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원체 좋아하다 보니 가끔 주변에서 어떤 영화를 제일 좋아하느냐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받곤 한다.나는 어떤 특정 장르의 영화를 특별히 선호하지는 않지만 굳이 하나의 장르를 선택하라고 하면 역사 서사물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그 장르가 작품성이나 사적 가치가 뛰어나서라기 보다는 내 취향과 가장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번에 본 <300>은 내가 말하는 바로 그런 영화였다. 때는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로 침공하던 그 무렵 스파르타를 중심으로하는 그리스 연합군은 천혜의 요새인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그들을 맞아 일전을 불사하려고 전의를 불태울 때 배반자의 밀고로 샛길이 뚫리면서 스파르타군 300명을 제외한 연합군은 전장에서 철수하고 레오니다스 스파르타 왕을 비롯한 결사대 300명만이 남아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그곳을 사수했다는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쓰여진 사실만이 이 전투를 증언할 뿐이다. 말이 100만 대군이지 그들이 쏘아대는 화살은 하늘을 검게 물들였다니 그 전투가 과연 어떠했을지는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지만 영화는 이것을 멋지게 재현해냈다. 그러나 진위는 차치하고라도 프랭크 밀러의 동명 그래픽 노블을 영화화한 <300>은 전대미문의 시각적 쾌락을 선물한다. 그 안에는 삶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질문도, 흔히 강조되는 권선징악의 메시지도 없다. 다만 그렇게 싸우다가 죽어간 영혼들의 장렬한 죽음만이 실전을 방불케하는 생동감과 음향효과의 힘으로 정말로 처절하게 압도해올 뿐이다. 죽음이 훤히 보이는 전투를 코앞에 둔 스파르타 병사의 체념 섞인 각오를 한번 음미해 보자. "페르시아 병사들이 쏜 화살이 태양을 가릴 것이라니 정말로 반가운 소식이구려. 그렇다면 우리는 그늘 속에서 싸울 수 있지 않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