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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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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려령의 소설 ‘완득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상처는 깊은 것이다. 그 깊이의 연원은 개인의 선천적인 것에서부터 사회의 구조적이며 억압적 질서에 이르기까지 만만찮은 것들이다. 세상에 나서 누구든 개인의 삶을 가꾸며 살고 행복해질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적어도 ‘완득이’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문법이다. 소설 ‘완득이’을 관통하는 특별한 문법의 핵심은 개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일상화이다.

완득이는 아버지가 난쟁이이며 어머니는 베트남 사람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찍 헤어지고 십칠 년 동안 완득이는 어머니 없이 성장하였다. 내내 그의 가슴을 뭉텅이로 짓누르는 것은 확인사살하는 세상의 시선이다. “얘 아버지는 난쟁인데, 이 새끼는 × 나게 잘 커요.” 세상은 심심하고 마땅히 놀릴 거리가 없을 때 유용하게 장애인 아버지를 써 먹으며, 아들에게 아버지를 숨기도록 강요한다. 결핍으로 자랐으며, 성장하여 만난 그의 어머니는 인간들로부터 “저 쪽 사람”으로 경계 지워진다. 부모 자체가 상처인 아이 완득이는 아프다. 세상에 “내 말 들어 줄 사람이 없어.”라는 그의 탄식은, 상처받은 영혼의 깊은 데에 오래 각인되고 거듭 한으로 천공되어버린 것이다. 옥탑방, 수급대상자, 장애인 아버지, 삼촌이라 불리는 또 다른 장애인, 카바레와 지하철을 전전하는 그들의 밥벌이, 꼴 같지 않은 똥주 선생, 그러므로 그의 고뇌는 별이 하나도 없는 밤이다.

돌아다니다 돌아다니다 결국 혼자 있고 싶어서 온 곳이 결국 집이더라는 완득이는 “가출마저 봉쇄된” 상처투성이 아이다. 혼자 끓여 먹던 라면, 냄비에 넘쳐흐르는 밥물, 젖은 가스레인지 … 그가 “가시 팍팍 꽂힌 예수님”한테 드리는 유일한 기도 제목은 담임 똥주를 “죽여주세요.”다. 타인에 대한 적의이며, 세상으로부터의 이탈이고, 구원으로부터의 반항이다.

2. 

그의 불화(不和)는 이러하다.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이 미친 세상이 왜 자꾸 건드리는지 알 수가 없다.” 세상은 그에게 상처를 더 깊게 박을 뿐, 그의 불화를 쓰다듬지 않는다. 지하철에서 고급 스타킹을 파는 그의 아버지와 삼촌은 두 남자에게 두들겨 맞는다.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다가 공익근무 요원들에게 쫓겨 허탈하게 도망친다. 집으로 돌아온 완득이는 아버지한테 맞는다. 때리는 늙은 아버지가 힘들다. 상처가 우는 소리를 낸다. 세상은 그들을 “웬 병신들이 떼거지”로 다니는 것쯤으로 인식한다. 세상의 십자가는 미치도록 많이 동네에 박혀있다. 동네 집들보다 더 많을 지경이다. 불화하는 완득이에게 세상의 교회마저 위선의 다른 이름이다. 그의 불화가 어느 방향으로 치닫든 이 어린 영혼의 질주에 아무도 돌 던질 수 없다. 그러므로 완득이의 불화는 폭력이 꽃핀 세상에 대한 분노의 증거이며, 일상적 잔인함의 징표가 된다. ‘울지 마라 완득이’ 아무도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눈 뜨면 학교에 가고, 해지면 다시 집에 와서 자고, 자신에게 말을 세우고 세상과는 지나치게 무심하게 살아간다. 장애인 아버지의 꼬리표를 달고 간다.

혼자 밥 먹고 혼자 설거지 하고, 싫어도 싫다는 말 못하고,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안 하고, 그냥 다 속에 담고 사는 아이다. 어느 순간 스스로 아버지와 그를 짓누르는 “열등감”에 대한 자각이 찾아온다. “열등감 이 녀석, 은근히 사람을 노력하게 만든다.” 그의 깨달음은 세상이 내리는 한 줌 빛이거나 축복의 은전이 아니다. 오로지 그가 갈구어 낸 상처 위의 새살이다.

