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 에피소드(21)

사담 후세인이 체포되었다는 것이 어제오늘의 톱뉴스이다(*이 글은 2003년 12월 중순에 씌어졌다). 부시가 재선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어제 문득 들었지만(*예감은 언제나 실현된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체포되는니(우리의 KAL기 사건처럼 타이밍을 맞춰서), 미리 체포되는 게 낫다는 생각도 해본다. 어차피 곧 연말이니까 두주쯤 지나면 잊혀질 것이다. 아니다! 그에 대한 재판이 남아있다!...

 

 

 



연말연시는 비교적 좋은 책들이 나오는 계절이다. 주머니가 좀 넉넉해지는 시기인 만큼 (실제적인 통계는 갖고 있지 않지만) 책에 대한 소비도 다소 헤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눈길이 가는 책들이 많이 나왔고, 책 소개의 주기도 빨라졌다.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건(가장 먼저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케밀 파야의 <성의 페르소나>(예경)이다. 지난주 한겨레 서평에서 가장 크게 다루어진 책이다.

원제는 'Sexual Personae'(1990)이고, 번역서의 분량이 916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이다(원서도 718쪽에 이른다). 지난주 구내서점에 포장된 채로 들어왔길래 무슨 책인가 궁금했었는데, 알고 보니 학교 도서관에서 자주 보던, 다소 싸구려틱한(!) 표지의 책이었다. 인터넷교보에 자세히 소개가 되어 있고, 몇 군데에서 신간리뷰로 다루기도 했으니까 찾아보시면 될 듯하다.

한겨레 고명섭 기자에 의하면 "서구 문화의 역사를 바로 이 3중의 이분법으로, 다시 말해 디오니소스=자연=여성 대 아폴론=문명=남성의 대립으로 이해함으로써 논란을 불러일으킨 책이다." 논란만 불러일으켰다면, 그저 호사가적 관심거리만 될 터이지만, 내가 제임슨의 신간과 함께 이 책을 주문한 것은(내일쯤 책을 받아봐야 내용을 알 수 있을 거 같다), 해롤드 블룸의 추천사 때문이다. 그는 이 책이 말의 좋은 의미에서 '센세이션Sensation'이며, 이에 비견할 만한 책이 없다는 호평을 하고 있다. 나는 거물들의 그런 말에 잘 넘어간다.

 

 

 



두번째 책은 민음사에서 나오는 '일본의 현대지성' 시리즈의 7번째 책인 나카무라 유지로의 <공통감각론>이다(*<문화의 두 얼굴>, <근대초극론> 등도 이 시리즈의 책들이다). 어제 영풍문고에 들렀을 때에도 실물은 보지 못했지만, 이 시리즈의 책은 모두 읽을 만하다는 경험적 판단에 근거하여 추천할 수 있다. 알라딘의 소개글에 의하면, "이 책은 커먼 센스 commom senses, 상식, 공통감각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네덜란드의 화가 에스헤르, 초현실주의자 마그리리트 등의 회화론, 지각 심리학의 역전 시야에 대한 지각 문제, 그리고 데카르트파 언어학과 촘스키의 생성문법의 이론까지, 심지어 베르그송의 기억의 문제까지 논의를 확대시키고 있다." 저자는 바슐라르, 푸코 등을 일어로 번역한 바 있는 일본의 중진학자이고, 역자는 마루야마 게이자부로의 <존재와 언어>(민음사)를 번역했던 고동호 교수이다.

 

 

 

 

세번째 책은 박홍규 교수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우물이있는집)이다. 이쯤되면 박교수의 놀랄 만한 생산력에 경탄을 금할 수 없는데, <오리엔탈리즘>의 역자이기도 한 그가 올 한해 (번역서를 제외하고) 낸 책들은 내가 기억하는 것으로 모두 7권이다. 이전에도 그런 얘기를 한 듯하지만, 이에 견줄 만한 글쓰기의 생산성이라면, 강준만 정도를 꼽을 수 있을 뿐이다. 사실, 두 사람의 글은 스피디하게 읽힌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어쨌든 지난번에 타계한 에드워드 사이드를 추모하는 저작 한권 정도는 서가에 꽂아둘 만하다(*다른 입문서로는 2005년에 나온 <다시 에드워드 사이드를 위하여>가 있다). 굳이, 박교수의 흠을 덧붙여 지적하자면, 교정이 섬세하지 않다는 것. 하긴 우리 출판계에서 교정이 잘 돼 있는 책을 손에 꼽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네번째 책은 남미문학의 거장인 페루 작가 바르가스 요사(Llosa)의 <세상종말전쟁>(새물결)이다. 나는 그의 책 가운데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문학동네, 초역판은 다른 제목이었다)를 부분적으로 읽고, '대단한 구라'라는 생각을 한 바 있는데, 이번에 나온 신간은 그의 최고작이라고 한다. 당연히 한번쯤 읽어봄 직하지 않은가. 아마도 올해 번역돼 나온 남미문학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이지 않나 싶다. 우리에게 알려진 작가들 가운데는 가브리엘 마르케스나 카를로스 푸엔테스 정도가 그와 견줄만한 생존작가들이다.

