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감각의 박물학 > 성숙이란 혼돈을 견디는 힘의 증가

이분법은 인간이 즐겨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이다. 음과 양, 주체와 객체, 플러스와 마이너스, 선과 악, 정신과 육체, 분석과 직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등 2항 대립 칸막이들의 무수한 증식에 의해서 세계는 비로소 질서라는 이름 아래 포섭된다. 그러나 질서는 무수한 개별자들의 희생 위에서 세워진다. 칼금을 긋듯 딱 잘라 구분해버릴 수 없는 세계의 다양성 앞에서 인간은 현기증을 느끼게 마련이다. 어떤 식으로든 구획정리를 하겠다는, 그리하여 세상의 어지러움을 어떤 식으로라든 이겨내야겠다는 인간의 강박관념이 무수한 이분법을 만들어 냈으리라.

그러나 얼마나 많은 선지식들이 불이(不二)를 설파하였던가. 만법귀일(萬法歸一), 결국은 하나라는 말씀이시지만 어디 현실이 그런가. 나는 여전히 나이고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다. 새는 창 밖으로 날아가고 나무는 가지를 출렁여 그 새의 흔적을 말해줄 뿐. 하나라고 생각하기 십상인 '나'만 해도 그렇다. '가시나무새'가 아니더라도 내 속엔 내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나는, 그 많은 '나' 중에서 아주 그럴싸한 나를 선택해서 나이고 싶어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그런 나를 유일한 나로서 승인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나'라는 간판을 내걸고 드러내고 싶은 '나'는 결국 무수한 '나'의 억압을 전제로 해서 태어난다. 하나의 음성과 칼라로 수렴되는 '나'일 때 비로소 나는 안도한다. 하지만 억압했던 '나'는 언젠가 기필코 돌아온다. 누르면 누를수록 그것은 더 맹렬한 분출의 힘으로 나를 압도한다. 억압하고 싶어했던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나는 타인의 얼굴에서 본다. 나는 그를 비난함으로써 맹렬하게 분출하는 어두운 '나'를 억압한다.

나서기를 좋아하는 어떤 후배에 대한 나의 비난도 그런 성질의 것이었으리라. 누군가의 앞에 나서고 싶은 자기현시의 욕망이 내 안에 음험하게 도사리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 후배를 비난함으로써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억압하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타인의 모습 속에서 읽어낸, 저 천박하기 그지없는 '나'를 껴안음으로써 세계에 대한 적의를 누그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도덕을 껴안아 포옹하지 못하는 '도덕만을 위한 도덕'의 표정은 매서우리만치 비정하다. 그렇다면 내 아내에게서도 현숙(賢淑)만을 강요할 일이 아니다. 약간의 퇴폐가 그녀를 아름답게 할지도 모를 일. 세계의 이중성을 용납하지 않는 결벽주의, 일절의 퇴폐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순수주의는 파시즘으로 표정을 바꿀 위험이 충분히 있다.

성숙이란 혼돈을 견디는 힘의 증가가 아니던가. 내 안의 드라큘라, 내 안의 콰지모도, 내 안의 그림자를 또 다른 나로서 인정하는 데엔 관용의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미성년은 말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니라고. 그러나 부인한다고 해서, 억누른다고 해서 내 안의 괴물이 고분고분해지는 것은 아니다. 억누르고 참아내는 인내는 결국 신경증을 부를 뿐이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7인의 사무라이'를 미국식으로 리바이벌한 영화, '황야의 7인 The magnificient Seven'에서 총잡이로 분한 찰스 브론슨은 '겁장이가 전장터 한 가운데로 스미는 법'이라는 의미심장한 화두 하나를 던진다. 그러나 내 안의 겁장이를 부인하지 않고 의식하는 나는 쉽사리 만용의 총부리를 타인의 심장에 겨누지 않을 것이다. '완전히 음울한 인간 곁에는 반드시 그에게 예속되어 있는 밝은 영혼이 있게 마련이다'라고 니체는 말했다. 어떻든 내 아내와 내 벗들과 나의 모순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리라. 정토(淨土)와 예토(穢土)가 둘이 아니고 승(僧)과 속(俗)이 둘이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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