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휴머니즘 - 디지털 시대의 인간회복 선언 AcornLoft
재론 레이니어 지음, 김상현 옮김 / 에이콘출판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디지털 휴머니즘] 재론 레이니어 저, 김상현(@pr1vacy) 옮김, 에이콘출판


   한마디로 아주 재미있다. 물론 주관적이다. IT의 역사나 그 기술에 대한 이해나 경험이 별로 없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매우 어려운 책이다. 그래서 일반일들에게는 그닥 권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최근의 인터넷 현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필독서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통칭 웹2.0 또는 '집단지성', '클라우드 컴퓨팅'등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지평이라고, 장미빛 미래로 표현되는 통념들에 대해 '제대로 보라'고 망치를 두드린다. 저자는 지금의 디지털 문화가 오히려 반휴머니즘 적 폐혜를 매우 심각하게 끼치고 있다고 말한다. 극단적으로 파시즘같은 전체주의 해악과 비슷하다고 본다. 인간의 고유한 창조성과 다양성을 억압하고 따라서 '인간다움'으로부터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나름 애정을 가지고 대안을 고민하고 있으면서도.


디지털화는 인간의 창의성을 위축시킨다


  저자 재론 레이니어(1960)는 컴퓨터 가상 현실(Virtual Reality)분야의 선구자인 컴퓨터 과학자이면서 작곡가이자 비주얼 아티스트라고 한다. 그의 이러한 독특하고 다양한 경력이 그의 글을 흥미롭게 만든다. 1982년에 처음 정의된 미디 MIDI (Musical Instrument Digital Interface)의 사례를 통해 디지털화가 어떻게 팝음악의 창의성을 약화시켰는가 보여준다. MIDI는 전자 악기들 사이에 상호 통신하는 일종의 규약을 의미한다. 초창기 미디를 창안하게 된 배경은 신디사이저들 사이를 연결해 한대의 키보드로도 '거대한 소리의 팔레트'를 만들기 위한 의도였다. 그런데 미디는 사람이나 섹소폰 연주자들이 내는 굴곡지고 가변적인 소리를 담아내지 못한다. 애초 풍부한 소리를 담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후 미디는 모든 전자음악의 표준이 되었고 이제 대부분의 팝음악은 미디 없이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듯 불완전하고 불철저한 규약이 너무 널리 퍼져 더이상 폐지할 수도 개선하기도 어려운 현상, 즉 록인(Lock-in)된 상태가 된 것이다.  모든 음악행위는 어느새 이러한 미디를 전제로 삼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지배룰이 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척박함 때문에 미디가 보편화된 이후로 팝에 새로운 사조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고 본다. 가장 최근의 것이 힙합인데 이 힙합은 미디가 지배적이기 되기전에 형성된 음악 장르라는 것이다. 


 이러한 디지털화에 의한 창의성의 문제는 비단 미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컴퓨터는 이미 모든 인간 생활의 필수부분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현재 사용되는 거의 모든 컴퓨터시스템이 사용하는 구조인 '파일'시스템도 너무도 지배적이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파일시스템은 컴퓨터 역사 초기 제안된 다소 문제를 안고 있는 체계의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은 이 '파일'이라는 아이디어가 거의 모든 사고행위의 단위가 되었다. " '파일'로 표현된 아이디어는, 사람의 표현이 마치 나뭇가지에 붙은 잎처럼 정리될 수 있고 분리 가능한 덩어리'라는 개념"을 전제로 한다. 인간의 사고 방식과 표현이 저런 틀 속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  영어가 사실상의 표준어라고 해서 한국도 중국도 일본도 공용어를 영어로 사용하고 자국어가 몰락한다면 영어라는 문법에 지배된 문화만 전세계에 존재할 것이고 각 국가의 고유한 문화는 점점 사라지거나 약화될 것이다. 이러한 천편일률성이 다양성과 풍부함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집단지성과 클라우드 컴퓨팅


저자는 소위 '집단지성(Collective Wisdom 또는 Collective Intelligence)에 대한 과도하고 근거없는 '찬양'을 혐오한다. 소위 집단지성의 힘으로 인류가 수십년동안 새롭게 만든 것이 겨우 위키피디아 정도 말고 무었이 있단 말인가라고 그는 묻는다. 그 위키피디아 조차 그닥 탁월한 창조물도 아니다. 백과사전하나 대치한 것, 그것도 언제든지 오류를 담고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정교한 나름의 통제가 없다면 만들어 질 수도 유지될 수도 없다. 


그는 인터넷 초기 '익명성'을 허용한 웹의 설계가 심각한 오류였다고 말한다. 결국 사회 문제화한 악성댓글에서 보듯 인터넷은 여러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심지어는 테러조직의 은신처이자 조직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인터넷의 이 익명성의 구조가 '착한'사람들도 얼마든지 '악할 수도 있게' 유도하는 기제가 된 것이다. 


인터넷의 익명성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야기시킨다. 즉 인터넷내에서 '개인'이 사라지게 되고 그들의 활동의 집합이 칭송되게 되면서 마치 '인간'을 벗어나 어떤 '절대자'가 새로이 등장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각 개체 스스로는 아무런 의식없이 하는 행동이 집단적으로는 고도로 조직화된 벌집을 보는 듯 하다. 사회철학적 용어인 '집단지성'의 기술적 현실태는 클라우드 컴퓨팅(Cloud Computing)이다. 어디에 있는지, 어딘지 모르는 구름(cloud)속 너머 그 어딘가에 절대자와 같은 모습으로 '집단지성'이 존재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기 시작했다. 와이어드 잡지를 만든 케빈 켈리는 클라우드 컴퓨팅의 발전에 따라 궁극적으로 지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기계(The Big Machine)로 발전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은 하나의 단말기(terminal)에 불과하다. 절대자인 기계에게 모든 정보를 모아주는 촉수일 뿐이다. 창조적이고 위대한 계산과 창조는 집단지성, 빅 머신이 행하는 방법일 뿐이다. 인간은 거기에 종속된, 절대자가 만들어준 그 무엇을 즐기고 향유하는 피동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빅 브라더를 연상시키는 파시즘이나 전체주의, 디지털 마오이즘의 시대로 표현한다. 


