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83)

연휴를 앞두고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몇 권을 꼽아본다. 나로선 당장 연휴에 읽을 책들은 아니지만 한두 권 정도는 연휴에 구입할 계획이다. 개인적으로 일주일에 평균 5-60권의 도서정보를 처리하고 그 중 최소 10여 권을 구입하거나 복사한다. 절반 정도는 전공이나 관심사와 관련된 원서들이고 나머지 절반쯤이 우리말 책들인데, '최근에 나온 책들'은 그 가운데 특별히 눈에 띄거나 한번쯤 관련서들을 뒤적거려보고 싶은 책들에 속한다. 이번 경우엔 <로맹 가리>나 <도구적 이성비판>이 특별히 그러한 종류에 해당된다. 먼저 <로맹 가리>부터 시작해보자. 

 

 

 

 

도미니크 보나의 <로맹 가리>(문학동네, 2006)는 공쿠르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유일한 작가이자, 수수께끼 같은 작가 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에 관한 전기로 1987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전기부문 대상을 수상했다고 하는 만큼 신뢰할 만한 평전이다(보나의 책으론 <세 예술가의 연인>도 출간된 바 있다). 요컨대 "<자기 앞의 생>,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작가,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번갈아 소설을 발표하며 '매너리즘에 빠진 거장'과 '자유로운 영혼의 신인'이라는 두 페르소나를 연기했던 작가, 1980년 권총 자살로 생을 마치기까지 열정과 야망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소설가 로맹 가리의 66년 생애를 조명한다."

소개를 좀더 옮겨보면 "<로맹 가리>는 문학비평 기자이자 르노도 상 수상 작가인 도미니크 보나가, 저널리스트의 치밀함과 소설가의 감수성으로 쓴 평전이다. 프랑스 문학계를 뒤흔들었던 '아자르 사건'을 포함하여, 로맹 가리의 내면세계와 모든 작품과 창작의 배경,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린다. 화려한 성공을 꿈꾸는 한 가난한 소년의 열망이, 화려한 언변과 세련된 외모로 세계 외교 무대를 사로잡은 한 외교관의 카리스마가,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한 남자의 외로움이, 창조적 에너지를 마음껏 분출하고자 했던 한 작가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사실 내게 로맹 가리보다 더 친숙한 이름은 그의 가명이자 '또 다른 작가' 에밀 아자르이다. <자기 앞의 생>을 먼저 읽었기 때문이다(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의 여주인공도 내 기억에 로맹 가리의 광팬이었다). 

내가 책을 읽은 건 기억에 1990년 봄쯤이다. 나는 제대를 얼마 안 남겨두고 한 부대 관사의 당번병 방에서 뒹굴며 몇몇 소설들을 탐독했었는데, 파스칼 레네의 <레이스 뜨는 여자>와 함께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이 바로 <자기 앞의 생>이었다. 주인공 모모와 로자(로쟈가 아니다) 아줌마가 엮어가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 이후에 다시 읽은 적이 없으므로 작품에 대해 정확히 평하기는 어렵지만 여하튼 에밀 아자르란 이름을 기억하게 해주었고 이후에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까지 관심이 이어지도록 했다. 비록 <유럽의 교육>(책세상, 2003)은 구입해두지 않은 것이 지금 생각으론 다소 의아하지만. 아무튼 이번에 나온 전기를 읽다 보면 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란 한 작가(혹은 두 작가?)에 대해서 좀더 분명한 판단과 열정을 갖게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두번째 책은 역시나 평전으로 '과학지식인의 탄생'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폴 화이트의 <토머스 헉슬리>(사이언스북스, 2006)인데, 실상은 지난번에 다루어져야 할 책이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이월됐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헉슬리'란 성이다. 조금 견식이 있는 독자라면 이 '허슬리'가 여럿 된다는 것쯤은 상식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주로 <멋진 신세계>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가 잘 알려져 있는데, 헉슬리 가문을 일으켜세운 토머스 헉슬리(1825-1895)가 바로 올더스 헉슬리의 조부이다. 토마스의 또다른 손자인 생물학자 줄리안 헉슬리 경은 올더스의 형이고, 그들의 배다른 동생 앤드류 헉슬리는 노벨상 수상 과학자이다. 토머스 헉슬리는 '다윈의 불독'으로 불렸을 만큼 진화론의 강력한 옹호자로 유명한데, 이 '불독' 집안이 가히 지성의 명가인 것이다.

저자 화이트는 책에서 "19세기 과학계의 발전사와 '과학 지식인' 토머스 헉슬리의 삶을 다뤘다. 헉슬리가 신문, 잡지 등에 기고한 글과 부인 및 동료들과 나눈 서한 등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과학 및 과학자의 정체성을 확립시킨 토머스 헉슬리를 재조명한다. 좁게 정의되는 과학이 아닌, 다른 문화 영역들과 연결되는 실천방식으로서의 과학을 추구한 그의 삶을 세세하게 그려낸다... 책은 과학의 실천, 대중화, 변호 과정에서 헉슬리에 관련된 여러 자료를 통해,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한 사람의 '과학 지식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추적한다. 따라서 오늘날 현대 과학 및 과학자들의 사회.문화적 위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세밀하게 밝힌다."

해서 '과학 지식인의 탄생'이란 부제가 공으로 붙여진 것은 아닌 셈인데, 헉슬리 가문과 과학 지신의 자기정체성이 모두 토머스에게서 기원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니까 이 '대단한' 위인의 생애에 한번 눈길을 주어볼 만하다.  

 

 

 
 
 
 
세번째 책은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작가로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주제 사라마구(1922- )의 신작 <도플갱어>(해냄, 2006). 제목 그대로 자신과 똑같은 대상을 마주하게 되는 '도플갱어'의 모티브를 차용한 소설이라는데, <눈먼 자들의 도시>, <동굴>과 함께 주제 사라마구 '인간의 조건' 3부작으로 불린다고 한다(영역본의 제목은 ' The Double').
 


