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가라타니 고진의 칸트 읽기(1)

 

지난 연말에 나온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5)을 미처 읽기도 전에 2005년의 책 가운데 한권으로 꼽기도 했으니까 나로선 이 책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기대를 부여한 것이 된다. 물론 아주 안 읽은 건 아니어서 (한국어판 서문을 비록하여) 저자의 서문 정도는 읽었고, '트랜스크리틱이란 무엇인가'란 서론은 내 기억에 <윤리21>(사회평론, 2001)에서도 읽은 바 있다(정확히 겹치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윤리21>은 박스에 들어가 있어서). 그러니 생짜로 호언을 한 것은 아니었던 것.

지난 며칠간 나는 책의 제1부 '칸트'를 영역본과 함께 거의 다 읽었는데(2부 '마르크스'는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다), 역시나 고진은 기대만큼의 힘, 비평의 힘을 보여준다. 나는 언제나 그의 비평이 좀더 긴 분량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는데, <트랜스크리틱>은 그런 바람도 상당 부분 충족시켜준다. 칸트에 관한 내용만 거의 200쪽이 되니까. 이런 것이 내가 갖는 만족감인 반면에 한편으론 책의 교정상태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미 일부에서 지적이 나오고 있지만, 인명의 오기에서부터 내용상의 오류에 이르기까지 국역본은 얼마간 교정되어야 할 대목들을 포함하고 있다. 당분간 짬짬이 고진의 칸트 읽기를 따라가면서 그런 내용들까지 지적하고자 한다. 분량상 몇 차례 나뉘어 진행될 것이다.

 

 

 

 

서론에 해당하는 '트랜스크리틱이란 무엇인가'를 제쳐놓으면 제1부의 제1장은 '칸트적 전회(The Kantian Turn)'이다. 칸트를 기점으로 사고의 물줄기가 바뀌었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이 '전회'는 "당시까지의 형이상학이, 주관이 외적 대상을 '모사'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주관이 외계에 '투입'한 형식에 의해 '대상'을 '구성'한다는 식으로 역전된 것을 의미한다."(65쪽) 요컨대, 모사론(모방론) 대 구성론인 것. 이걸 칸트 자신은 <순수이성비판>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불렀는데, 고진이 가장 먼저 밝히고자 하는 것은 지구(주관) 중심의 사고를 부정한 코페르니쿠스와 다소 상반된 것으로 보이는 '주관적' 구성주의가 어떻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값하는 것인가이다.

 

 

 

 

이에 대해서 고진은 단번에 '물자체'(와/혹은 '초월적 대상')에 대한 칸트식 사고에 그러한 전회(=혁명성)이 놓여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진에 따르면, 칸트가 주관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그래서 칸트가 세계를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주관성 철학의 시조로서 '잘못' 간주되었지만) 실상 칸트는 그러한 '소박한' 관념론을 부정한다. 이에 따라 고진은 칸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자체의 의미를 먼저 검토해보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토머스 쿤에 따르면(<과학혁명의 구조>가 아닌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의 인용이지만 후자는 아직 국역돼 있지 않다), 실상 자신이 죽은 해에 출간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1543)에서조차도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을 따르고 있다. 다만, 당시까지의 천동설에 따라다니는 천체 회전운동에서 보이는 어긋남(불일치)이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회전하는 것으로 보면 해소된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지동설인가 천동설인가가 아니라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나 태양을, 경험적으로 관찰되는 것과는 별도로 어떤 관계 구조의 항으로 파악한 일이다."(68쪽)