롱테일과 소셜네트웍


저자는 롱테일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신화처럼 운위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실제 롱테일에서 주목받거나 일정 수준이상, 먹고살수 있는 꼬리가 얼마나 있는가?  완전 디지털화되어 있는 컨텐트 비지니스 영역이 아니면 롱테일 경제학이 잘 적용되지도 않는다. 롱테일의 신화위에서 살찌는 자는 그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랫폼 사업자들 뿐이다.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네트웍에 대한 비판은 더욱 신랄하다. 소셜네트웍서비스는 프라이버시에 대해 가능한 최대로 무시한다. 더우기 사용자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한 상태에서 또는 동의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개인은 물론 그들 사이의 귀중한 관계 정보를 상업화하고 이용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기업이다. 반면 사용자인 인간은 마치 모두가 정치인처럼 평판을 끊임없이 관리한다. 친구관계에 대한 정의를 바꾸고 결국 '관념적 인간이 실체로써의 인간을 가린다.' '위선은 보상받고 진정성은 평생의 흠집을 남긴다.' 그리고 진실은 '사람들 사이에서 소통되는 것이 결국 진실이 된다' 


후(後) 기호적 소통  (Post Symbolic Communication)


저자 재론 레이니어의 디지털과 인터넷 문화에 대한 비판은 혹독하다. 그러나 그가 항상 디스토피아만을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컴퓨팅 파워의 엄청난 성장이 귀납적이고 통계적인 방법으로 언어와 음성을 인식하고 사람의 얼굴을 구별하는 등의 발전이 인간에게 가져다줄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서도 주목한다. 가상현실의 전문가로써 그는 인간의 언어적 소통을 넘어선 감각적 소통을 연구한다. 후기호적 소통(post symbolic communication)이라고 그가 명명한 새로운 발전을 통해 그는 '권력의 획득 대신 소통의 깊이를 더욱 심화'시키는데 관심을 가진다. 이로써 디지털 기술에 의해 사라져가는 휴머니즘을 되살리는 데 긍극적인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는다. 


개인을 바탕으로한 절대자에 대한 경계


디지털 문화의 발전을 긍정적으로, 심지어 돈벌이 기회로 간주하고 소개하는 책들은 많다. 악성 댓글에 대한 피혜 등이 논의 되지만 적어도 이 업계에서는 모든 걸 긍정적으로 간주한다. 오히려 인터넷 실명제, 규제 등 정부의 실책에 대한 비판론은 높고 어떻게든 미국식 디지털 상품과 문화의 생산과 소비를 강화시켜야 한다는 논지가 주류이다. 이러한 풍토에서 재론 레이니어와 같은 비판적 입장이 소개된 것은 참으로 긍정적이라 본다. 착목해야할 지점들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케빈 켈리 등 미국에서 주로 논의되는 집단지성이나 클라우드 컴퓨팅에 대한 재론 레이니어 같은 비판의 궁극적 플롯은 대개 한가지다. 그것이 '절대적 신'으로 추상화 되고 그에 따라 개별 인간은 두려움을 느낀다. 그것이 인간성을 억압하는 형태이던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던. 이러한 비판 구조는 서양 근대 정신의 한계다. 중세 종교와의 투쟁이나 파시즘과 전체주의에 대한 개인의 승리를 지키고자 했던 그들의 역사적 노력과 닮아 있다. 


추상적 절대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연결된 현실적 인간들의 공감과 연대


하지만 디지털이 만든 속도와 연결, 기록과 편재를 특성으로 하는 인터넷 시대에 구름 속에 존재하는 절대자에 대한 두려움은 잘 못 짚은 것이다. 인터넷의 발달을 감각의 확장으로 파악하는 것은 피상적이고 도구적 진단이다. 깊어지고 넒어지는 관계의 망은 감각의 확장에 그치지 않으며 인격을 그만큼 확장해 나간다. 사회적 존재인 사람의 인격은 각 개인을 중심으로 세계를 구성한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인간의 수 만큼이나 많은 네트워크의 중심이 생긴 것이고 그것들은 중첩되고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그속에서 인간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인격을 확장시킨다. 사람과의 연계가 넓어지고 깊어진다는 것은  공감하고 공존하는 관계망을 충분히 예견하게 한다. 넓어지는 인간 관계가 진리를 가리고 연결을 약화시키는 권력의 지배와 탈 인간성이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부분적으로 제기되는 해악은 통제되고 조절되어져야할 현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저 멀리 아프리카 차 농장에서 일하는 어린 일꾼도 내 옆에 있고 남미 어느 플랜테이션에서 커피 농사를 짓는 농사꾼도 이웃이다. 리비아에서 총을 들고 전투를 벌이는 그 누군가와 80년 광주를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걸 보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 대상으로서의 인간들은 어떤 절대자도 억압자도 아니다. 지구촌이라는 단어가 주는 낭만성을 경계한다해서 지구촌을 두려워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추상적 절대자로부터의 자유를 외치는 두려움 속의 개인이 아니라 현실 속 독재자나 억압자로 부터의 공감과 연대를 통한 자유를 추구할 뿐이다. 인터넷이 여는 세상은 그렇게 진화해 나갈 것이다. 물론 절대화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한 경계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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