"인구 500만의 대도시에 거주하는 중학교 역사교사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 어느 날 그는 동료교사의 추천으로 비디오 한 편을 빌려보다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한다. 자신의 5년 전 모습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영화에 나오고 있었던 것. 막시모는 집요한 추적을 시작, 배우의 본명과 거주지를 알아낸다. 그리고 배우와 그 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배우를 발견하면서 그가 가졌던 자신에 대한 불안감은 이제 배우 부부에게까지 전염되고, 거울 앞에 선 것처럼 몸에 난 상처까지 똑같은 두 남자는 누가 원본이고 누가 복사본인지를 따지며 존재의 불안감을 떨치려 한다..."
 

 

 

 

나는 아직 사라마구의 책을 읽어본 바 없지만 노벨상 수상작인 <수도원의 비망록>(문학세계사, 1998)을 읽어본 지인의 호평은 기억하고 있다(드라마들도 번역되지 않았나?). 그럼에도 다소 낯설다는 느낌은 주지만, 이번에 출간된 '도플갱어'는 상당히 낯익은 테마의 작품이다. 도플갱어, 혹은 분신을 다룬 문학작품들이 적지는 않기 때문이다(만화와 영화에도 두루 걸쳐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에서 최수철의 <분신들>에 이르기까지.

사실 자신과 똑같은 또다른 존재를 다룬다는 것 자체가 좀 섬뜩한 이야기를 함축하는 것이어서 공포영화에서도 즐겨다루어지는데, 가령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도플갱어> 같은 게 (나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대표적인 경우이다. 아무튼 이러한 배경하에 놓이는 작품이기에 사라마구의 <도플갱어> 읽기도 다소 수월할 수 있을 거라는 짐작을 해본다.

 

 

 

 

'도플갱어'란 테마가 정신분석을 자극하고 요청하는 테마인데, 네번째 책은 이와 무관하지 않은 연구서 박찬부 교수의 <라캉: 재현과 그 불만>(문학과지성사, 2006)이다. 모처럼 국내 필자의 저작이어서 반가운데(국내에서는 홍준기, 권택영 교수 등이 라캉 관련 저작을 갖고 있는 정도이다), 저자는 이미 10년전에 <현대정신분석비평>(민음사, 1996)을 상자한 바 있고(알라딘의 저자 소개에는 역서로 돼 있지만 저서이다), 프로이트 전집의 <쾌락원칙을 넘어서>(열린책들, 1997)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재현과 그 불만'이란 표제 자체는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의 영어 제목인 '문명과 그 불만'에서 따온 것인데, 라캉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저자의 길잡이가 되는 듯하다. 소개에 따르면, "이 표현은 프로이트의 '문명과 그 불만'에서 유래한 것. 프로이트가 인간 발달의 동인으로 문명화의 필연성을 강조하면서도 '죽음 본능'으로 대변되는 '그 불만'을 주요 논제로 다루었듯, 상징적 재현의 불가피성을 인간 주체의 '강요된 선택'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언제든지 불만 세력인 실재계에 의해 전복될 수 있다고 말한다. 라캉의 '상상질서'에서 시작되어 '실재계' 쪽으로 옮겨졌던 관심사를 그대로 되짚어 살핀다. 지나치게 어렵거나 해체적인 서술을 지양해, 라캉의 이론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였다."

'죽음본능' 혹은 '죽음충동'을 화두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라캉-지젝 라인의 사고방식과 겹치는 듯하지만 저자는 지젝과 같은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라캉 담론의 탈근대적 유산'이란 서론의 제목이 이미 이를 암시해준다. 지젝이 방어/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라캉의 '근대적' 유산이기에). 방점이 '정신분석'보다는 '비평'에 두어져 있던 <현대정신분석비평>에서 저자가 사숙한 스승으로 거명한 이는 미국의 저명한 정신분석비평가 노만 홀란드였다. 독자반응이론가로도 분류되는 홀란드의 대표작은 <문학적 반응의 역학(The Dynamics of Literary Response)>(1968)이다. 말하자면 '미국화된 라캉'의 한 사례를 <라캉>에서 읽어볼 수 있을지 모른다.  

 

 

 

 

끝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이끌었던 독일의 사회학자 호르크하이머(1895-1973)의 대표적인 저작 중 하나인 <도구적 이성비판>(문예출판사, 2006)이 거의 40년만에 출간됐다. 아도르노와의 공저인 <계몽의 변증법>으로 더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그리고 아도르노의 그늘에 가려 사실 덜 주목받는 편이긴 하지만,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멤버들을 그린 한 캐리커쳐가 말해주듯이(이 흔한 이미지가 잘 검색되지 않는군) 대학의 사회문제연구소장이었던 호르크하이머는 학파의 대부이자 좌장이었다.  

호르크하이머는 책에서 "부정의 철학을 지향하며, 자연과 인간을 도구화하고 파멸로 이끄는 도구적 이성의 전면화에 대해 고발한다. 오늘날 이성은 이성이라고 불리는 것들의 비이성적 태도를 고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성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고발은 이성의 전면적 해체가 아니라, 오직 이성의 자기 비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론적 염세주의자이면서 실천적 낙관주의자가 되자.' 개인을 무력하게 만드는 파시즘의 출현을 인식하는 비관주의와 보편적인 인간의 유대를 꿈꾸는 낙관주의를 가진 호르크하이머의 사상을 느낄 수 있다."

호르크하이머의 책이 이번에 처음 소개된 것은 아니다. 예전에 <철학의 사회적 기능>(전예원, 1983)이란 책이 출간된 바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절판된 책이지만 이 참에 새로 때깔을 입혀도 좋지 않을까 한다. 더불어, 황재우(시인 황지우) 등이 공역한 마틴 제이의 <변증법적 상상력: 프랑크프르트 학파의 역사와 이론, 1923-50 >(돌베개, 1981)도 다시 손을 봐서 재출간하는 건 어떨까?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을 근간으로 한 책은 지상사적 시각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탄생과 이론적 진화과정을 섬세하게 추적하고 있는 저작이다...

06. 09. 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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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79)

'프리뷰'의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쏟아져나오는 신간들에 대해 참견할 자리가 마땅치 않았는데, (구당이 명당이라고) '최근에 나온 책들'을 마저 연재하기로 한다. 한 넉달은 쉰 듯한데, 그렇다고 그간에 뭔가 재충전된 건 아니며 단지 에드워드 로렌츠의 <카오스의 본질>이 신간으로 나온 걸 보고서 문득 연재에서 다루고픈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사람의 뇌 또한 '카오스의 가장자리' 아닐까?). 그럼 시작해보기로 할까? 

