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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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을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딸에게 결코 공집합을 이해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존재하되 보이지 않으며 결코 발음될 수 없는 것. 우리는 공집합이고 그것은 모든 것입니다. 딸은 울면서 수학 문제를 풀고 당신은 애써 화를 누그러뜨리며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 침착하게 말합니다. 다시 풀어보렴. 지금 알지 못한다면 영원히 배울 수 없단다.”

13p

 

그날, 그 시절에 곁에 없던 아버지. 눈앞에 앉아 있었지만 가정환경조사서에는 그에 대해서 나라를 위해 봉사한다고 거짓된 진심을 써내야 했다. 존재하고 보이되, 발음될 수 없는 것. 유년의 에게 아버지란 육신과 이름을 가진 공집합이었을지도 모른다.

 

없는 것을 마주할 수 있을까. 부재는 눈에 보이질 않아서 그 울림이나 파장으로만 부재에 더듬더듬 다가갈 수 있다. 현재의 는 지금은 없는, 그 시절의 아버지를 찾아가려 한다. 지금 있는 아버지를 통해, 변해버린 시대를 통해, 아버지가 속해 있을 거대한 민주화운동이라는 서사를 통해. 무엇보다 아버지의 부재의 가장 가까이 있던 나와 어머니의 삶을 통해.

 

그를 기억할수록 그의 부재는, 그의 현재는 부당하다는 생각뿐이다. “아버지는 훌륭하신 분이다.” 그런데 왜 그는 이곳에 없는가. “아버지는 나라를 위한 봉사를 하십니다.” 그런데 왜 그는 경찰에 쫓겨다니는가. “개인적인 삶을 이어나갈 몸과 마음과 물질을 포기하고 민주화라는 정의에 몸을 바쳤던 그는 왜 친구들의 부정을 목격하고 환멸하기를 반복해야 하는가. 병든 아내 앞에서 무기력해야 하는가.

 

개인적인 삶.

개인을 위한 삶이란, 자신의 입에 밥을 넣는 것뿐 아니라 다른 식구들 입에 밥을 떠넣는 것을 포함하는 개인적인 삶이란, 당신은 이제부터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당신에게 더없고 낯설고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혼자였던 적 없이 언제나 함께 투쟁했고 그래서 우리는 형제였고 겨레였고 민중이었으며 바로 그런 우리 자신이 우리 나라였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제 당신 동지들로부터, 벗들로부터, 민족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자신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 우리였던 당신은 한겨울 옷을 빼앗긴 맨몸으로 차가운 거리에 내던져진 듯하다.”

48p

 

우리가 부재하는 지금 이곳에 아버지의 자리 역시 없다. “우리였던 당신당신으로 살아가는 일에는 너무 서툴다. 당신은 전기 배선 기술을, 영어 급수를, 엑셀 함수를, 한글 프로그램을, 전산 자격증과 컴퓨터 프로그램을 배워야 한다. 일찍이 개인적인 삶을 살았던 선량한 사람부터 선량하지 않았던 사람까지 모두가 발버둥치면서 익혔던 것들을, 당신은 뒤늦게 따라가고 있다. 우리에 속했던 다른 이들은 이미 국회의원으로, 출판사 사장으로 개인적인 삶을 이뤘는데도 말이다. 우리가 바랐던 염원이 이뤄졌음에도 말이다.

 

당신이 우리에 모든 것을 바치는 동안, ‘와 어머니는 당신의 부재 속에서 우리와 개인적인 삶을 모두 생각해야 했다. 돈이라곤 한푼 벌지 못했을 당신을 대신해 어머니는 날마다 낡은 수선집을 열어야 했다. 우리라는 이름이 동지들이 물을 달라 술을 달라 부탁을 하면”(52p) 술상을 봤고, 술 취한 그들을 재워야 했다. “아버지의 동지”(108p)로서 아버지의 비밀 문서들과 문안들을 관리해야 했고, 어린아이였던 를 국가로부터 지켜야 했다. 당신이 얘기하지 못하는 삶을 에게 이야기해야 했고, ‘가 받은 상처를 곁에서 어루만져야 했다. 감내해야 했다.

아버지의 부재를 이해하는 여정은 그렇게, 어머니와 로 이어진다. 시대로 나아간다.

