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
윤혁 지음 / 조은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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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삶을 껴안고 ‘그 후’를 견디는
우리 모두를 향한 레퀴엠

살다 보면 삶이 거대한 균열을 일으키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궤도로 진입하는 순간이 있다.
윤혁의 소설집 『그 후로』는 그 결정적 ‘사건’의 자극적인 드라마에 집중하는 대신, 먼지가 가라앉은 뒤 남겨진 폐허를 묵묵히 쓸어내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비춘다.
새해 선물이라며 친구가 보내준 이 소설을 읽고 독자로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소설들이 우리가 일상에서 외면하고 싶었던 ‘기억의 부채’와 ‘윤리적 책임’을 가장 낮은 체온으로 어루만지고 있다는 점이다.

  수록된 12편의 단편은 하나같이 아프고 서늘하다. 표제작 「그 후로」가 빼앗긴 25년이라는 세월 앞에서 언어를 되찾으려는 처절한 저항을 보여준다면, 「오란의 자손들」은 가문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구조적 폭력이 어떻게 여성과 후손들의 삶에 대물림되는지를 서늘하게 파헤친다. 특히 「괜찮아질 시간」에서 죽은 연인의 SNS 계정이 AI에 의해 기계적으로 복원되는 장면은, 애도마저 기술 시스템에 박제되는 현대 사회의 비정함을 날카롭게 찔러내어 한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하게 했다.

  작가의 문장은 화려한 수식 없이 건조하지만, 그 여백에는 차마 말로 다 하지 못한 생의 빈 곳들이 가득 차 있다. 본문 중 “누군가의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 곧 한 인간의 삶을 다시 증언하는 일”이라는 구절처럼, 소설 속 인물들은 사진을 복원하고(「손님」), 끝내 전하지 못한 인사를 건네며(「안녕의 온도」) 무너진 구조 속에서 개인의 도덕적 무게를 감당해낸다. 이는 시스템이 기억하기를 포기했을 때, 오직 ‘남겨진 개인’만이 할 수 있는 가장 고독하고도 숭고한 응답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재난과 배신, 혹은 일상의 단절 이후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어떤 글을 써 내려갈수 있느냐고 묻고있다 『그 후로』는 비극을 감상적으로 소비하지 않았다. 대신 무너진 채로도 버텨내야 하는 삶의 엄중함을 조용히 증언했다. 삶의 어느 모퉁이에서 길을 잃고 “그 후로…”라는 말 뒤에 마침표를 찍지 못한 모든 이들에게, 이 소설집은 차갑지만 단단한 위로의 지팡이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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