 

 

 

 

제일 먼저, 에드워드 로렌츠의 <카오스의 본질>(파라북스, 2005)이 출간됐다. 이게 '드디어'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데, 카오스이론, 혹은 복잡계이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인 '에드워드 로렌츠'를 저자로 한 책이어서 무엇보다도 그냥 반갑다. 로렌츠란 성으로 더 잘 알려진 이름은 '콘라트'이지만, '나비효과'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 독자라면 '에드워드'란 이름도 함께 기억해두는 것이 형평에 맞겠다.

소개에도 나와 있지만, "'브라질에 있는 나비가 한번 날갯짓을 하면 텍사스에 토네이토가 분다' 이는 최근 들어 동명의 영화 등을 통해 너무나 잘 알려진 '나비효과'의 유명한 명제이다. 하지만 이것이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에 필적한다고 평가받는 카오스 이론의 장을 연 논문 제목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이 분야의 베스트셀러인 <카오스>(누림, 2006 *새로 나왔군!)의 저자 제임스 글릭은 빼놓지 않고 있으며(역자 박배식 교수는 <카오스의 본질> 또한 우리말로 옮겼다), 최근에 재출간된 <카오스에서 인공생명으로>(범양사, 2006)에서도 저자 미첼 월드롭이 언급했던 기억이 있다. 기상학자 로렌츠와 그의 '이상한 끌개'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소개에서 언급되는 있는 영화는 애쉬턴 커쳐가 나오는 영화 <나비효과>를 말한다.

 

이번에 약간 놀란 건 로렌츠의 나이가 생각보다 많은 것. 1917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90세이다. 책에서 읽을 때의 '젊은 기상학자'가 더이상 아닌 것이다.

로렌츠의 원저는 1993년에 나왔으며, 일역본은 1997년에 나온 것으로 돼 있다. 카오스이론에서만큼은 우리가 일본보다 10년 정도는 뒤처지는 것 같은데, 이게 그저 '인상'일 뿐일까?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카오스이론이나 복잡계과학에 관한 번역서들 가운데는 일본책들이 적지 않다. 국내에서는 수학자 김용운 교수의 책 정도가 눈에 띌 따름이다. 벌써 10년쯤 전에 유행을 탄 카오스이론이지만, 스튜어트 카우프만의 <혼돈의 가장자리>(사이언스북스, 2002)나 <카오스의 본질> 같은 주요 저작들이 번역된 김에 한번쯤 '뒷북'을 쳐보는 것도 의미있어 보인다. 피서객들이 다 빠져나간 백사장을 되밟다보면 간혹 동전들 이상의 횡재를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조금 복잡해보이지만, 사실 정재승 교수의 베스트셀러 <과학콘서트>의 내용 대부분이 이 카오스이론/복잡계과학과 연관된 것들이다. 콘서트장의 연주를 즐기는 것 이상을 원한다면, 이제 '악보'를 찬찬히 들여다볼 수도 있겠다.

 

 

 

 

최근에 나온 과학서들 가운데, <뇌가 나의 마음을 만든다>(바다출판사, 2006)도 눈길을 줄 만한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세계의 뇌 과학자 중 한 명인 라마찬드란 박사가 BBC의 ‘리스 강연’에서 행한 내용을 담고 있다. 라마찬드란 박사는 환상사지나 공감각 같은 희귀한 신경이상 사례들을 통해 우리 뇌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더 나아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자유 의지란 무엇인가?’. ‘자아란 무엇인가?’ 같은 이제까지 철학의 영역에 속한다고 여겨졌던 질문들에 대해 외 과학자로서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며, 과학과 인문학이라는 두 문화의 연결을 시도한다." 그러니 읽어봄 직하다. 뇌과학 관련서들이 근래에 부쩍 눈에 띄는데, 사실 게놈프로젝트 이후에 꼽을 만한 메가프로젝트란 대뇌지도 만들기 아니었나? 그게 얼만큼 진행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하다.

 

 

 

 

그리고, 두번째 책은 영국 비평가 매슈 아널드/아놀드(1822-1888)의 <교양과 무질서>(한길사, 2006). 아널드 전공자인 윤지관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됐다. 기억에, 아널드에 대한('Arnold'를 꼭 '아널드'라고 표기해야 할까?) 박사학위논문을 펴낸 <근대사회의 교양과 비평>(창비, 1995)이 10년도 더 전에 나왔으니까 본 저작에 대한 소개 자체는 상당히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 전에 <삶의 비평>(민지사, 1985)이란 아널드의 책이 한번 소개된 걸로 돼 있지만, 본격적인 것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번에 나온 <교양과 무질서>는 어떤 책인가? 소개를 좀 따라가본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지식인 매슈 아널드는 당대의 사회적 갈등과 계급현실에 대한 처방으로 '교양(culture)'의 이념을 내세운 것으로 유명한 문학비평가이다. 오늘날 '교양' '교양인' '교양교육' 등의 개념을 널리 사용하게 된 배경 중 하나로 매슈 아널드를 꼽아도 무방할 정도라고 한다. <교양과 무질서>는 그런 매슈 아널드의 사상을 집약한 정치·사회평론서이다." 그러니가 '교양의 원조'라 할 수 있겠다.