마찬가지로 칸트에게서도 중요한 것은 경험론(감각)이나 합리론(사유)이냐가 아니었다. 칸트가 도입한 감성의 형식이나 오성의 범주는 '초월론적인 구조'이며(이 점을 고진이 내내 강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나 태양이라고 불리는 것을 어떤 관계 안의 항으로 발견한 것과 같다." 이런 이유에서 고진은 토머스 쿤이 "프로이트 자신은, 지구는 단순한 혹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코페르니쿠스의 발견과, 무의식이 인간 행동의 대부분을 제어한다는 그의 발견의 병행적인 효과를 강조했다"고 지적한 것에 대해 부정확하다고 교정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획기적인 것은 '무의식이 인간 행동의 대부분을 제어한다'는 생각 자체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의 <꿈 판단>(*<꿈의 해석>이 왜 이렇게 번역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일역본은 정말 <꿈 판단>인 것인지?)이 보여준 것처럼,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어긋남을 초래하는 것을 언어적인 형식에서 보려고 한 데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무의식의 '초월론적인' 구조가 발견되었다"(69쪽)

 

 

 

 

칸트나 프로이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갖는 의미에 대한 토마스 쿤의 오해, 혹은 부족한 이해는 사실 그만의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통념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이고 통념적인 칸트상에 문제가 있으며 고진은 일차적으로 그걸 교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상식/통념은 "칸트가 말하는 형식이나 범주가 유클리드 기하학과 뉴턴 물리학에 기초한다는 오해이다." 사실, 칸트 철학이 '뉴턴 역학의 철학적 해명'이라는 건 대부분의 철학사나 철학 개론서들에서 반복하고 있는 통념이다. 한데, 고진은 그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칸트가 감성의 '형식'을 생각한 것은 오히려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가능성을 상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클리드적 칸트 대 비유클리드적 칸트?(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어진다.)

"칸트는 항상 주관성의 철학을 연 사람으로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칸트가 한 것은 인간의 주관적인 능력의 한계를 드러내고, 형이상학을 그 범주를 넘어선 '월권'행위로 보는 것이었다.(...) 칸트에게서 감성, 오성, 이성 등은 프로이트의 이드, 자아, 초자아와 마찬가지로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떤 작용으로 존재한다. 초월론적 통각(주관)도 마찬가지여서, 그것들을 하나의 체계이게 하는 작용으로 존재한다. 초월론적이라는 것은 무로서의 작용(존재)를 찾아낸다는 의미에서 초월론적(하이데거)이다. 동시에 '의식되지 않는' 구조를 본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정신분석적 또는 구조주의적이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칸트가 말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주관성 철학으로 전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 이루어진 '물자체'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로 전회하는 것이다."(72-3쪽)

 

 

 

 

그렇다면 '물자체' 무엇인가? 이 점에서 내가 보기에 고진의 독창성이 드러나는 것 같은데, 그는 '물자체'를 윤리적인 문제, 즉 '타자'의 문제로 본다: "'물자체'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직접적으로 말해지기 이전에 기본적으로 윤리적인 문제와 관련된다. 다시 말해 '타자'의 문제인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칸트의 '전회'가 '타자'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로의 전회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칸트 이후 호언장담해온 그 어떤 사상적 전회보다도 근원적이라는 사실이다."

단순하게 정리하면, 칸트의 '물자체'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마찬가지로 인간 이성/의식 주관적인 능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지동설'이며, 그런 의미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값한다. 이어지는 장들에서 고진이 자세히 드러내는 바이지만, 그러한 전회의 비밀을 고진은 <실천이상비판>이나 <판단력비판>에서 찾지 않고 <순수이성비판>에서 찾는다(이를 테면, <순수이성비판>은 칸트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그 비밀이란 '타자'의 발견과 그와 병행적인 윤리학적 문제의 제기에 놓여지며, 그것을 흔히 인식론에 관한 저작으로 읽히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독해해내는 것이 가라타니 고진의 득의의 전략이다(요컨대, <순수이성비판>을 윤리학 책으로 읽는 것이다).

이른바 <순수이성비판> 다시 읽기를 강제한다는 점에서, 고진의 '비평가'로서의 몫을 다하고 있다. '비평가'란 무엇보다도 우리로 하여금 다시 읽도록 만드는 이들을 가리키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틀렸습니다. 공부하세욧!"

06. 01. 09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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