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언어에 대하여

 

 

 

 

 

마루야마 게이자부로의 <존재와 언어>(민음사, 2002)와 김상환의 "언어에 대하여",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창작과비평사, 2002)를 읽었다. 분량의 차이는 있지만, '언어'에 대한 계발적인 사고를 부추긴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내가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건, 소쉬르가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줄곧 강조하는 '랑그(langue)'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아나그람 연구 등을 통해서 문제화하는 '랑가주(langage)'로서의 언어이다. 딜런 에반스에 따르면, 라캉이 말하는 언어도 랑그가 아니라 랑가주이다.

 

 

 



 

물론 이전에 지적했다시피, 랑그/랑가주의 구별은 불어에만 있다. 우리말로는 '언어/언어할동'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역시나 그 맥락적 의미가 다 전달되지는 않는다. 마루야마에 의하면, "소쉬르에게 랑가주는 인간이 가진 상징화 능력과 그 활동들(언어, 행위, 음악, 그림, 조각) 등이며, 넓은 의미의 말에 해당한다."(122쪽) 또 "랑가주는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해주는 표지이며, 인간학적 또는 사회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격을 가진 능력으로 간주된다."(123) 이것을 마루야마는 촘스키와는 다른 의미에서 심층의 언어라고 부른다. 보다 알기 쉽게 얘기하면, 랑그는 랑가주의 일부로 포함된다. 그래서 랑가주에는 '랑그화된 랑가주'('랑가주1'이라 부르자)가 있고, '랑그화되지 않는 랑가주'('랑가주2'라 부르자)가 있다.

마루야마에 의하면, "랑가주가 개별 사회에서 독자적인 구조가 되고, 특정의 공시적인 제도가 된 것을 랑그라고 한다. 랑그는 여러 언어에 공통되는 원리적 기호 체계이며, 개인의 행위를 규제하는 조건과 규칙의 총체인 가치체계이다."(123쪽) 그리고 이 "랑가주는 랑그 이전의 상징성의 활동으로서, 음성언어에 앞서는 원에크리튀르(archiecriture)나 코드 없는 무용인 몸짓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126쪽) 이 랑가주를 적극적으로 체화하고 있는 것이 바로 상징적 언어로서의 시적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김수영의 시평에 대해 검토하면서 김상환이 지적하는 것 또한 이 랑가주로서의 시적 언어가 아닐까? 그것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시적 언어는 언어의 안과 밖이 나뉘는 경게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김수영이 말하는 '언어 이전'은 그 자체로 완결된 기의의 질서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접경적 사태를 가리킨다. 언어를 이 접경적 사태 속에서 일어나는 기록의 경제학으로부터 성찰하는 것, 그것이 시적 사유의 영원한 과제이다."(129) 인용문에서 '언어 이전'의 카오스적인 질서란 소쉬르나 마루야마가 얘기하는 랑그화되지 않은 랑가주, 즉 '랑가주2'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랑가주1'과 '랑가주2'는 각각 자연언어와 상징언어에 대응할 것이다.

상징언어로서의 랑가주는 마루야마가 말하는 인간적 과잉의 산물이다. "나의 견해는 인간만이 앞에서 본 것 같은 본능의 도식 이외에 또 하나의 게슈탈트를 과잉물로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차 분절의 결과 생기는 <언어 구분 구조>이며, 그 그물눈은 바로 <상징화 능력과 그 활동>이라는 넓은 의미의 말에 따른 게슈탈트이다."(165-6쪽) 여기서 '상징화 능력과 그 활동'이나 '넓은 의미의 말'은 전부 랑가주에 해당한다. 그러데 이 상징언어라는 과잉, 혹은 괴물은 우리의 일상성에 대한 폭력에 다름아니다. "시어란 일상어에 가해진 조직적인 폭력"이라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주장을 떠올려 보라. 때문에 일상생활속에서의 일상적 자아는 일상적인 의사소통(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일상적 의식의 수준에서 이러한 과잉을 제어할 필요가 있다. 즉 절대적 언어를 상대적 언어화하여 제한할 필요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상대적 언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하고 무엇인가를 전제하는 상대적 언어는 그런 절대적 언어가 선물한 의사소통 가능성 안에서, 그러나 그 가능성을 제한하고 왜곡하면서 성립한다. 문맥을 만들고 문법을 수립하면서, 지시관계를 확립하면서 절대적 언어를 상대화한다. 대상화하고 도구화하는 것, 그것이 자연언어의 탄생내력이다. 안정성과 도구성을 띤 자연언어는 절대적 언어의 외상적 폭력에 대한 반-폭력에서 유래한다."(김상환, 133쪽)