 

 

 


다섯번째 책은 프란스 드 왈의 <보노보>(새물결)이다. 보노보에 대한 화보들이 실려 있는(그래서 책값이 256쪽에 35,000원이다) 이 생태 연구서는 제인 구달의 말을 빌면 "이 4번째 거대 유인원의 진가를 세상에 알려줄 책"이다. 4대 유인원이란,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그리고 덩치가 작아서 '피그미침팬지'라고도 불리는 이 보노보를 말한다.

내가 보노보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건, 인류학자 리처드 랭햄(하버드대 교수)과 과학저술가 데일 피터슨의 <악마 같은 남성>(사이언스북스, 1998)에서였다. 거기서 야만적인 폭력성을 드러내는 다른 가부장적 영장류들과 달리 보노보는 온화한 가모장적 사회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소개되었다. 요컨대, 우리의 '오래된 미래'가 거기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 보노보에 대한 드문 연구소개서인 만큼 관심을 둘 만하다.

참고로, 보노보는 동성애도 즐기는 프리섹스주의자들이라고. 저자인 영장류 학자 드 왈은 <정치하는 원숭이: 침팬지의 정치와 성>(동풍, 1995)의 저자이기도 하다(*이 책은 <침팬지 폴리틱스>로 다시 나왔다. 드 왈(드 발)의 최신간은 작년 12월에 나온 <내 안의 유인원>이다).

이 책들을 언제 다 읽을 것인가?!...

2003.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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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감각의 박물학 > 누군 행복해서 행복하냐?

누군 행복해서 행복하냐?
행복은 의무다
예외는 없다
행복하자
하라구

 
 

 
 
 
 
Beck의 Sex Laws는 올해 만난 수작
모처럼의 경쾌발랄, 우울아 썩 꺼져라
내 몸은 너희들이 거처할 장소가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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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감각의 박물학 > 성숙이란 혼돈을 견디는 힘의 증가

이분법은 인간이 즐겨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이다. 음과 양, 주체와 객체, 플러스와 마이너스, 선과 악, 정신과 육체, 분석과 직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등 2항 대립 칸막이들의 무수한 증식에 의해서 세계는 비로소 질서라는 이름 아래 포섭된다. 그러나 질서는 무수한 개별자들의 희생 위에서 세워진다. 칼금을 긋듯 딱 잘라 구분해버릴 수 없는 세계의 다양성 앞에서 인간은 현기증을 느끼게 마련이다. 어떤 식으로든 구획정리를 하겠다는, 그리하여 세상의 어지러움을 어떤 식으로라든 이겨내야겠다는 인간의 강박관념이 무수한 이분법을 만들어 냈으리라.

그러나 얼마나 많은 선지식들이 불이(不二)를 설파하였던가. 만법귀일(萬法歸一), 결국은 하나라는 말씀이시지만 어디 현실이 그런가. 나는 여전히 나이고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다. 새는 창 밖으로 날아가고 나무는 가지를 출렁여 그 새의 흔적을 말해줄 뿐. 하나라고 생각하기 십상인 '나'만 해도 그렇다. '가시나무새'가 아니더라도 내 속엔 내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나는, 그 많은 '나' 중에서 아주 그럴싸한 나를 선택해서 나이고 싶어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그런 나를 유일한 나로서 승인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나'라는 간판을 내걸고 드러내고 싶은 '나'는 결국 무수한 '나'의 억압을 전제로 해서 태어난다. 하나의 음성과 칼라로 수렴되는 '나'일 때 비로소 나는 안도한다. 하지만 억압했던 '나'는 언젠가 기필코 돌아온다. 누르면 누를수록 그것은 더 맹렬한 분출의 힘으로 나를 압도한다. 억압하고 싶어했던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나는 타인의 얼굴에서 본다. 나는 그를 비난함으로써 맹렬하게 분출하는 어두운 '나'를 억압한다.