"<교양과 무질서>는 1867년부터 당시의 사회·정치적인 쟁점을 두고 매슈 아널드가 1년 이상 벌인 논쟁문을 묶은 책이다. 차티스트 운동이나 각종 법률의 제정 등 정치적·경제적 개혁이 진행되고 있던 당시 빅토리아 사회는 거대한 변화의 과정에 있었고, 그 과정에서 대중교육 문제가 커다란 사회적 과제로 등장한다. 이러한 당시 사회의 갈등과 혼란을 '무질서'로 규정하는 지은이는 그 대안으로 '교양'을 제시한다. 노동계급을 포함, 파당성에 사로잡혀 '무질서'를 일으키는 중간계급을 '속물'이라고까지 비판하는 매슈 아널드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많은 파란을 일으킨다. <교양과 무질서>에서 지은이는 이러한 반론에 하나하나 반박하며 자신의 교양 개념을 자세히 설파한다. "교양이란 우리의 고정관념과 습관에 신선하고 자유로운 생각의 줄기를 갖다대는 것"이라고 말하며 교양의 시대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아널드의 정치적 입장은 오늘날의 스펙트럼에서 볼 때 중도보수에 가깝지 않나 싶다(여러 번 언급했지만, 우파의 교양론에 대응하는 것은 좌파의 품성론이다). 단, 이 보수주의의 자격조건이 교양(culture)이며, 그게 결여된 이들을 통칭해서 '속물(philistines)'이라고 칭하는 것. 그러니까 우리 주위에서 유감스러운 것은 '교양 대가리'라곤 없는 속물적인 우파들이 보수주의를 떠들어대는 것이다. 물론 아널드의 분류에 따르자면 속물적인 좌파들 또한 비판에서 열외가 되는 것은 아니겠다. 사실 이러한 교양주의가 '창비'와 보다 급진적인 노동/민중문학론자들을 가르는 입각점이 아니었나 싶다. 한편, 아널드가 폄하해마지 않는 '무질서'에 대해서는 '다른 과학', '다른 지배자'가 필요한 듯하며, 참조할 만한 책 몇 권을 나열해보았다.   

 

 

 

 

세번째 책은 촘스키와 함께 미국의 '좌파적 교양'을 책임지고 있는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대표작 <미국민중사>(시울, 2006)이다. 예전에 <미국민중저항사>(일월서각, 1986)이라고 나왔던 책의 개정판인데, 20년만에 나온 것이니까 어느덧 '한 세월'을 감당한 책이기도 하다. 이로써 하워드 진에 대해서만큼은 '연장 탓'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읽을 수 있는 만큼 읽으면 되는 것이다.

잠시 소개를 옮겨오면, "<달리는 기차에 중립은 없다> <오만한 제국> <전쟁에 반대한다> 등의 책들을 통해 노엄 촘스키와 함께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실천적인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역사학자 하워드 진.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지향하며 민중의 시각으로 미국사 전체를 읽어낸 <미국민중사>는 그의 역사학자로서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 역작으로, 1980년 첫 출간 이래로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대표적인 저서이다." 미국에서도 베스트셀러였다고 한다.



"'민중사'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이 미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미국을 구성하는 일반 사람들에게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그 미국의 민중은 누구를 뜻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처음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청도교인이나 지배층의 부유한 백인들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책은 오히려 기존 역사의 현장에서 소외된 이들에 더 주목하고 있다. 나아가 책은 소외된 이들의 시각을 적극적으로 끌어온다. 예컨대 콜럼버스의 아메리칸 대륙 발견에서 하워드 진은 인디언 부족인 아라와크족의 시각을 빌려온다. 그리고 헌법제정의 역사에는 노예의 관점을, 산업주의 발흥의 역사에는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들의 관점을, 멕시코 전쟁의 역사에는 탈영병들의 시각을, 뉴딜의 역사에는 할렘 흑인들의 관점을 도입한다." 이러한 관점들을 중재해줄 수 있는 객관적 시점이라는 게 과연 가능한가, 그런 의문을 갖게 한다. 정복자와 피정복자가 서로 동의할 수 있는 역사? 진의 표현을 빌자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뜻있는 건 이번에 데이비드 조이스의 평전 <하워드 진>(열대림, 2006)이 같이 출간된 것. "노암 촘스키와 더불어 '실천적 지식인', '미국의 양심'으로 불리는 하워드 진의 생애와 저술을 다룬 전기"로서 "책은 주로 민권 운동과 반전 운동에 중점을 두고 진의 생애를 돌아본다. 전기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지은이는 진의 삶이 보여주는 궤적 속에서 그의 주요 저서를 소개하고, 그의 혁명적 사상을 분석하며, 그의 삶과 업적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평가한다." 그러니 길잡이로서 유익하겠다. 물론 하워드 진의 자서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이후, 2002)와 나란히 읽으면 더 좋겠다. 참고로, 미국사 관련서들을 몇 권 나열해 보았다.  

 

 

 

 

네번째 책은 고모리 요이치의 소세키 평전 <나는 소세키로소이다>(이매진, 2006)이다. 제목은 소세키의 대표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따왔는데, 이 일본근대문학의 태두를 다루고 있는 저작이 이번에 처음 나온 건 아니지만, 저자가 <포스트콜로니얼>(삼인, 2002)의 저자 고모리 요이치라는 게 눈길을 끈다. 현재 도쿄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인 저자는 가끔씩 내한강연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일본의 내셔널리즘에 대해서 적극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는 고모리 교수의 문학비평가로서의 솜씨를 구경해볼 수 있는 책이겠다.

 

 

 

 

소개에 따르면, "일본 근대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나쓰메 소세키 평전. 금전, 호적, 우정, 사랑, 영국 유학 등 다양한 요소들을 동원해 소세키와 그의 작품을 해석하고 평가한다. 폭넓고도 치밀한 연구를 통해, 소세키라는 필명을 얻기 전의 '나쓰메 긴노스케'의 삶을 드러내고자 했다. 어릴 때 친부모와 양부모에게 버림받은 기억, 런던 유학 시절에 고향에서 죽어가는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죄책감, 다섯 번의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 최초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부터 마지막 장편 작품인 <한눈팔기>, 필생의 역작으로 꼽히는 <문학론>과 '자기본위'라는 말로 유명한 강연 <나의 개인주의>까지, 지은이는 소설 속에 조각조각 나뉘어 숨어 있던 소세키의 삶을 하나하나 짚어낸다"

일본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출세작도 소세키론이었다는 걸 염두에 두면, 일본비평가들에게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자기입증을 위한 척도 같은 게 아닐까도 싶다(과문했던 나는 국내에서 소세키가 유행을 타기 전 아쿠다가와,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 등이 일본근대문학을 대표하는 걸로 알았다). 프랑스문학쪽으로 가면 마르셀 프루스트나 사뮤엘 베케트 같은 경우가 그런 듯싶은데, 쟁쟁한 비평가나 철학자들이 이들에 대한 연구서들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문학의 경우는 어떠한가? 어느 작가론을 써야 비평가로서 자기존재를 입증할 수 있나?.. 