하지만 이렇듯 상대화된 언어, 상대적 언어는 메타-일상적 차원, 즉 초월론적인 사유의 지평에서는 불편하고 불충분한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제기되는 것이 자연언어에 대한 철학적 비판인 바, 그 비판과 극복은 두 갈래의 방향으로 진행된다. 한 갈래는 자연언어가 가진 의미의 모호성을 비판하면서 수학적인 인공언어를 설정하는 방향이고(구조주의나 분석철학), 다른 한 갈래는 자연언어가 가진 의미의 빈곤성을 비판하면서 시적 언어, 비유적 언어, 즉 상징언어를 전면화시키고자 하는 방향이다(니체 이후의 해체론). 전자는 자연언어에 남아있는 시적 언어의 잔재(찌꺼기)조차 말끔하게 제거하고자 하며, 후자는 '닳아빠진 동전'과도 같은 자연언어에 새로운 생명(=은유적 언어, 상징적 언어, 무의식의 언어)을 불어넣고자 한다.

전자에 해당하는 "구조주의는 어떤 변형된 이상언어론, 어떤 형식주의적 초월론이다. 구조주의의 핵심은 '시적이거나 사적이거나 모두 수적인 것이다'라는 명제로 집약된다. 그것은 디오니소스적 개방성을 인정하지 앟는, 다만 아폴론적 개방성 안에서만 이해된 언어관에 기초하는 이론이다. 여기서 시적인 것, 그 디오니소스적 개방성은 객관적 형식의 질서로 환원되어 버린다."(김상환, 147쪽) 포스트-구조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구조주의적 사유에서 배제되고 간과된 디오니소스적 개방성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적 심층에서의 맹목적인 우연과 의미의 모호성을 직시하고 긍정하는 것이다.

 

 

 

 



언어는 우리 존재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동일성도 거부한다. 오직 유일한 것은 영원회귀일 뿐. "<영원회귀>는 <동일한 것이> 회귀하는 것도 아니고, 동일한 것을 향하여 회귀하는 것도 아니다. <영원회귀>는 반복이며, 반복되는 것만이 생성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바로 삶의 다양한 모습이며, 우연이며, 맹목적이기도 한 반복과 차이에 대한 긍정인 것이다."(마루야마, 257쪽) "이러한 활동에 관여하는 인간의 기쁨은 최고의 힘을 향한 의지에 의해 <생성에 존재의 각인을 찍는 것>, 즉 카오스가 기호화하는 것에서 생기는 것인데, 동시에 우리는 이것이 <존재자>가 되어 정지하는 것도 항상 부정해야 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시지포스적인 끝없는 운동의 반복이다."(263쪽) 때문에, 리차드 로티의 말을 빌면, 강한 인간 - 그것은 곧 강한 시인(strong poet)에 다름아니다...

2003. 0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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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유머에 대하여

 

 

 

 

지난해 말 '기습적으로' 출간된 가라타니 고진의 신작 <유머로서의 유물론>(문화과학사)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온라인 서점의 경우지만, 우리에게 번역 소개된 그의 책들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것이다. 많이 팔리는 만큼 많이 읽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표제글인 '유머로서의 유물론'만큼은 한번쯤 읽히지 않을까 싶다. 8쪽밖에 되지 않는 그 글은 이 책에 묶인 다른 비평문들과 비교할 때 가장 읽기 쉬운 글이기도 하다(게다가 유머러스하다).

고진은 먼저 일본 근대문학에서의 '샤세이분(寫生文)'이 서양의 리얼리즘과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라고 지적한다. 샤세이분에서의 객관적인 묘사는 "자기 자신을 높은 곳으로부터 보는 자기의 이중화"(127쪽)를 의미하기 때문인데, 이러한 묘사는 근대소설의 내러티브로써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자기의 이중화'이다. 고진은 그것을 프로이트가 말하는 유머와 연결시킨다. "프로이트가 생각하기에 유머는 자아(아이)의 고통에 대해 초자아(부모)가, 그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라고 격려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을 메타 레벨에서 내려다보는 것이다."

물론 유머를 그렇게 정의내릴 경우, 또 다른 '자기의 이중화'인 자기 아이러니(self-irony)와 겹칠 수 있는데, 고진에 의하면 이 둘은 같지 않다. "왜냐하면 아이러니가 타인을 불쾌하게 하는 것에 반해, 유머는 왠지 그것을 듣는 타인도 해방하기 때문이다." 고진은 이러한 유머를 보들레르를 인용하면서 다시 한번 정의내리는 바, "그것은 유한적인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는 것인 동시에, 그 일의 불가능성을 고지하는 것이다."(128쪽) 그런 의미에서 유머는 일종의 '정신적 자세'이며 '웃음'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대개의 유머는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고진도 사례로 들고 있지만, 사실 카프카가 자신의 음울한 소설들을 읽어줄 때, 청중은 물론 그 자신도 우스워서 데굴데굴 굴렀다는 건 잘 알려진 일화이다(요컨대 그는 블랙 유머리스트였던 것이다).