나서기를 좋아하는 어떤 후배에 대한 나의 비난도 그런 성질의 것이었으리라. 누군가의 앞에 나서고 싶은 자기현시의 욕망이 내 안에 음험하게 도사리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 후배를 비난함으로써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억압하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타인의 모습 속에서 읽어낸, 저 천박하기 그지없는 '나'를 껴안음으로써 세계에 대한 적의를 누그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도덕을 껴안아 포옹하지 못하는 '도덕만을 위한 도덕'의 표정은 매서우리만치 비정하다. 그렇다면 내 아내에게서도 현숙(賢淑)만을 강요할 일이 아니다. 약간의 퇴폐가 그녀를 아름답게 할지도 모를 일. 세계의 이중성을 용납하지 않는 결벽주의, 일절의 퇴폐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순수주의는 파시즘으로 표정을 바꿀 위험이 충분히 있다.

성숙이란 혼돈을 견디는 힘의 증가가 아니던가. 내 안의 드라큘라, 내 안의 콰지모도, 내 안의 그림자를 또 다른 나로서 인정하는 데엔 관용의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미성년은 말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니라고. 그러나 부인한다고 해서, 억누른다고 해서 내 안의 괴물이 고분고분해지는 것은 아니다. 억누르고 참아내는 인내는 결국 신경증을 부를 뿐이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7인의 사무라이'를 미국식으로 리바이벌한 영화, '황야의 7인 The magnificient Seven'에서 총잡이로 분한 찰스 브론슨은 '겁장이가 전장터 한 가운데로 스미는 법'이라는 의미심장한 화두 하나를 던진다. 그러나 내 안의 겁장이를 부인하지 않고 의식하는 나는 쉽사리 만용의 총부리를 타인의 심장에 겨누지 않을 것이다. '완전히 음울한 인간 곁에는 반드시 그에게 예속되어 있는 밝은 영혼이 있게 마련이다'라고 니체는 말했다. 어떻든 내 아내와 내 벗들과 나의 모순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리라. 정토(淨土)와 예토(穢土)가 둘이 아니고 승(僧)과 속(俗)이 둘이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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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감각의 박물학 > 지중해, 따스한 햇살이 술처럼 목젖을 적시는 땅
작가수첩 1 알베르 카뮈 전집 11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8년 10월
평점 :
품절



지중해, 따스한 햇살이 술처럼 목젖을 적시는 땅


 “지중해의 따뜻한 가슴, 프로방스는 완전히 절망한 사람이 올 곳은 아니다. 오직 행복한 자,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이도 이 땅 위에 태어난 것이 기뻐지는 자들만이 올 곳이다. 아니 적어도 많은 절망의 한구석에 아직 저 필사의 모든 생명들이 공유하는 생명의 행복감, 우리들의 건강한 육체가, 죄없는 육체가 아는 행복감의 씨앗을 아직 죽이지 않은 자들만이 올 일이다.” 라고 김화영은 그의 아름다운 산문집, 『행복의 충격』에서 말하고 있다. 나는 대책없이 그런 구절에 매혹되었다. 한 점 그늘도 없는 유쾌한 낙천주의, 이십대의 내겐 지중해의 정신은 그런 것이었다. 알베르트 까뮈는 『작가수첩』에서 풍부한 아포리즘으로 지중해의 정신을 엄호했다. “천재는 일종의 건강한 상태이며 고등한 스타일이며 유쾌한 기분이다-그러나 찢어질 듯한 아픔의 극치이다.”라는 구절은 니체를 연상시켰지만 까뮈는 누구의 아들도 아닌 지중해의 아들, 행복의 전령사였다. “무겁기 때문에 그만큼 더 가벼운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술의 핵심이다”라는 구절엔 까뮈의 오만함이 묻어 있지만 그 구절은 아주 유쾌하게 유머의 정신을 구현해주고 있었다. 얼마나 무거워야 새털처럼 가벼운 질량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 가브리엘 살바토레의 영화, ‘지중해’는 새털처럼 가벼운 영화다. 무겁기 때문에 가벼운.