3. 

상처와 불화 깊은 데서 완득이가 걸어 나오는 길 위에 가교를 놓은 사람은 똥주 선생이다. 한때, 여전히 정의를 꿈꾸고 있는 법대 출신 사회 선생 똥주는 가슴이 뜨거운 사람이다. 그의 상처와 불화도 깊은 데가 있다. 그는 가진 자의 아들이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그의 아버지 공장에서 베트남에서 온 “티로” 누나가 필통 판금을 하다 절단기에 손가락이 잘리는 사건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티로”의 손가락 세 개가 손등까지 썩을 때까지 부려먹다 내보낸다. 그는 아버지의 그 잔인함을 잊지 않는다. 지울 수 없다. 그 이후 철로 된 필통을 쓰지 않는 똥주 선생은, 그러므로 노동자의 인권에 대한 유린을 보듬고 살며 속죄의식으로 뭉친 사람이다.

자기가 먹으려고 제자한테 수급품을 배달시킨다는 오해를 받으나, 그는 여전히 속 뜨거운 사람이며 당당한 사람이다. 그는 완득이 아버지를 두고 교실에서 “몸땡이 멀쩡하면서 굶어서 죽는 게 쪽팔린 거”라고 아이들에게 말한다. 가난한 게 쪽팔리는 게 아니라, 굶어 죽는 게 쪽팔리는 거라 말한다.

그의 말을 더 들어 보자. “새끼야, 쪽 팔린 줄 아는 가난이 가난이냐? … 햇반 하나 푹 끓여서 서너 명이 저녁으로 먹는 집도 있어! … 한 번 한 번이 쪽팔린 거야. 싸가지 없는 놈들이야 남의 약점 가지고 계속 놀려 먹는다만, 그런 놈들은 상대 안 하면 돼. 니가 속에 숨겨놓으니까, 너 대신 누가 그걸 들추면 상처가 되는 거야. 상처 되기 싫으면 그냥 그렇다고 니 입으로 먼저 말해버려.”그러나 늘, 타인의 말이어서 쉬운 것일 수 있다. 완득이가 커밍아웃을 머뭇거리는 것은 아버지 때문이기도 하다. “내 아버지는 호킹 박사 같은 1등 대접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높기만 한 지하철 손잡이를 마음 편하게 잡고 싶을 뿐이다.” 하는 완득이의 언어는 소박한 것이다. 밀레의 그림 ‘이삭줍기’를 보고, 구부정한 아줌마가 “뭘 봐?” 하는 것 같다고 말한 완득이의 언어는 그가 선 곳이 불화의 절정임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똥주 선생은 완득이를 이끈 좋은 교사이며 한 가닥 좋은 빛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득이의 치유가 비롯되는 곳은 똥주 선생이 전부가 아니다.

완득이에게는 “꽃분홍색 낡은 단화, 혹은 기억에 없는 모유”로서의 어머니가 있다. 그에게 어머니는 “모르는, 기억에 없는” 불편한 사람이다. 그러나 정직한 그는 맨 처음의 어머니 앞에서 심장이 멈추는 듯하다. 벌 받는 사람처럼 무릎 꿇고 앉은 어머니는, 십칠 년 만에 만나서 라면 한 그릇 끓여 먹고 헤어지는 가난한 존재로 다가온다. 그의 어머니는 팔려온 “하녀”이며, 여전히 “꽃분홍색 술이 달린 촌스러운 단화”를 신은 사람이다. 한국에 밥이라도 마음대로 먹으려고 온 사람이다. 그러나 가난한 그녀에게도 모성(母性)은 지극한 것이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 잘 사는 나라의 가난한 사람과 결혼해 여전히 가난하게 살고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영혼이 가난하지 않다.