이러한 예비적인 고찰에 이어서 고진은 제법 근엄해 보이는 사상가들에게서 발견되는 유머로 우리의 주의를 이끈다. 그는 스피노자의 결정론적 세계인식에서 유머를 발견하며, 칸트의 '초월론적 비판' 또한 유머러스한 것으로 규정짓는다. '초월론적'이란 어떤 종류의 '정신적 태도'이며 '자기 이중화'이기에 유머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머는 마침내 마르크스에게까지 전염된다. 즉 "자기는 세계(역사) 안에 있으며, 그것을 초월할 수 없다, 초월한다는 믿음마저도 그것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는 초월론적 비판이야말로 '유물론'이며, 이는 그 무엇보다도 유머인 것이다."(131쪽) 그 유머를 유머로서 받아들이지 못할 때 우리는 이념을 맹신하는 민족주의·국가주의·원리주의자가 되거나 이념의 몰락 앞에서 상처받아 어떠한 이념도 경멸하고자 하는 아이러니스트 또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니힐리스트로 전락한다.

그렇다면, 아무나 유머리스트가 되는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다. 고진이 끝으로 인용하고 있는 프로이트에 의하면 유머적인 정신상태는 귀중한 천분이며 대개의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주는 유머적 쾌감을 맛볼 능력조차도 결여하고 있다. 요컨대 고진의 이 유머론에서 당신이 유머적 쾌감을 맛보지 못한다면 당신에겐 정신적 귀족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거나 결여돼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반대로 만약에 당신이 이렇게 요약된 글에서까지 유머를 발견하고 데굴데굴 구를 수 있는 정신상태로 무장돼 있다면, 굳이 개그콘서트를 보지 않더라도 세상이 얼마나 희극적이며 유머러스한가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민족시인이라 불리는 소월(1902-1934)의 시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유머를 쉽게 발견한다. 저다병(각기병)으로 고생하던 그는 끝내 아편을 먹고 자살하는데, 그의 아내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말년의 그는 마음 상하고 아프다고 술만 마셨다. 그리고 술잔만 들면 울기만 했다. 그런 그가 생의 막바지에 쓴 시가 <三水甲山>(1934)이다(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시이다).

三水甲山 내웨왔노 三水甲山이 어디뇨
오고나니 崎險타 아하 물도 많고 山첩첩이라 아하하

내고향을 돌우가자 내고향을 내못가네
三水甲山 멀드라 아하 蜀道之難이 예로구나 아하하

三水甲山이 어디뇨 내가오고 내못가네
不歸로다 내고향 아하 새가되면 떠가리라 아하하

님계신곳 내고향을 내못가네 내못가네
오다가다 야속타 아하 三水甲山이 날가두었네 아하하

내고향을 가고지고 오호 三水甲山이 날가두었네
不歸로다 내몸이야 아하 三水甲山 못버서난다 아하하

三水甲山은 우리 생의 조건이다. 그것은 '지구'라는 '인간의 조건'(한나 아렌트)이면서 '세계-내-존재'라는 현존재의 조건(하이데거)이다. 그러한 조건 속에서 우리는 不歸로서 현존한다. 나는 이 불귀가 고진이 말하는 유머에 상응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내 고향'이라는 종교 혹은 이념에 의해 구제될 수 있는 이들은, 그래서 三水甲山을 벗어날 수 있는 이들은 굳이 유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하하'라는 웃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장 높이 날면서 가장 멀리 보는 새들이나 본전 생각나면 이동하는 철새들 또한 유머와 무관하다. 유머를 필요로 하는 건 아침마다 꼬꼬댁하고 울어제끼는 촌닭들이나 두렵고 다급할 때마다 고개를 처박는 칠면조 같은 새들이다. 그 칠면조들의 칠면조다운 자기 초월에의 본능, 혹은 '자기 이중화'의 의지야말로 유머에 값한다. 말하자면, 칠면조는 유머를 아는 새이다. 그리고 소월은 우리가 자랑할 만한 칠면조이다.

 

 

 

 



지난 연말에 나온 '유머북' 가운데 걸작은 <니진스키 영혼의 절규>(푸른숲)이다. 러시아의 전설적인 무용가 니진스키 자신이 정신질환으로 투병하던 말년에 쓴 일기인데, <니진스키의 고백>(문예출판사, 1975)으로 부분 번역되었던 것이 이번에 같은 역자에 의해서 완역돼 나왔다. 이 책 어느 곳을 들춰도 소월의 '三水甲山' 못지 않은 유머들이 넘쳐나는데, 내가 특히 좋아하는 대목은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바라지 않는다. 아내는 울고 또 운다. 나 역시 운다..."(347쪽)로 시작하는 부분이다. 이 대목의 75년판 번역은 "나는 울고 싶은데 神은 내게 계속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빈들거리는 걸 원치 않는다. 내 처는 줄곧 울고 있다. 나 역시 운다..."(218쪽)이고, 영역은 "I want to cry but God orders me to go on writing. He does not want me to be idle. My wife is crying, crying. I also..."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보다는 '빈들거리는 걸'이란 번역이 더 마음에 든다. 나 또한 오늘도 빈들거리지 않고 이 글을 쓴다. 이건 신의 명령이자 다 아시겠지만, 유머이다.

