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52)

비가 제법 많이 내리는, 어느덧 9월의 마지막날이다. 지난번 연재의 글을 쓴 게 '그 여름의 끝'이었는데, 그 새 한달이 지난 것. 10월의 마지막 날(정확히는 '밤')만큼 운치가 있거나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9월의 마지막 날을 '기념'해서 몇 권의 책을 꼽아본다. 사실 지난 한달은 지난 2월에 귀국한 이래 나의 취향에  맞는 책이 가장 적게 출간된 달이기도 하다. 해서, 이 연재가 다소 늦어진 것은 나의 게으름과 무관하다는 걸 미리 알려드린다(소수의 애독자분들이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첫손가락에 꼽고 싶은 책은 브라이언 매기의 <트리스탄 코드>(심산)이다. '바그너와 철학'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데, 소개에 따르면 "바그너의 음악에 미친 철학의 영향"을 주로 밝히면서 "그 영향이 그의 오페라 -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파르지팔', 그리고 특히 '니벨룽의 반지' - 에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보여준다." 계속 옮겨오자면, "또한 지은이는 예술적 천재인 바그너뿐만이 아니라 역겨울 정도로 심한 편집증과 이기주의 성향을 지닌 바그너까지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바그너가 어린 니체와 나눈 길고도 친밀한 친교와 영향 관계도 다루고 있다. 그 다음으로 저자는 바그너가 가장 크게 오해받는 나치와의 연관이 허상이라는 해명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였다."

알다시피 지난 토요일부터 어제까지 러시아의 거장 게르기예프의 지휘로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가 국내 초연되었다(4부작의 18시간짜리 공연).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규모나 지명도로 봐서는 '올해의 공연'으로 꼽힐 만한 대작이다. 이와 무관하지 않겠지만, 이 달에는 바그너와 그의 오페라에 관련된 책들이 몇 권 출간됐고, <트린스탄 코드>도 그 중 하나이다. 일단 시의성이 있는 책. 게다가 나로선 저자의 책들을 읽어본 경험이 있어서 친숙하고 또 600쪽이 넘는 분량도 미덥기 때문에 이 책에 높은 점수를 주게 된다.

저자인 브라이언 매기는 전형적인 옥스포드 철학자라는 인상을 주는데, 내가 읽어본 그의 책은 <현대 철학의 쟁점들은 무엇인가>(심설당, 1989)란 두툼한 책과 <칼 포퍼>(문학과지성사, 1982)란 얇은 책이다(내가 읽지 않았지만, 철학입문서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시공사, 2002)도 나와 있다. 원제는 '철학 이야기'). <현대 철학의 쟁점>은, 기억에 여러 철학자/작가들과 나눈 방송대담인데, '철학과 문학'이란 주제에 대해서는 영국 최고의 지성파 여성작가 아이리스 머독과 나눈 대담을 기록하고 있다. 철학입문서로 추천할 만하다.

바그너의 음악에 대해서 문외한이기 때문에, 니체와의 관련(<바그너의 경우>)을 제외하면 바그너란 이름이 내게 떠올려주는 이는 대학 1학년때 교양영어를 강의하신 시인-교수님이다. 교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글이 괴물-천재 음악가 바그너에 관한 에세이였고, 그걸 빌미로 해서 바그너와 그의 음악세계에 대해 귀동냥을 했던 것이 바그너에 대한 나의 상식/교양의 8할을 차지한다. 나머지 2할? 코폴라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등장하는 주제음악(바그너와 영화음악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단골 레퍼토리이다). 그것이 내가 경험한 '바그너'의 거의 전부인바, 작년에 나는 이 영화의 러시아판 비디오CD(감독판)를 사서 보기도 했다. 혹 10년쯤 후엔 <니벨룽의 반지>를 '경험'하고픈 욕심과 여유를 갖게 될는지 모를 일이다.(한편, 1952년에 독어본이 나왔던 아도르노의 바그너론이 <바그너를 찾아서(In Search of Wagner)>란 제목으로 1981년에 영역됐었고, 올해 개정판이 나왔다. 개정판의 서문은 '오페라광' 슬라보예 지젝이 쓰고 있다).  