 

 

 

 

끝으로 마지막 책은 사랑 이야기이다. '중세 최대의 연애사건'으로도 불리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책이 <내 사랑의 역사>(북폴리오, 2006)로 또 출간된 것이다. 원제는 '엘로이즈와 아벨라르'(2003) 순절한 사랑의 대명사가 된 이 커플의 이야기는 어떤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일까?

"12세기 프랑스의 수녀였던 엘로이즈는 중세 철학의 대가이자 성직자인 아벨라르와 숙명적이고도 질긴 사랑을 나눴다... 12세기 초, 파리의 열혈 논객이었던 아벨라르는 성당 참사관인 퓔베르의 집에 하숙을 청하고, 퓔베르의 조카딸이었던 엘로이즈를 가정교사로 맞게 된다. 스승과 제자 사이로 만난 이들은 곧 육체에 대한 탐닉과 사랑에 빠져 비밀결혼을 하고 아들까지 낳게 되지만, 이 사실을 안 퓔베르는 아벨라르를 거세시키는 것으로 복수를 한다. 이후 두 사람은 헤어져 수도승과 수녀로 살아가게 되지만 15년 후 다시 만나게 된다. 사랑과 종교, 철학이 어우러진 이들의 삶은 어떻게 끝맺게 될까?..."

이번에 나온 "책은 최근에 발견된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편지 뭉치와 각종 사료를 바탕으로 두 사람의 삶을 마치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으로 풀어나간다"고 한다. 이미 이전에 출간된 독어권의 책 <중세 최대의 연애사건>(생각의나무, 2005)과 나란히 읽으면 이들의 사랑을 훔쳐보는 데 더 도움이 되겠다.  

한편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거나 변주한 책들도 적지 않은데, 장 자크 루소의 <신 엘로이즈>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겠다. 생각보다는 방대한 분량인데다가 그만한 문학성을 갖추고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소와 누벨 엘로이즈>(만남, 2002) 같은 연구서만 달랑 하나 갖고 있다는 건 좀 궁색한 일이다. 예전에 출간된 루소전집에 들어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새 번역본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사랑의 역사'가 좀더 번듯하게 채워질 수 있도록... 

06. 09. 05-06.

P.S. 참고로, 아널드의 <교양과 무질서>에 대한 서평 하나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6. 09. 09) 어지러운 사회 바로잡는 힘

-19세기 영국의 시인이요, 비평가였던 매슈 아널드(1822~88)의 <교양과 무질서>가 아널드 전문가에 의해 번역·출판됐다. 우리가 이 책의 출간을 반갑게 여기는 것은 이 문화·사회·정치 비평의 고전에서 아널드가 펼치고 있는 논설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데에도 여러모로 의미 있는 시사를 던져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아널드의 시대에 영국은 산업혁명의 여세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는 한편 정치적 개혁과 사회적 변화에서 야기되는 혼란과 무질서를 겪고 있었다. 더욱이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제시된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사상은 오래된 맹목적 신앙을 뿌리째 흔듦으로써 엄청난 정신적 의혹과 혼란을 초래했다. 그러므로 아널드가 ‘도버 해변’이라는 유명한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꿈속의 땅처럼 눈 앞에 펼쳐진 세계/다채롭고, 아름답고, 싱그러우나/실은, 그 속에 기쁨도, 사랑도, 빛도/확신도, 평화도, 고통을 위한 도움도 없네./우리의 이 어두워 가는 평원엔/갈등과 패주의 경적이 어지럽고/밤마다 무지한 군대들이 충돌하고 있을 뿐”이라고 노래했던 것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아널드의 혼란 인식은 이런 일반론에만 머물지 않고 그 나름의 구체성을 띠고 있다. 특히 귀족, 중간 계급 및 노동 계급 등 이른바 3대 계층에 대한 그의 인식에는 각별한 데가 있다. 그가 보기에, 귀족들의 개인적 자유 및 야외 스포츠 선호는 그 뿌리가 야만성에 있었고, 그 자신이 속한다고 여겼던 중간 계급은 온통 속물주의로 물들어 있는가 하면, 거칠고 무식한 노동계층은 우중(愚衆)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무질서는 필연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사회현상이었다.

-아널드는 중간 계층이 사회 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 계층은 물질주의에 물든 채 가난한 계층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고 부도덕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당대 중간 계층의 도덕적 지주이던 청교도 정신이 편협하고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뿐만 아니라 아널드는 당대를 풍미하던 자유방임주의가 정치적 편견과 무책임으로 흐를 가능성을 경계했는데, 이는 제2장 ‘내키는 대로 하기’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가 지도자적 자질의 필수 덕목으로서의 교양을 강조하게 된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실로 교양이야말로 사회의 모든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 방안이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교양은 무엇보다도 ‘완성에 대한 공부’이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즐거움을 위해서 보려는 욕망’과 ‘세상을 지금보다 더 낫고 행복하게 하려는 숭고한 열망’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교양은 단순히 희랍어나 라틴어 문헌을 겉핥기할 수 있는 능력이나 순수한 과학적 지식을 의미하지 않고 삶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과 선을 행하는 도덕적 힘을 의미했다.

-이런 의미에서 아널드가 이 책에서 ‘단맛과 빛’이라는 말로 제1장의 제목을 삼은 것은 아주 시사적이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일찍이 꿀벌의 덕성을 논하면서 꿀벌은 인간에게 꿀을 제공해서 단맛을 볼 수 있게 하는 한편 밀랍을 제공하여 촛불을 켤 수 있게 한다고 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 아널드가 ‘단맛’과 ‘빛’이라는 스위프트적 은유를 빌려서 교양의 속성을 규정하는 동시에 중간 계층이 바로 이 단맛과 빛을 결여하고 있음을 개탄한 것은 아주 흥미롭다.