2003. 01. 15.
* 북매거진 <텍스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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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가라타니 고진의 칸트 읽기(1)

 

지난 연말에 나온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5)을 미처 읽기도 전에 2005년의 책 가운데 한권으로 꼽기도 했으니까 나로선 이 책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기대를 부여한 것이 된다. 물론 아주 안 읽은 건 아니어서 (한국어판 서문을 비록하여) 저자의 서문 정도는 읽었고, '트랜스크리틱이란 무엇인가'란 서론은 내 기억에 <윤리21>(사회평론, 2001)에서도 읽은 바 있다(정확히 겹치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윤리21>은 박스에 들어가 있어서). 그러니 생짜로 호언을 한 것은 아니었던 것.

지난 며칠간 나는 책의 제1부 '칸트'를 영역본과 함께 거의 다 읽었는데(2부 '마르크스'는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다), 역시나 고진은 기대만큼의 힘, 비평의 힘을 보여준다. 나는 언제나 그의 비평이 좀더 긴 분량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는데, <트랜스크리틱>은 그런 바람도 상당 부분 충족시켜준다. 칸트에 관한 내용만 거의 200쪽이 되니까. 이런 것이 내가 갖는 만족감인 반면에 한편으론 책의 교정상태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미 일부에서 지적이 나오고 있지만, 인명의 오기에서부터 내용상의 오류에 이르기까지 국역본은 얼마간 교정되어야 할 대목들을 포함하고 있다. 당분간 짬짬이 고진의 칸트 읽기를 따라가면서 그런 내용들까지 지적하고자 한다. 분량상 몇 차례 나뉘어 진행될 것이다.

 

 

 

 

서론에 해당하는 '트랜스크리틱이란 무엇인가'를 제쳐놓으면 제1부의 제1장은 '칸트적 전회(The Kantian Turn)'이다. 칸트를 기점으로 사고의 물줄기가 바뀌었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이 '전회'는 "당시까지의 형이상학이, 주관이 외적 대상을 '모사'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주관이 외계에 '투입'한 형식에 의해 '대상'을 '구성'한다는 식으로 역전된 것을 의미한다."(65쪽) 요컨대, 모사론(모방론) 대 구성론인 것. 이걸 칸트 자신은 <순수이성비판>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불렀는데, 고진이 가장 먼저 밝히고자 하는 것은 지구(주관) 중심의 사고를 부정한 코페르니쿠스와 다소 상반된 것으로 보이는 '주관적' 구성주의가 어떻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값하는 것인가이다.

 

 

 

 

이에 대해서 고진은 단번에 '물자체'(와/혹은 '초월적 대상')에 대한 칸트식 사고에 그러한 전회(=혁명성)이 놓여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진에 따르면, 칸트가 주관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그래서 칸트가 세계를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주관성 철학의 시조로서 '잘못' 간주되었지만) 실상 칸트는 그러한 '소박한' 관념론을 부정한다. 이에 따라 고진은 칸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자체의 의미를 먼저 검토해보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토머스 쿤에 따르면(<과학혁명의 구조>가 아닌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의 인용이지만 후자는 아직 국역돼 있지 않다), 실상 자신이 죽은 해에 출간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1543)에서조차도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을 따르고 있다. 다만, 당시까지의 천동설에 따라다니는 천체 회전운동에서 보이는 어긋남(불일치)이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회전하는 것으로 보면 해소된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지동설인가 천동설인가가 아니라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나 태양을, 경험적으로 관찰되는 것과는 별도로 어떤 관계 구조의 항으로 파악한 일이다."(68쪽)

마찬가지로 칸트에게서도 중요한 것은 경험론(감각)이나 합리론(사유)이냐가 아니었다. 칸트가 도입한 감성의 형식이나 오성의 범주는 '초월론적인 구조'이며(이 점을 고진이 내내 강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나 태양이라고 불리는 것을 어떤 관계 안의 항으로 발견한 것과 같다." 이런 이유에서 고진은 토머스 쿤이 "프로이트 자신은, 지구는 단순한 혹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코페르니쿠스의 발견과, 무의식이 인간 행동의 대부분을 제어한다는 그의 발견의 병행적인 효과를 강조했다"고 지적한 것에 대해 부정확하다고 교정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획기적인 것은 '무의식이 인간 행동의 대부분을 제어한다'는 생각 자체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의 <꿈 판단>(*<꿈의 해석>이 왜 이렇게 번역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일역본은 정말 <꿈 판단>인 것인지?)이 보여준 것처럼,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어긋남을 초래하는 것을 언어적인 형식에서 보려고 한 데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무의식의 '초월론적인' 구조가 발견되었다"(69쪽)