 살바토레는 ‘도피를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침’이란 문구를 내걸었다. 도피란 중력에의 저항이 아닌가. 잡아끄는 모든 구속의 힘으로부터의 일탈이 아닌가. 그 일탈의 땅이 ‘지중해’다. 햇볕에 마음껏 이마를 적시며 무겁고 우울한 외피를 벗어버려도 좋다. 태양의 기총소사에 속진(俗塵)일랑 말끔히 샤워해버려도 좋다. 늠실대는 그랑블루의 바다를 보면 인생은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다. 이런 곳에선 축구가 제격이다. 차고 달리고 내지르면 그만이다. 엄숙한 얼굴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까뮈의 『작가수첩』이다. “ 티파사의 아침에 폐허 위로 맺히는 이슬,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것 위에 가장 젊고 싱싱한 것, 이것이 나의 신앙이고 또 내 생각으로는 예술과 삶의 원칙이다.”


 가장 젊고, 가장 싱싱한 것들을 위해선 한 잔의 따뜻한 술이 필요하다. 뜨겁게 목젖을 넘어오는 그 무엇, 젊음이란 연소할 수 있는 힘, 탕진할 수 있는 힘이 아니면 무엇인가. 술 한 잔에서마저도 굳이 교훈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지중해’엔 더운 몸이 부르는 육체가 있다. 염소들을 몰고 절벽을 오르는 처녀의 육체, 거기엔 문명의 때가 없다. 무구하고 순수하다. 전쟁의 기억도 없다. 시시덕거리며 바다로 풍덩 뛰어드는 몸의 순수한 유희가 있는 곳, 영화 ‘지중해’는 그런 곳이다. 얼쑤 하는 추임새가 필요하다면 까뮈의 책을 열면 된다. 『결혼, 여름』, 『태양의 후예』, 『작가수첩』이 그것. 이 책들을 열면 지중해의 햇볕이 가득하다. 바람이 갈피를 열어주는 곳, 어떤 페이지든 게으르게 듬성듬성 읽어도 좋다.


 ‘지중해’는 혁명가의 땅이 아니다. 애국자의 땅도 아니다. 패잔병의 땅, 탈영병의 땅, 도피자의 땅, 노새를 적으로 오인해 쏘아 버리는 오합지졸의 땅이다. 축구와 태양과 그랑블루의 땅, 염소의 수염이 하얗게 널어놓은 빨래처럼 날리는 땅이다. 계율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는 곳에서 창녀는 사랑스런 애인일 뿐이다. ‘지중해’는 그런 곳이다. 그곳은 임무의 땅이 아니라 도피의 땅, off-duty, 휴가의 땅이다. ‘지중해’는 '통신기‘가 운 좋게 박살나는 땅이다. 명령이나 하달하는 통신기란 축제의 땅에선 쓸모 없는 퇴물이다. 이런 통신기가 고장난 건 아주 다행한 일이다. 통신기가 먹통이 되었으니 이래라 저래라 하는 명령이 먹혀들지 않는 땅, ’지중해‘는 그런 곳이다. 까뮈는 다시 『작가수첩』에서 말한다. “자연풍경은 그 어떤 불의의 대가로 얻은 것이 아니어서 나의 마음은 그 속에서 자유롭다.” 그렇다. 지중해의 풍광 앞에서 술잔을 들며 중력의 법칙에 거슬러 볼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휴가나 축제도 한번쯤은 있어야 한다. 술과 함께, 살바토레와 함께. 모래 바람이 책의 갈피를 열어주는 까뮈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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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감각의 박물학 > 프로방스, 행복의 충격
나의 프로방스
피터 메일 지음, 강주헌 옮김 / 효형출판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Sunny Stream-노무라 소지로 

프로방스, 행복의 충격
 

프로방스, 하면 떠오르는 구절이 있다. ‘지중해의 따뜻한 가슴, 프로방스는 완전히 절망한 사람이 올 곳은 아니다. 오직 행복한 자,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이도 이 땅 위에 태어난 것이 기뻐지는 자들만이 올 곳이다.’ 김화영의 아름다운 에세이『행복의 충격』없이 나는 나의 이십대를 말할 수 없다. 김화영의 번역물과 그의 에세이를 읽는 것만으로도 나의 이십대는 충분히 유의미했다.
 