-아널드가 말하는 단맛과 빛은 그 성격에 있어서 인간의 헬레니즘적 성향과 관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의 완성 또는 구원’이라는 지상 목표를 위해서는 헬레니즘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도덕적 실천을 최고 덕목으로 삼는 헤브라이즘의 보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즉 헬레니즘의 ‘올바른 생각’과 헤브라이즘의 ‘올바른 행동’이 상호보완되어야 인간의 교양도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널드의 교양론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까지도 여전히 적정할까? 물론 아널드가 이 책을 쓰던 1860년대는 우리 시대와 현저히 다르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처해 있는 정치·경제·사회적 상황은 140년 전 영국인이 처해 있던 상황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교적 짧은 기간에 걸친 우리의 민주정치 실험과 급속한 경제 개발은 과격한 사회적 변혁을 일으키면서 혹심한 가치관의 혼란과 정신적 폐해를 야기해왔고, 이는 아널드가 짚었던 빅토리아 시대의 병폐와 그리 다르지 않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아널드가 제기한 문제는 여전히 우리에게 설득력이 있으며 그가 제시한 처방책도 우리에게 유효하다. 만약에 ‘교양과 무질서’가 이런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호소력을 지니지 않는다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도 없을 것이다.(이상옥|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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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dasan > 안창홍 1994년의 사랑
실재의 윤리 - 칸트와 라캉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4
알렌카 주판치치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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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의 사랑 /1994/73 ×53cm/캔바스위에 아크릴릭

http://www.boseong51.net/user/ftp/art/k/40315-AhnChangHong.html

<실재의 윤리>의 책표지는 안창홍의 <1994년의 사랑>이다. 욕망과 배반이 교차하는 형식이 하나로 응축되어 있는 구도이다. 인간들은 이성애적인 열정을 유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과연 그 사랑의 실체가 진정성으로만 응축되어 있고, 이성애적인 갈망이 과연 윤리적으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포옹의 형식은 이타적인 갈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윤리적인 욕망의 이면에는 <칼>로 표상되는 배반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욕망의 이중성은 빨간색으로 전체 화면에 도배되어 있다.

요즘 우리 사회에도 수입되어 유행한 적이 있는 <안아주기 운동>는 인간의 이타적 윤리성만으로 진정한 인간성의 구현이 가능한 가에 대해 의문이다. <안아주기>를 운동의 차원에서 해야할 만큼, 고립과 소외의 인간의 외적 조건이 자발적인 윤리적 공간을 상호간에 마련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상상이 매우 빈곤하게만 보인다.

 

칸트적인 도덕적 선의 의식의 존재 가치는 반칸트적인 욕망과의 공존을 통해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실재의 윤리>의 표지는 매우 성공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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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들뢰즈는 자신의 저서들의 영역판에 새로이 서문들을 붙이고 있는데, 이 서문들에서 자신의 핵심적인 주장들을 잘 정리해놓고 있기 때문에 입문자들에게는 더없이 요긴하다. 국내에 출간되고 있는 들뢰즈 번역서들이 영역판에서 중역을 하는 대신에 불어원전을 옮겨오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한편으로 이 영역판 서문들이 소개되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 예외적인 경우라면, 영역판 서문을 부록으로 옮겨놓고 있는 <베르그송주의>(문학과지성사, 1996), 그리고 불어판을 옮기고 있는 <니체와 철학>(민음사, 1998/2001)과는 달리 영역판을 옮긴 <니체, 철학의 주사위>(인간사랑, 1993) 등이다.

 


 

 

 

 

 

 

<니체와 철학>(1962) 영역판(1983) 서문은 역자인 '휴 톰린슨(Hugh Tomlinson)에게‘라는 헌사를 달고 있는데, 우리말로 옮겨진 첫문장은 이렇다: “어떤 책이 번역된다는 것은 항상 흥미로운 일이다.”(11쪽) 이에 대한 원문은 “It is always exciting for a French book to be translated into English."이다. 즉, ”어떤 불어 책이 영어로 번역된다는 것은 언제나 흥분되는 일“이라는 것.


우리말 번역대로, 이 흥분은 ’번역 일반‘의 것일 수도 있지만, ’불어에서 영어로‘라는 특정한 번역에 한정된 것일 수도 있다. 들뢰즈가 다른 언어의 번역본들에도 매번 서문을 달았는지 모르겠지만, 그에게서 영어와 영미문학/철학이 갖는 의미가 좀 각별하다는 점을 여기서는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경험론자로서 당대의 이질적인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를 나는 ’영국 철학자‘로 분류하고픈 유혹을 자주 느낀다).  


그에게서 왜 영어와 영국이 문제되는가? “니체가 가장 많이 오해되어 온 것은 아마 영국에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프랑스 합리주의와 독일 변증법에 맞서서 투쟁한 주요 주제들은 결코 영국식 사유들에 있어서도 중심적인 것은 아니었다. 영국인들은 이론적으로 사용하기에 별다른 불편함이 없는 경험주의와 실용주의를 소유했었다. 그것은 니체를 통한 우회가 그들에게는 별로 큰 가치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들의 ‘양식’에 어긋나는 니체의 바로 그와 같은 특별한 경험주의와 실용주의를 통한 우회로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국역본에는 생략돼 있지만(Tomlinson suggests), 이러한 지적은 영역자 톰린슨의 견해를 들뢰즈가 수용한 것이다.


즉, 합리주의와 변증법에 감염돼 있지 않은 영국인들에게 ‘니체 철학’이라는 처방(우회로), 혹은 '백신'은 불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미 그들은 면역돼 있는 상태였으며, 니체의 ‘망치로 하는 철학’ 대신에 이미 경험주의(empiricism)와 실용주의(pragmatism)라는 영국식 망치를 잘도 쓰고 있었던 것. 해서, 영국에서 니체는 (철학자들에게가 아니라) 소설가들, 시인들, 그리고 극작가들에게나 겨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철학적으로 수용된 것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수용됐다. 


여기서 상기해둘 것은 들뢰즈의 철학이 독특하게도 ‘장소’에 대해 질문하는 ‘지리철학(geophilosophy)’이라는 점이다. 그리스를 기원으로 하는 서구 형이상학과 철학을 동일시한다면, 그의 철학은 반철학(anti-philosophy)이기도 하다. 그는 다른 기원, 다른 계보, 다른 종족의 철학을 기획했었다(작년에 나온 들뢰즈 가이드북 하나는 'Deleuze and Geophilosophy'란 제목을 갖고 있다).