 

 

 

 

칸트나 프로이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갖는 의미에 대한 토마스 쿤의 오해, 혹은 부족한 이해는 사실 그만의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통념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이고 통념적인 칸트상에 문제가 있으며 고진은 일차적으로 그걸 교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상식/통념은 "칸트가 말하는 형식이나 범주가 유클리드 기하학과 뉴턴 물리학에 기초한다는 오해이다." 사실, 칸트 철학이 '뉴턴 역학의 철학적 해명'이라는 건 대부분의 철학사나 철학 개론서들에서 반복하고 있는 통념이다. 한데, 고진은 그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칸트가 감성의 '형식'을 생각한 것은 오히려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가능성을 상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클리드적 칸트 대 비유클리드적 칸트?(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어진다.)

"칸트는 항상 주관성의 철학을 연 사람으로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칸트가 한 것은 인간의 주관적인 능력의 한계를 드러내고, 형이상학을 그 범주를 넘어선 '월권'행위로 보는 것이었다.(...) 칸트에게서 감성, 오성, 이성 등은 프로이트의 이드, 자아, 초자아와 마찬가지로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떤 작용으로 존재한다. 초월론적 통각(주관)도 마찬가지여서, 그것들을 하나의 체계이게 하는 작용으로 존재한다. 초월론적이라는 것은 무로서의 작용(존재)를 찾아낸다는 의미에서 초월론적(하이데거)이다. 동시에 '의식되지 않는' 구조를 본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정신분석적 또는 구조주의적이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칸트가 말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주관성 철학으로 전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 이루어진 '물자체'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로 전회하는 것이다."(72-3쪽)

 

 

 

 

그렇다면 '물자체' 무엇인가? 이 점에서 내가 보기에 고진의 독창성이 드러나는 것 같은데, 그는 '물자체'를 윤리적인 문제, 즉 '타자'의 문제로 본다: "'물자체'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직접적으로 말해지기 이전에 기본적으로 윤리적인 문제와 관련된다. 다시 말해 '타자'의 문제인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칸트의 '전회'가 '타자'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로의 전회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칸트 이후 호언장담해온 그 어떤 사상적 전회보다도 근원적이라는 사실이다."

단순하게 정리하면, 칸트의 '물자체'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마찬가지로 인간 이성/의식 주관적인 능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지동설'이며, 그런 의미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값한다. 이어지는 장들에서 고진이 자세히 드러내는 바이지만, 그러한 전회의 비밀을 고진은 <실천이상비판>이나 <판단력비판>에서 찾지 않고 <순수이성비판>에서 찾는다(이를 테면, <순수이성비판>은 칸트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그 비밀이란 '타자'의 발견과 그와 병행적인 윤리학적 문제의 제기에 놓여지며, 그것을 흔히 인식론에 관한 저작으로 읽히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독해해내는 것이 가라타니 고진의 득의의 전략이다(요컨대, <순수이성비판>을 윤리학 책으로 읽는 것이다).

이른바 <순수이성비판> 다시 읽기를 강제한다는 점에서, 고진의 '비평가'로서의 몫을 다하고 있다. '비평가'란 무엇보다도 우리로 하여금 다시 읽도록 만드는 이들을 가리키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틀렸습니다. 공부하세욧!"

06. 01. 09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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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가라타니 고진의 칸트 읽기(1)

 

지난 연말에 나온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5)을 미처 읽기도 전에 2005년의 책 가운데 한권으로 꼽기도 했으니까 나로선 이 책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기대를 부여한 것이 된다. 물론 아주 안 읽은 건 아니어서 (한국어판 서문을 비록하여) 저자의 서문 정도는 읽었고, '트랜스크리틱이란 무엇인가'란 서론은 내 기억에 <윤리21>(사회평론, 2001)에서도 읽은 바 있다(정확히 겹치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윤리21>은 박스에 들어가 있어서). 그러니 생짜로 호언을 한 것은 아니었던 것.

지난 며칠간 나는 책의 제1부 '칸트'를 영역본과 함께 거의 다 읽었는데(2부 '마르크스'는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다), 역시나 고진은 기대만큼의 힘, 비평의 힘을 보여준다. 나는 언제나 그의 비평이 좀더 긴 분량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는데, <트랜스크리틱>은 그런 바람도 상당 부분 충족시켜준다. 칸트에 관한 내용만 거의 200쪽이 되니까. 이런 것이 내가 갖는 만족감인 반면에 한편으론 책의 교정상태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미 일부에서 지적이 나오고 있지만, 인명의 오기에서부터 내용상의 오류에 이르기까지 국역본은 얼마간 교정되어야 할 대목들을 포함하고 있다. 당분간 짬짬이 고진의 칸트 읽기를 따라가면서 그런 내용들까지 지적하고자 한다. 분량상 몇 차례 나뉘어 진행될 것이다.

