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방 연구실 조교가 전화 받으라고 찾는다.
근 일년만의 그녀 목소리다.

나 보고 싶었지?
응.
이따 거기 갈까?
응.
나랑 오늘 잘래?
임신할꺼지?
웅.
내년 이맘때 애 업고 와서 책임지라 그럴거지?
웅.
맘 대로 해.
그럼 잘 있어. 행복해야 되.
응.


여전히 나는 진심만을 말하고, 여전히 그녀는 말장난만 한다.
혹은 그 반대인지도.
혹은 서로 진심만을 말하고 있었는지도.
이제는 희미한 사실관계만 남아있고 나조차도 제삼자로 변해버린 따사한 가을햇빛의 나날들이다.


어떤 사람은 좀처럼 격렬해 지지 않으며 갈등도 없으며 의심도 갖지 않으며 신뢰는 자연스럽게 두터워진다.
첫만남, 첫데이트, 첫,첫,첫.... 으로 이어지는 낭만적인 기억조차 재빠르게 퇴색된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도, 섹스가 없어도,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서서히 너무나 느리게 타들어가며 느리게 발전하며 느리게 변하며 너무나 오랫동안 이어진다.

무관심과 오해의 위장막 밑에 숨어 있는 그런 사람을 알아보는 건 역시 쉬운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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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9-09-25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데이트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인지 과연 남자와 데이트하는 나를 상상할 수도 없군요. 데이트라...

하날리 2009-09-27 23:24   좋아요 0 | URL
극한의 신비주의 전략이시군요?

Joule 2009-10-08 16:24   좋아요 0 | URL
아니, 그게... 모든 남자를 다 술집에서 술 마시면서 만나는 바람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