그녀가 완득이의 아버지를 위해 삼계탕을 끓이려 정육점에서 산 것은, 살 만큼 살다가 늙어 죽은 “폐닭”이다. 씹는 맛도 좋고 씹을수록 고소해 하는 그녀의 오래 전 남편을 위한 성찬이다. 질겨서 타이어를 연상케 하는 “고무 모형 닭”은 완득이와 어머니와 아버지를 잇는 정서적 가교이다. 여기 이 지점에서 상처받고 불화하여 온 완득이의 치유적 본능이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가난의 확인 지점이며, 치욕의 정서적 연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주말에 숯불갈비집 아르바이트를 하고, 새벽마다 신문을 돌리고, 그 월급의 일부로 시장에서 어머니의 신발을 산다. 어머니가 노동을 착취하는 식당을 나와 자리를 옮긴다거나, 아버지가 댄스교섭소를 차린다거나, 여자 친구 윤하와 입을 맞춘다거나, 동사무소 뒤의 십자가가 마음에 들기 시작하는 것들은 모두 그의 존재 확인과 변화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가 그의 실존적 좌절에 대한 확인을 감당하면서 스스로 치유적 본능을 발휘하는 공간에서 새 살이 돋는다. 세상의 폭력을 다 감당하고 자기를 치유할 수 있었다니, 완득이의 승리라 할 만하며 젊은 소설가 김려령의 놀라운 상상력이다.

4.

소설 속의 선생 똥주는 완득이를 세상 속으로 꺼내 놓는 훌륭한 교사다. 스스로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이나 사회적 약자의 소외에 팔 걷고 나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혼합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갈 곳 없는 가난을 모르는, 가난을 체험해 보고 있는” 선생이다. 옥탑방에서 폐계를 뜯을 때의 그의 언어는 사뭇 가지지 못한 자의 언어와는 다른 것이다.

완득이의 킥복싱 관장은 상처와 불화, 혹은 치유로 나아간 사람이다. 혜안 가진 사람이다. 완득이 안에 품은 핵을, 잘못 뿜으면 여럿 다칠 일을 예감한 사람이다. 상대에 대한 배려를 잊지 말 것을 가르친다. 완득이 가슴에 쌓이고 쌓인 뜨거운 말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완득이에게 오직 “지러가는 시합”을 가르친다. 세상의 길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것이 T.K.O 의 연속이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음을 가르친다.

그는 다만 세상의 문법을, 상처와 불화로 끓고 있는 완득이에게 가르치고 있다. “정강이 대 정강이가 되는 거야. 근데, 차는 쪽 정강이뼈가 부러질 확률이 높다. 철봉대에 킥을 날린 거와 흡사하지.”프로 킥복싱 대회에서,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미들 킥을 날린 선수 정강이가 상대의 정강이에 부딪히면서 그대로 뚝 부러진 것을 두고 관장이 내려 둔 말이다. 세상은 철봉대 정도가 아니다. 강철로 된 그 무엇 이상이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완득이가 1월 어느 날 저녁, 찬바람 속에 빨간 코를 한 윤하에게 어깨 수건을 목도리로 걸어주는 장면이 있다. 상처받은 자의 영혼이 성장한 모습이며, 세상 뒤에 숨었던 자가 세상 밖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아름다운 그림이다. 열등감을 벗고, 미련한 사람을 향한 가슴이 뜨겁기도 하고, 장애인 아버지와 장애인 삼촌과 베트남 어머니를 울렁이는 그의 가슴 안에 품는다. 상처와 불화의 얼룩이 이루어 낸 눈부신 성장이다. 그의 어머니 화장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이다. 

 

이제 초겨울이 오면 개천에 얼음이 얼 것이다. 사춘기의 아이들이 그런 곳을 지나며 완득이처럼 자꾸 히죽히죽 웃음을 흘리고 다녔으면 좋겠다. 세상을 향해 손 내미는 웃음소리가 들려왔으면 좋겠다. 쌓이고 쌓인 뜨거운 말의 비상을 듣고 싶다. 겨울 안에서 우리가 꿈꾸는 풍경이다. 

원문있는 곳 : http://blog.hani.co.kr/sanmoon/26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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