 

 

 

 

서론에 해당하는 '트랜스크리틱이란 무엇인가'를 제쳐놓으면 제1부의 제1장은 '칸트적 전회(The Kantian Turn)'이다. 칸트를 기점으로 사고의 물줄기가 바뀌었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이 '전회'는 "당시까지의 형이상학이, 주관이 외적 대상을 '모사'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주관이 외계에 '투입'한 형식에 의해 '대상'을 '구성'한다는 식으로 역전된 것을 의미한다."(65쪽) 요컨대, 모사론(모방론) 대 구성론인 것. 이걸 칸트 자신은 <순수이성비판>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불렀는데, 고진이 가장 먼저 밝히고자 하는 것은 지구(주관) 중심의 사고를 부정한 코페르니쿠스와 다소 상반된 것으로 보이는 '주관적' 구성주의가 어떻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값하는 것인가이다.

 

 

 

 

이에 대해서 고진은 단번에 '물자체'(와/혹은 '초월적 대상')에 대한 칸트식 사고에 그러한 전회(=혁명성)이 놓여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진에 따르면, 칸트가 주관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그래서 칸트가 세계를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주관성 철학의 시조로서 '잘못' 간주되었지만) 실상 칸트는 그러한 '소박한' 관념론을 부정한다. 이에 따라 고진은 칸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자체의 의미를 먼저 검토해보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토머스 쿤에 따르면(<과학혁명의 구조>가 아닌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의 인용이지만 후자는 아직 국역돼 있지 않다), 실상 자신이 죽은 해에 출간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1543)에서조차도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을 따르고 있다. 다만, 당시까지의 천동설에 따라다니는 천체 회전운동에서 보이는 어긋남(불일치)이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회전하는 것으로 보면 해소된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지동설인가 천동설인가가 아니라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나 태양을, 경험적으로 관찰되는 것과는 별도로 어떤 관계 구조의 항으로 파악한 일이다."(68쪽)

마찬가지로 칸트에게서도 중요한 것은 경험론(감각)이나 합리론(사유)이냐가 아니었다. 칸트가 도입한 감성의 형식이나 오성의 범주는 '초월론적인 구조'이며(이 점을 고진이 내내 강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나 태양이라고 불리는 것을 어떤 관계 안의 항으로 발견한 것과 같다." 이런 이유에서 고진은 토머스 쿤이 "프로이트 자신은, 지구는 단순한 혹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코페르니쿠스의 발견과, 무의식이 인간 행동의 대부분을 제어한다는 그의 발견의 병행적인 효과를 강조했다"고 지적한 것에 대해 부정확하다고 교정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획기적인 것은 '무의식이 인간 행동의 대부분을 제어한다'는 생각 자체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의 <꿈 판단>(*<꿈의 해석>이 왜 이렇게 번역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일역본은 정말 <꿈 판단>인 것인지?)이 보여준 것처럼,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어긋남을 초래하는 것을 언어적인 형식에서 보려고 한 데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무의식의 '초월론적인' 구조가 발견되었다"(69쪽)

 

 

 

 

칸트나 프로이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갖는 의미에 대한 토마스 쿤의 오해, 혹은 부족한 이해는 사실 그만의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통념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이고 통념적인 칸트상에 문제가 있으며 고진은 일차적으로 그걸 교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상식/통념은 "칸트가 말하는 형식이나 범주가 유클리드 기하학과 뉴턴 물리학에 기초한다는 오해이다." 사실, 칸트 철학이 '뉴턴 역학의 철학적 해명'이라는 건 대부분의 철학사나 철학 개론서들에서 반복하고 있는 통념이다. 한데, 고진은 그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칸트가 감성의 '형식'을 생각한 것은 오히려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가능성을 상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클리드적 칸트 대 비유클리드적 칸트?(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어진다.)

"칸트는 항상 주관성의 철학을 연 사람으로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칸트가 한 것은 인간의 주관적인 능력의 한계를 드러내고, 형이상학을 그 범주를 넘어선 '월권'행위로 보는 것이었다.(...) 칸트에게서 감성, 오성, 이성 등은 프로이트의 이드, 자아, 초자아와 마찬가지로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떤 작용으로 존재한다. 초월론적 통각(주관)도 마찬가지여서, 그것들을 하나의 체계이게 하는 작용으로 존재한다. 초월론적이라는 것은 무로서의 작용(존재)를 찾아낸다는 의미에서 초월론적(하이데거)이다. 동시에 '의식되지 않는' 구조를 본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정신분석적 또는 구조주의적이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칸트가 말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주관성 철학으로 전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 이루어진 '물자체'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로 전회하는 것이다."(72-3쪽)

 

 

 

 

그렇다면 '물자체' 무엇인가? 이 점에서 내가 보기에 고진의 독창성이 드러나는 것 같은데, 그는 '물자체'를 윤리적인 문제, 즉 '타자'의 문제로 본다: "'물자체'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직접적으로 말해지기 이전에 기본적으로 윤리적인 문제와 관련된다. 다시 말해 '타자'의 문제인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칸트의 '전회'가 '타자'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로의 전회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칸트 이후 호언장담해온 그 어떤 사상적 전회보다도 근원적이라는 사실이다."