 


 

 

 

 

 

아무튼 니체 철학에 대한 자신의 해설을 영어권 독자들에게 소개하면서 그가 처음에 전제하고자 하는 것은 니체 철학이 영국인들에게 오해될 수 있는 소지가 있으며 그것은 일면 필연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그는 비로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왜 위대한가? 철학의 이론과 실천 둘 다를 뒤바꿔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유자(thinker)를 날고 있는 화살에 비유한다. 그것은 또다른 사유자가 그 이외에 다른 곳에 그것을 쏠 수 있기 위하여 그 떨어진 곳을 찾는 그러한 화살이다. 그에 따른다면, 철학자는 영원하지도 역사적이지도 않으며 ‘반시대적(untimely)’, 언제나 반시대적인 것이다.”(12쪽) 그래서, 이 반시대성은 니체 철학의 표지이다.  

 


 

 

 

 

 

 

그로 인한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니체는 (철학사에서) 어떤 선배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단지 오래전의 전-소크라테스학파(Pre-Socratics)와, 그로부터 따로 떨어져 있는 단 한 사람의 선배인 스피노자만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서 니체 철학의 계보는 단촐하다. 사실 소크라테스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잘 알려진 것이다. 니체가 보기에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삶을 ‘질병’으로 간주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그러한 ‘병적인 철학’에 맞서서 니체는 삶과 철학에 건강을 다시 되돌려주려고 한다. 그리고 이 ‘건강’의 문제는 들뢰즈에게서도 핵심적이다. 소크라테스의 금언이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면, 니체-들뢰즈의 금언은 “너 자신이 돼라!”이다.

 


 

 

 

 

 

 

그렇다면 누가 불건강한, 병약한 자들인가? 주제를 파악한 자들이다. 그리하여, 삶을 두려워하는, 그래서 삶을 향유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삶을 (긍정하는 대신에) 부정하며 진정한 삶을 내세의 삶으로 유예시킨다. 말하자면, 감히 살려고 하지 않는다. 자의에서건 타의에서건. 가령 체홉의 <벚꽃동산>에서 늙은 하인 피르스의 마지막 대사: “인생이 다 지나갔군. 산 것 같지도 않게!..” 왜 그런가?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른 긍정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노예로서 타성과 관습에 의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해서 자신의 삶을 어떠한 술어로도 고정/한정시킬 수 없는 고유한 것으로,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표어는 "삶은 다른 곳에 있다!(Life is elsewhere!)"이다.


반면에 건강한 자들이란 주제 파악 못하는 자들이다. 삶에 대한 넘치는 식욕으로 잠못 이루는 자들이다. 자기 자신이 되고 싶어하는 자들이다. 이들의 구호는 "삶은 지금/여기에 있다!(Life is here/now!)"이다. 그들은 언제나 앙콜(Encore!)을 외친다. "좋아, 한번 더!" 하지만, 이러한 긍정은 '이대로!'라고 건배하는 '부유한 노예'의 나르시시즘적 동일시와는 다른 것이다.

 

이 ‘너 자신이 되는 것(To become what one is)’에 대한 주판치치의 창의적인 주해에 따르면, ‘자신이 존재하는 바가 되는’ 순간은 합일의 순간이 아니라 순수한 분열의 순간이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아는 순간’은 주체화로 진입하는 순간이자 합일의 순간이고, 니체의 ‘너 자신이 되는 순간’은 주체로 퇴거하는 순간이자 분열의 순간이다('주체화'와 '주체'의 차이는 토이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 2005) 참조. 한편, 이 ‘분열적 주체’는 막바로 들뢰즈의 ‘안티-오이디푸스’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이 분열의 표현들 중 하나는 퇴락 또는 부정의 원칙과 시초 또는 긍정의 원칙 사이의 구분이다.”(<정오의 그림자>, 43쪽) 그리고 이 분열에 대한 ‘개념적 인물들’이 그리스도(십자가에 못박힌 자)와 디오니소스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디오니소스란 그 분열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 “디오니소스는 십자가에 못박힌 자 뒤에, 완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서 오는 게 아니다. 디오니소스는 단순히 새로운 다른 가치들의 등가물이 아니다. 디오니소스는 낡은 것의 몰락 이후에 오는 새로운 시대의 시초, 신기원의 아침이 아니다. 디오니소스는 한낮으로서의 시초이며, ‘하나가 둘로 변하는(one turns to two)' 순간이며 다시 말해서 새로운 그 무엇으로서의 바로 그 '둘이 됨(becoming two)' 또는 분열의 순간이다."(43쪽)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책세상판, 21쪽) 내가 좋아하는 번역본은 아니지만, 당장 옆에 있는 거라서 인용한다(내게 친숙한 것은 최승자 역의 청하판이다. 나는 5종의 국역본을 갖고 있다).

독어의 'Untergang'은 이행과 몰락의 뜻을 동시에 갖는 것으로 안다. 내가 읽은 서론에서 주판치치가 들고 있는 사례는 아니지만, 디오니소스란 따로 하나가 둘이 되면서 이러한 과정(이행)과 몰락을 동시에 수행하는 자, 그러한 순간의 이름이 아닐까도 싶다. 그런 것들은 새로이 니체 전집도 완간된 김에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나는 불어본과 함께 영어본, 러시아어본, 2종의 국역본을 갖고 있다)과 주판치치의 <정오의 그림자>를 마저 읽어나가면서 확인해볼 작정이다. 

얘기가 길어졌는데, 어쨌든 여기까지가 영역본 <니체와 철학>에 들뢰즈가 붙인 서문의 첫 페이지 '브리핑'이다. 원문보다 길어지는 것도 브리핑에 속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점점 쌓여가는 머리속의 글들을 처치(!)하기 위해서 이 글의 초안은 어제 자정 넘어 (아주 드문 일이지만) 집에서 작성한 것이다. 하지만, 몇 시간 걸려 한 페이지를 소화하는 걸 보면, 위대하기는커녕 내 위장이 얼마나 작은지 알겠다(떠들어대는 것들을 조지기 위해서는 깍두기들이라도 동원해야 할 모양이다). 언제쯤이나 주제 파악을 하게 될는지!..