 

두번째 책은 미술에 관한 것이다. 스티븐 컨의 <문학과 예술의 문화사 1840-1900>(휴머니스트). 원제는 '사랑의 눈길들: 1840-1900년 영국과 프랑스의 회화와 소설에 나타난 시선'이다. 원제는 책의 내용과 주제에 대해서 대부분을 이미 말해주는데, 작년에 나온 같은 저자의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1880-1918>(휴머니스트)와 짝을 이루는 책이다. 저자는 "19세기 문화의 중심이었던 영국과 프랑스의 회화와 문학 속 '남녀의 시선'에 주목"하며,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에서와 마찬가지로 "19세기를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하고 전방위적으로 조명하는 솜씨를 보여준"다고. "보들레르, 빅토르 위고, 조지 엘리엇, 토머스 하디, 샬럿 브론테 등의 시와 소설, 그리고 130여 점의 고갱, 르누아르, 드가, 마네, 밀레이, 로세티, 티소, 번 존스 등의 회화 작품들이 풍성하게 등장"한단다. 그러니 19세기 문화사 도감으로라도 서가에 꽂아둘 만하지 않은가? 참고로 20세기 프랑스 철학에서의 시선의 문제를 다룬 책으론 마틴 제이의  <내리깐 시선(Downcast eyes : the denigration of vision in twentieth-century French thought)>(1993, 632쪽)이 방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일종의 지성사. 마틴 제이는 <변증법적 상상력: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역사와 이론, 1923-1950>(돌베개, 1981)의 저자이다.

 

 

 

 

세번째 책은 세 권의 시집이다. <유랑시인>(한길사)은 "우크라니아의 역사와 시정(詩情)을 탁월하게 묘사해 우크라이나의 국민시인으로 추앙받는 타라스 셰브첸코의 대표 장시(長詩) 21편을 엄선해 묶은 책. 맑고 순수한 개인적 정서를 노래한 서정시나 환상적 담시뿐만 아니라,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는 우크라이나의 역사와 현실을 소재로 삼거나 억압적 정치 체제와 농노제를 반대하는 혁명적 정치사상을 담고 있는 주요 시들을 싣고 있다." 더불어 꽤 많은 분량의 충실한 해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평전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고. 작년인 2004년 겨울 '오렌지 혁명'으로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우크라이나는 얼마전 유센코(유시첸코) 대통령이 혁명의 동지이자 상징이었던 티모센코 총리와 갈라섬으로써 다시금 외신란에 오르내렸는데(정치의 꽃 또한 '화무십일홍'이다), <유랑시인>은 좀 다른 역사적 맥락과 시각에서 우크라이나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줄 듯하다.

 

 

 

 

 

참고로, 우크라이나 출신의 가장 위대한 작가는 니콜라이 고골(1809-1852)이지만, 그는 (우크라이나어가 아닌) 러시아어로 썼다. 그는 우크라이나 민속과 민담을 소재로 한 <지칸카 근촌 야화>(8편의 이야기 가운데, 6편이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만 절판됐다)로 러시아문단에 데뷔하게 되며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 <대장 불바(불리바)>를 쓰기도 했다(우리에겐 주로 '아동물'로 소개돼 있다). 드라마작가로서의 그의 대표작은 <검찰관>(1836)인바, 이 책은 얼마전에 새 번역본이 출간됐다(조주관 역, 민음사). 그리고 이 작품은 10월에 러시아의 저명한 연출가 발레리 포킨이 이끄는 알렉산드린스키 극단에 의해 '(수원)경기도문화의전당'과 '(서울)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된다. 포킨의 <검찰관>은 1910-20년대 혁신적인 연출가 메이에르홀드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메이에르홀드의 <검찰관> 초연은 지난 1926년 겨울에 있었고, 벤야민은 그 공연을 직접 본 소감을 <모스크바 일기>(그린비)에 간단히 적고 있다(이 '전설적인' 공연에 대해서 벤야민이나 당대 관객들은 다소 불만이었는데, 배우였던 메이에르홀드의 아내가 너무 '설쳤다'는 것도 불만의 한 이유였다). 나는 오늘 포킨의 공연을 예매했다. 