현실은 참으로 막막했다. 미래는 불안했고 시국은 어수선했다. 어디든 떠나고 싶었지만 주머니엔 먼지와 바람뿐이었다. 대체 어디에 마음을 놓아야 할까, 모든 것이 막연하기만 했다. 그럴 때 나는 김화영을 읽었고, 김화영이 번역한 까뮈와 바슐라르와 모디아노와 르끌레지오를 읽었다. 프로방스는 불안한 청춘의 망명지였다. 적어도 그곳에서만은 내 안의 습기들이 바삭 증발할 것만 같았다. 일찍이 세잔느가 화폭에 담았던 프로방스의 쎙 빅투아르산, 김화영의 표현대로라면 ‘메마르고 강직하고 비정한 고전의 감성을 그 물리적인 표정 속에 담고 있다’는 그곳에서라면 나는 일체의 수식을 떨구어버린 건조하고 강직한 정신으로 나의 청춘을 응시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 프로방스는 구체적인 지명이 아니었다. 그곳은 가난한 젊음이 꿈꾸었던 관념의 땅이었다.
 
현란한 수사학으로 김화영은 프로방스를 광고했다. “행복의 외침으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이 열려진 풍경, 전라(全裸)의 풍경 속에서, 나는 오직 어리둥절했을 뿐이었다.”라는 구절 앞에서 어찌 프로방스를 꿈꾸지 않겠는가. “모든 정경이 단단하고 메마르고 스러지지 않는 풍경을 만들고 있다”는 그곳에서 나의 젊음은 무언가를 보상받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일찍이 고호는 그의 가장 행복하고 비극적인 만년을 프로방스에서 보냈다. 김화영은 고호의 그림에 등장하는 소용돌이치는 태양이 프로방스를 만난 고호의 ‘행복의 충격’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누군들 그런 행복의 충격과 만나고 싶지 않을까.
 
미셀 투르니에의 산문집 『짧은 글 긴 침묵』의 한 구절에 나는 밑줄을 그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의 지중해 연안 지방을 <미디(Midi)>라는 이름으로 지칭하는 것은 절묘하다. 왜 미디인가? 그곳은 태양의 운행 곡선의 정점이요 태양이 그 정점을 음미하기 위하여 걸음을 멈춘다고 인간들이 즐겨 상상하는 바로 그 균형점이기 때문이다.” 태양이 그 정점을 음미하기 위해 걸음을 멈추는 곳에서 서있는 나를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이어지는 미셀 투르니에의 구절들. “지중해는 이것인 동시에 저것이다.” 오직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는 땅에서 이것이면서 저것일 수 있는 땅은 그 자체가 하나의 구원이었다. 왜 그것이어야만 하는가, 왜 이것이면서 저것이면 안 되는가. 시대는 엄혹했다. 이념은 발랄한 생의 약동으로서의 웃음을 몰랐고, 도덕은 일탈과 광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시대의 엄숙주의는 무겁게 삶을 압도했다. 그럴 때 지중해는 먼 곳에서 아득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는 우리는 우리의 땅에서 치고 받고 아옹다옹거릴 수밖에 없었다.
 
『나의 프로방스』라는 책을 나의 눈이 간과할 리가 없었다. 책장의 띠지에는 아름다운 사진이 있다. 사진 속에는 파란 하늘과 시프레나무를 배경으로 집 한 채. 뜰에는 가득한 보랏빛 제비꽃. 저곳은 얼마나 고즈넉한가. 책 속에는 수많은 수채화들이 들어있었다. 순진무구한 프로방스의 풍광들, 잘 구어진 빵과 포도주가 화사한 느낌의 수채화로 그려져 있다. 그 느낌이 얼마나 신선한지, 책도 이렇게 감각적일 수 있구나 하는 작은 감탄마저 인다.
 
피터 메일의 『나의 프로방스』는 현학적인 책이 아니다. 그 속에는 고호도 없고 르네 샤르나 알퐁스 도데도 없다. 루르마렝에 있다는 카뮈의 묘지도 언급되지 않는다.  장 그르니에는 『지중해의 영감』에서 “이 고장은 너무나 잘 빚어져서 장인(匠人)인 신의 작품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라고 말하고 있지만 피터 메일의 책에는 현란한 수사학도 없다.
 