05. 11. 23.

P.S. 그러니까 들뢰즈의 이 서문의 '본론'에 대한 브리핑은 또 미뤄지는 셈이 됐다(덕분에 애초의 제목과는 달리 니체는 아무말도 하지 않은 게 돼버렸다!) 그런 식으로 미뤄지는 만큼 수명도 연장되는 것이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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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주판치치의 베르그송론(영문)

 

 

 

 

라캉과 칸트를 다룬 <실재의 윤리>(도서출판b, 2004)와 독창적인 니체론 <정오의 그림자>(도서출판b, 2005)로 우리에게도 소개된 슬로베니아의 여성 철학자 알렌카 주판치치의 베르그송론을 옮겨놓는다(출처는 http://www.cinestatic.com/infinitethought/2006/03/zupancic-lecture.asp.) 보다 정확하게는 강연내용의 정리이다. 지난 봄(06. 03. 06) 강연으로 돼 있는데, 베르그송의 <웃음>을 다루고 있다. 이 <웃음>(1900)은 종로서적판(1989)과 세계사판(1992)로 두 차례 번역/출간된 바 있지만, 아쉽게도 현재는 모두 품절상태인 듯하다. 베르그송 입문서로 가장 얇은, 그렇기에/하지만 가장 쉬운/좋은 책이다.



Alenka Zupancic on Bergson and the Comic, March 2nd 2006

Bergson's "formula" of the comic, namely 'something mechanical encrusted on the living' gives a clear indication of the division at the heart of his conception of comedy: the separation of life (flexible, elastic, light, novel) and the machinic (the automated, the repetitious, the inert, the rigid). Zupancic began with this phrase, arguing that this division formed the core of all the other dyads in Bergson. I argued in questions that it was perhaps rather the opposition soul/matter that was more fundamental, and that any Lacanian re-reading of the comic through a perversely redemptive reading of Bergson's concepts such as 'life' would be in danger of falling into more or less the same theologically 'redemptive' structure as in Bergson's original argument:



(Long quote from Bergson's essay) 'Our starting-point is again "something mechanical encrusted upon the living." Where did the comic come from in this case? It came from the fact that the living body became rigid, like a machine. Accordingly, it seemed to us that the living body ought to be the perfection of suppleness, the ever-alert activity of a principle always at work. But this activity would really belong to the soul rather than to the body. It would be the very flame of life, kindled within us by a higher principle and perceived through the body, as if through a glass. When we see only gracefulness and suppleness in the living body, it is because we disregard in it the elements of weight, of resistance, and, in a word, of matter; we forget its materiality and think only of its vitality, a vitality which we regard as derived from the very principle of intellectual and moral life, Let us suppose, however, that our attention is drawn to this material side of the body; that, so far from sharing in the lightness and subtlety of the principle with which it is animated, the body is no more in our eyes than a heavy and cumbersome vesture, a kind of irksome ballast which holds down to earth a soul eager to rise aloft.'

Anyway, Zupancic pointed to a fundamental weakness in Bergson's formula that, whilst seemingly specific, is nevertheless too general - in a different vein, the same formula of the 'mechanical encrusted on the living' could easily be applied to the uncanny, for example, the living dead, for example, do they not precisely demonstrate this comedic formula, only in a horrific mode? Are zombies funny? Sometimes...



Bergson's further argument that laughter serves as a 'social corrective' simultaneously reduces the affirmatory elements of comedy (as Hegel argues) to mere forms of scorn and mockery. (Just a banal consequence of Bergson's empirically-driven social conservatism, I would argue, not to mention his ridiculous racism (from 'On Laughter', again): 'why does one laugh at a negro?...I rather fancy the correct answer was suggested to me one day in the street by an ordinary cabby, who applied the expression "unwashed" to the negro fare he was driving. Unwashed! Does not this mean that a black face, in our imagination, is one daubed over with ink or soot? If so, then a red nose can only be one which has received a coating of vermilion. And so we see that the notion of disguise has passed on something of its comic quality to instances in which there is actually no disguise, though there might be').

Bergson overlooks, she argued, the possibility that this formula could instead be the retroactive (and reactionary) effect of comedy itself - alternatively put, is not the mechanical rather constitutive of life itself? If we remove the mechanical do we really get pure liveliness/spirit? No! Life is already an imitation of life - repetition (in language/personality) does not persist purely on one side (the 'bad', heavy side) of the comedic/non-comedic division. Comedy plays not with the mechanism/life opposition, Zupancic continued, but with the inconsistency of the one (as subject) - the fact that the two elements identified by Bergson function in fact 'in a most intimate bond', rather than a disjunctive one, and that it is ultimately impossible to separate the two terms because of the 'insistence' of the one qua (incomplete) subject - traversed by language, not prey to the discrepancies between the spirit and the letter, exactly, but rather the way in which the spirit emerges out of the mechanical letter...slips of the tongue, the way language itself is productive of thought...

Zupancic quoted Groucho Marx (Driftwood) and Mrs Claypool from Night of the Opera so as to demonstrate the effect of comic imitation at the very heart of 'personality':

'That woman?
Do you know why I sat with her?

Because she reminded me of you.

- Really?
- Of course.

That's why I'm here with you,
because you remind me of you.

Your eyes, your throat, your lips...
Everything about you reminds me of you...

except you.'




Is the mechanical thus an essential feature of life, rather than its comedic antonym? Zupancic briefly turned to a discussion of 'drive' in Lacan, though this was (unfortunately) not really cashed out. Questions drew upon the relationship between Freud and Bergson (and why it was that the former's book on jokes was so unfunny), what the relationship between life and theatre was, if we are already 'playing' at life, so to speak. Also, didn't we also need to understand what the temporality of laughter was in order to understand comedy (comic timing, etc.); what were the cultural/historical dimensions of mechanism, and didn't we really need to be aware of them in order to put Bergson's claims about machines etc. into context?

Zupancic concluded that we needed to read Bergson's own examples against him: to examine the real structure at work in them and show how vivacity emerges, not against, but from within repetition.

06. 0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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