 

어머니.

나는 지금 작은 방에 앉아 있습니다.

이것이, 내게 허락된 유일한 시간.

 

우리는 저마다 작은 독방 하나를 얻기 위해

평생 개처럼 싸우고

그 속에서 마지막날을 헤아리며 천천히 늙어갑니까.”

64p

 

이제 어리지 않은 는 아버지와는 다른 시대에서 개인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우리가 없는 시대, ‘저마다의 독방을 가져야만 하는 시대에서 개처럼 싸우고” “마지막날을 헤아린다. 우리여서 목소리를 높였던 시대에서, “완전히 각자였기에 침묵”(182p)하고, “각자라는 고독을 철저히견딘다(181p). 아버지가 평생 꿈꿔 온 민주화가 이룩되었다는 지금에, 아버지의 삶의 방식이나 이상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아버지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아빠처럼 그렇게 분노하다가는 평생 월세살이를 전전하고야 말 것임을 알고, 아빠처럼 누군가를 돕다가는 평생 새카맣게 어린 상사들에게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 날만 올 것임을 알고, 아빠처럼 제 몫을 챙기는 데 소홀하다가는 평생 연금은커녕 죽을 때까지 일을 구하러 다녀야 할 것임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아빠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살 것이며,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마음먹는다.”

178-179

 

아버지를 부정하는 삶은 행복할까. 분노하지 않는다면 평생 월세살이에서 벗어나고, “고개를 조아리는 일 없이, 존엄을 포기하고 굴욕을 견디는 날을 겪지 않아도 될까. 현실은 제 몫을 챙기려 아등바등해도 죽을 때까지 일을 구하려 다녀야하는 것에 가깝다. 아버지와 완전히 다른 삶을 결심했지만, 다르게 살고 있지만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 평범한 삶을 위해 나는 먼저 뒤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돌아보지 말아야 하고 눈감아야 하고 입다물어야 하고 고래를 처박고 견뎌야 하고 자신이 견딘다는 사실마저 깨끗이 잊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잊어야 하는가."

180p.

 

잊고 또 잊을 때, 우리여도 안 되고 각자여도 안 된다는 절망적인 사실을 잊을 때 평범한 삶은 가능하다. 건물 지하의 더럽고 습한 방에서 우두커니 삶을 살아내는 노인을 보지 않으려 할 때, 승마 학교를 다니는 사장의 손주 이야기를 애써 무시할 때, 조금이라도 높은 자리에 오른 각자가 다른 각자를 짓밟는 것을 외면할 때 내 삶이 평범하다고 믿을 수 있다. 잊을 줄도 모르고 각자의 비명도 외면하지 못하는 화자는, 이미 우리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기억하는, ‘민주주의 사명과 신념을 더 잘 이해하던 열 살의 여자아이가 아닌 , 회사를 그만둔다. 진주로 향한다. 아버지에게로, 그 시절 그곳에 있던 어머니와 에게로.

 

빛은 잘 듭니까.

바람은 잘 불어옵니까.”

268p.

 

사방이 어둠이었던 반지하 방에서 물었던 그 말을, 아버지에게 전한다. 민주화라는 대의에 한몸을 바치는 이에게도, 개인의 삶을 손에 쥐려 발버둥치는 이에게도 빛이, 바람이 있어야 한다. ‘는 자신의 안부를 묻듯, 삶과 세상의 안부를 묻듯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다. 당신이 지금 있는 그곳은, 내가 있는 이곳과 다릅니까.

 

붙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붙잡을 수 없는 뒷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끝까지, 뒤돌아보지 않는 사람.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272p.

 

붙잡을 수 없는 뒷모습을 한 사람을, ‘는 알고 있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를 그릴 수 있다. 그릴 수 있도록 오래 생각해왔다. 오래, 보이지 않는 그를 바라봤다.

 

다만 나는 붙잡을 수 없는 뒷모습을 한 그의 이야기보다, 아버지와 아버지들의 이야기보다 그 뒷모습을 알아보는 와 어머니의 이야기가 보였다. 그의 뒤를 묵묵히 지키고 서서 하염없이 그의 등을 바라보는 애처롭지만, 꿋꿋한 이야기를. ‘와 그녀들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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