어떤 부분을 완전히 다 태워버릴 정도로 사랑하는 일, 사랑, 대상을 찾고 싶다.

역설적으로 그것이 인생을 윤기 있게 한다. - P208

제비꽃의 계절이면 길을 걷다 시멘트벽과 아스팔트 도로 사이에 간신히 핀 한 송이 제비꽃만 봐도 발길이 멎는다. 아, 박수라도 쳐주고 싶지만 조용히 바라본다. 그러고 있으면 웃고 싶기도 하고 울고 싶기도 하다. 그 연하고 은은한 보랏빛 때문일까. 아무튼 나는 제비꽃을 좋아하는 사람을 싫어할 수가 없다. - P58

사랑을 에둘러 말하는 건 요즘 일본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내 친구 사와라는 내가 애인과 문자 주고받는 모습을 보고 말했다. "하트가 그렇게 많이 오다니 놀라워." 나는 되물었다. "그래? 사랑한다는 말 대신인데."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살면서 사랑한다는 말 같은 건 세 번쯤 들어봤을까?" "그럼 넌 사랑하는 마음이 들 때 뭐라고 말해?" "음, 날이 좋으니 같이 오토바이를 타자거나? 오늘 밤 너랑 먹는 카레가 특별히 맛나다거나?"

아무튼 타다미네 정도의 러브레터를 쓰는 능력도 흔하지는 않다. 오늘부터 사랑의 감수성 근육을 좀 키워볼까. 사랑의 언어도 기술적인 단련이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좀 더 우아한 연애를 하고 싶으니까.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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