단순하게 정리하면, 칸트의 '물자체'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마찬가지로 인간 이성/의식 주관적인 능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지동설'이며, 그런 의미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값한다. 이어지는 장들에서 고진이 자세히 드러내는 바이지만, 그러한 전회의 비밀을 고진은 <실천이상비판>이나 <판단력비판>에서 찾지 않고 <순수이성비판>에서 찾는다(이를 테면, <순수이성비판>은 칸트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그 비밀이란 '타자'의 발견과 그와 병행적인 윤리학적 문제의 제기에 놓여지며, 그것을 흔히 인식론에 관한 저작으로 읽히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독해해내는 것이 가라타니 고진의 득의의 전략이다(요컨대, <순수이성비판>을 윤리학 책으로 읽는 것이다).

이른바 <순수이성비판> 다시 읽기를 강제한다는 점에서, 고진의 '비평가'로서의 몫을 다하고 있다. '비평가'란 무엇보다도 우리로 하여금 다시 읽도록 만드는 이들을 가리키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틀렸습니다. 공부하세욧!"

06. 01. 09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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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가라타니 고진의 칸트 읽기(1)

 

지난 연말에 나온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5)을 미처 읽기도 전에 2005년의 책 가운데 한권으로 꼽기도 했으니까 나로선 이 책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기대를 부여한 것이 된다. 물론 아주 안 읽은 건 아니어서 (한국어판 서문을 비록하여) 저자의 서문 정도는 읽었고, '트랜스크리틱이란 무엇인가'란 서론은 내 기억에 <윤리21>(사회평론, 2001)에서도 읽은 바 있다(정확히 겹치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윤리21>은 박스에 들어가 있어서). 그러니 생짜로 호언을 한 것은 아니었던 것.

지난 며칠간 나는 책의 제1부 '칸트'를 영역본과 함께 거의 다 읽었는데(2부 '마르크스'는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다), 역시나 고진은 기대만큼의 힘, 비평의 힘을 보여준다. 나는 언제나 그의 비평이 좀더 긴 분량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는데, <트랜스크리틱>은 그런 바람도 상당 부분 충족시켜준다. 칸트에 관한 내용만 거의 200쪽이 되니까. 이런 것이 내가 갖는 만족감인 반면에 한편으론 책의 교정상태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미 일부에서 지적이 나오고 있지만, 인명의 오기에서부터 내용상의 오류에 이르기까지 국역본은 얼마간 교정되어야 할 대목들을 포함하고 있다. 당분간 짬짬이 고진의 칸트 읽기를 따라가면서 그런 내용들까지 지적하고자 한다. 분량상 몇 차례 나뉘어 진행될 것이다.

 

 

 

 

서론에 해당하는 '트랜스크리틱이란 무엇인가'를 제쳐놓으면 제1부의 제1장은 '칸트적 전회(The Kantian Turn)'이다. 칸트를 기점으로 사고의 물줄기가 바뀌었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이 '전회'는 "당시까지의 형이상학이, 주관이 외적 대상을 '모사'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주관이 외계에 '투입'한 형식에 의해 '대상'을 '구성'한다는 식으로 역전된 것을 의미한다."(65쪽) 요컨대, 모사론(모방론) 대 구성론인 것. 이걸 칸트 자신은 <순수이성비판>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불렀는데, 고진이 가장 먼저 밝히고자 하는 것은 지구(주관) 중심의 사고를 부정한 코페르니쿠스와 다소 상반된 것으로 보이는 '주관적' 구성주의가 어떻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값하는 것인가이다.