그의 책에는 그림 같은 바다에서 혼자 빈둥대는 게으름이 있다. 그러므로 한참 바쁜 사람들은 피터 메일의 책을 붙잡지 말 일이다. “참으로 팔자 좋군” 빈정대는 한 마디로 남의 행복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너무도 가난한 자는 이 책을 읽을 것이 아니다. 피터 메일의 행복이 부러움을 넘어 고통스러운 질투로 느껴진다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의 책에는 프로방스 사람들의 당나귀 같은 고집이 있다. “자동차 한 대가 눈이 치워진 중앙선을 따라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오던 자동차와 마주치고 말았다. 두 자동차는 주둥이를 맞대고 멈춰 섰다. 하지만 누구도 후진해서 길을 양보하지 않았다. 길가로 붙이다가 자칫하면 눈더미에 처박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때문이었을까? 두 운전자는 앞 유리로 서로 노려보면서, 다른 자동차가 그들의 꽁무니에 붙어주길 기대하며 마냥 기다렸다. 그렇게 되면 ‘다수의 힘’에 따라 한 대인 자동차가 어쩔 수 없이 후진할 테니까 수적으로 우세한 쪽이 먼저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구절은 이 책의 문체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책에는 이렇게 소박한 문체에서 우러나는 유머가 있다. 그 유머는 피터 메일에게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면서 프로방스 사람들의 소박함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피터 메일은 영국과 미국에서 15년간 광고 카피라이터로 활동했단다. 광고 카피라이터가 어떤 일을 하는 자인가. 소비자들의 욕망을 분석하고 그들의 잠재적 욕망을 소비로 연결시키기 위해 온갖 첨단의 기법을 동원하는 자들이 아닌가. 그들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첨병이다. 광고인으로서 치열하고 분주하게 살아온 그였기에 햇살과 공기에 대한 갈망은 그만큼 더 컸을 것이다.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갈구하듯이 마을의 상점들과 포도밭을 찍은 사진을 보았으며, 침실 창을 통해 비스듬히 스며드는 햇살에 잠을 깨는 것을 꿈꾸기도 했다”는 피터 메일 부부는 충동적으로 프로방스에 집을 구매한다. 우리에게도 저 만큼의 충동은 필요하리라. 충동과 도발이 없이는 혁명도 없다. 오직 구질구질한 일상만이 있을 뿐이다.
 
그가 프로방스에 구매했다는 집은 나의 미의식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질투가 느껴졌다. “이 지역의 돌로 지은 그 집은 바람과 햇빛을 2백년 동안이나 견뎌온 탓에 옅은 꿀색도 아니고 옅은 회색도 아닌, 중간색으로 바래 있었다.......벽의 일부는 두께가 1미터나 되어 지중해의 미스트랄을 견딜 수 있게 지어졌다. ......우물이 세 군데 있었고, 그늘을 드리우려고 심은 나무들과 호리호리한 초록의 사이프러스들, 로즈메리 울타리, 커다란 아몬드 한 그루도 있었다. 그리고 오후 햇살에 졸린 눈꺼풀처럼 반쯤 닫힌 나무 덧문까지! 그 집은 우리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피터 메일을 사로잡은 집은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행복은 반드시 풍족한 물질에 깃드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저런 집에서는 행복이 더 잘 깃들 거라는 생각도 그다지 터무니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피터 메일의 책은 매우 감각적인 책이다. 그는 프로방스를 관념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면도날 같은 미스트랄 바람, 송로 버섯의 진미, 팔월의 염소 경주대회, 구월의 포도 수확, 그리고 십일월의 올리브기름 등 그의 책은 우리의 이성에 호소하기보다는 우리의 감각에 호소한다. 올리브유를 몇 방울 떨어뜨리고 토마토 과육을 살짝 바른 빵, 따뜻하게 데워 샐러드와 함께 먹는 거위간, 꿩과 산토끼, 파테와 치즈, 햄과 수탉, 양파빵, 마늘빵, 올리브빵, 양젖치즈빵, 포도주와 와인 등 수많은 음식으로 피터 메일은 전직 카피라이터답게 끊임없이 우리의 욕망을 부추긴다.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으로서가 아니라 프로방스에 집을 사고 그곳에 포도나무를 심고 이웃들과 한 식탁에서 음식을 먹는 피터 메일에게  부러움과 동경을 느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주저 없이 『나의 프로방스』를 권하겠다. 행복은 사치가 아니라 우리의 의무다.
 
“다른 곳이었다면, 조금이라도 완벽한 날씨가 아니었다면 암담한 심정이었겠지만 프로방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태양은 대단한 신경안정제였다. 아련한 행복감에 적어 시간은 흘렀다.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너무 즐거워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시간이 길게 천천히, 움직이지 않는 듯이 흘러가는 나날이었다.“
 
모든 살아 있는 자의 특권은 꿈꾸는 것이 아닌가. 오늘은 마음만이라도 당신이 그곳에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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