 

 

 

 

이에 대해서 고진은 단번에 '물자체'(와/혹은 '초월적 대상')에 대한 칸트식 사고에 그러한 전회(=혁명성)이 놓여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진에 따르면, 칸트가 주관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그래서 칸트가 세계를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주관성 철학의 시조로서 '잘못' 간주되었지만) 실상 칸트는 그러한 '소박한' 관념론을 부정한다. 이에 따라 고진은 칸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자체의 의미를 먼저 검토해보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토머스 쿤에 따르면(<과학혁명의 구조>가 아닌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의 인용이지만 후자는 아직 국역돼 있지 않다), 실상 자신이 죽은 해에 출간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1543)에서조차도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을 따르고 있다. 다만, 당시까지의 천동설에 따라다니는 천체 회전운동에서 보이는 어긋남(불일치)이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회전하는 것으로 보면 해소된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지동설인가 천동설인가가 아니라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나 태양을, 경험적으로 관찰되는 것과는 별도로 어떤 관계 구조의 항으로 파악한 일이다."(68쪽)

마찬가지로 칸트에게서도 중요한 것은 경험론(감각)이나 합리론(사유)이냐가 아니었다. 칸트가 도입한 감성의 형식이나 오성의 범주는 '초월론적인 구조'이며(이 점을 고진이 내내 강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나 태양이라고 불리는 것을 어떤 관계 안의 항으로 발견한 것과 같다." 이런 이유에서 고진은 토머스 쿤이 "프로이트 자신은, 지구는 단순한 혹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코페르니쿠스의 발견과, 무의식이 인간 행동의 대부분을 제어한다는 그의 발견의 병행적인 효과를 강조했다"고 지적한 것에 대해 부정확하다고 교정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획기적인 것은 '무의식이 인간 행동의 대부분을 제어한다'는 생각 자체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의 <꿈 판단>(*<꿈의 해석>이 왜 이렇게 번역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일역본은 정말 <꿈 판단>인 것인지?)이 보여준 것처럼,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어긋남을 초래하는 것을 언어적인 형식에서 보려고 한 데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무의식의 '초월론적인' 구조가 발견되었다"(69쪽)

 

 

 

 

칸트나 프로이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갖는 의미에 대한 토마스 쿤의 오해, 혹은 부족한 이해는 사실 그만의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통념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이고 통념적인 칸트상에 문제가 있으며 고진은 일차적으로 그걸 교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상식/통념은 "칸트가 말하는 형식이나 범주가 유클리드 기하학과 뉴턴 물리학에 기초한다는 오해이다." 사실, 칸트 철학이 '뉴턴 역학의 철학적 해명'이라는 건 대부분의 철학사나 철학 개론서들에서 반복하고 있는 통념이다. 한데, 고진은 그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칸트가 감성의 '형식'을 생각한 것은 오히려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가능성을 상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클리드적 칸트 대 비유클리드적 칸트?(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어진다.)

"칸트는 항상 주관성의 철학을 연 사람으로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칸트가 한 것은 인간의 주관적인 능력의 한계를 드러내고, 형이상학을 그 범주를 넘어선 '월권'행위로 보는 것이었다.(...) 칸트에게서 감성, 오성, 이성 등은 프로이트의 이드, 자아, 초자아와 마찬가지로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떤 작용으로 존재한다. 초월론적 통각(주관)도 마찬가지여서, 그것들을 하나의 체계이게 하는 작용으로 존재한다. 초월론적이라는 것은 무로서의 작용(존재)를 찾아낸다는 의미에서 초월론적(하이데거)이다. 동시에 '의식되지 않는' 구조를 본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정신분석적 또는 구조주의적이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칸트가 말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주관성 철학으로 전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 이루어진 '물자체'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로 전회하는 것이다."(72-3쪽)

 

 

 

 

그렇다면 '물자체' 무엇인가? 이 점에서 내가 보기에 고진의 독창성이 드러나는 것 같은데, 그는 '물자체'를 윤리적인 문제, 즉 '타자'의 문제로 본다: "'물자체'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직접적으로 말해지기 이전에 기본적으로 윤리적인 문제와 관련된다. 다시 말해 '타자'의 문제인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칸트의 '전회'가 '타자'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로의 전회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칸트 이후 호언장담해온 그 어떤 사상적 전회보다도 근원적이라는 사실이다."

단순하게 정리하면, 칸트의 '물자체'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마찬가지로 인간 이성/의식 주관적인 능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지동설'이며, 그런 의미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값한다. 이어지는 장들에서 고진이 자세히 드러내는 바이지만, 그러한 전회의 비밀을 고진은 <실천이상비판>이나 <판단력비판>에서 찾지 않고 <순수이성비판>에서 찾는다(이를 테면, <순수이성비판>은 칸트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그 비밀이란 '타자'의 발견과 그와 병행적인 윤리학적 문제의 제기에 놓여지며, 그것을 흔히 인식론에 관한 저작으로 읽히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독해해내는 것이 가라타니 고진의 득의의 전략이다(요컨대, <순수이성비판>을 윤리학 책으로 읽는 것이다).

이른바 <순수이성비판> 다시 읽기를 강제한다는 점에서, 고진의 '비평가'로서의 몫을 다하고 있다. '비평가'란 무엇보다도 우리로 하여금 다시 읽도록 만드는 이들을 가리키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틀렸습니다. 공부하세욧!"

06. 01. 09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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