 

 

 

 

두번째 시집은 한국계 러시아 음유시인 율리 김의 내한공연에 맞춰 출간된 <율리 김, 자유를 노래하다>(뿌쉬낀하우스)이다. 공연은 10월말로 예정돼 있는데, 이번에 나온 시집에는 그의 음반 2장이 부록으로 포함돼 있다. 율리 김이란 이름을 나는 작년에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처음 듣게 되었는데, 한국계 가수로는 대중가요를 부르는 '아니타 최'(빅토르 최와는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이름 자체는 빅토르 최를 연상시킨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요절한 로커 빅토르 최는 러시안 록의 '전설'이다)와 함께 두드러진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20세기 후반 러시아의 가장 대표적인 음유시인은 아르바트거리에 동상이 세워져 있기도 한 오쿠자바(아꾸자바)이다. 그의 시집은 <나의 사랑, 나의 인생>(새미, 2001)으로 번역/소개돼 있다. 오쿠자바가 서정적이라면 내가 TV에서 자주 들은 율리 김의 노래는 경쾌하면서도 서정적이고 유머러스했다. 동시대 러시아 음유시인의 계보를 한국계 러시아인이 잇고 있다는 사실은 기분 좋은 일이다.

 

 

 

 

세번째 시집은 평론가를 겸하고 있는 권혁웅 시인의 <마징가 계보학>(창비)이다. 오늘자 한겨레의 북리뷰란에서 크게 소개된바 있으므로 중언부언할 필요는 없겠다. 그 리뷰는 '산동네의 추억, 아픔 삭인 너스레'란 제목을 달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요즘시의 대표적인 경향이라고 하는 '추의 미학' 혹은 '엽기시'로부터 그의 시들이 한 걸음 떨어져 있다는 걸 암시받을 수 있다. 최재봉 기자의 연상대로, 시집은 유하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같은 시집들을 떠올리게도 하는데, 권혁웅은 '성북구 삼선동' 키드쯤 된다. 삼선동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70년대말 서울 산동네의 풍경이라는 것은 어림짐작할 수 있는 바다. 산동네 이야기라는 점에서 최기자는 이번 시집을 요절 작가 김소진의 <장석조네 사람들>의 시적 버전이라고도 평한다. 아무려나 그 시절, 그 동네의 얘기가 마음을 잡아끌 만한 독자들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시인 권혁웅보다 내게 익숙한 건 평론가, 혹은 문학연구자 권혁웅이다. 나는 그의 학위논문이기도 한 <한국 현대시의 시작방법 연구>(깊은샘, 2001)를 좀 읽어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 그는 은유, 환유, 제유라는 세 가지 수사학(적 전략)으로 한국 현대시작법의 계통을 세우려고 시도했다. 적어도 나의 견문으론 우리시 연구에서 시의 의미론이나 주제론 이전에 통사론에 주목하고 이를 자세하게 분석해 들어가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그것이 전문연구서들을 그닥 많이 들여다보는 편이 아니면서도 그의 책을 사서 읽어본 이유이다.(한편으로 얼마전 나는 한 술자리에서 이 시인-평론가와 몇 마디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엽기시' 계열을 쓸 수 없을 것 같은, 푸근하고 마음씨 좋은 시인이었다. 단, '고스톱에 관한 보고서' 같은 제목의 시들로 미루어보건대, 그와 고스톱을 치는 것만은 삼가해야 할 듯. 짐작에 그는 마음좋게 피박, 광박 다 덮어씌울 '실력자'이므로).  

 

 

 

 

 

다시 책얘기로 돌아와서, 네번째 책은 원로 철학자 박이문 선생의 <논어의 논리>(문학과지성사)이다. 그의 <노장사상>(문학과지성사, 2004, 개정판)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번의 '논어 이야기'에도 눈길이 갈 만하다. 저자가 비록 서양철학 전공자이긴 하나 글에서 논리(로고스)를 끌어내는 일에서 동서양의 분별은 사소하다. 고려대에서 동양철학을 가르치는 이승환 교수는 "나 자신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거울을 필요로 한다. 때로 거울은 내가 모르고 지내던 나의 모습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박이문 교수의 <논어의 논리>는 정작 우리 자신이 모르고 지내던 <논어>의 가치를 새롭게 드러내주는 거울과도 같은 책이다."라고 추천하고 있기도 하다. 너무도 많은 '논어'들 가운데, 분량이 가장 컴팩트하다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우리도 때로는 얇고 투명한 책들을 읽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논리'를 다룬 책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김경만 교수의 <담론과 해방>(궁리). '비판이론이 해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국내에서 나온 책으론 드물게도 서구 사회학 이론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는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저자는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모든 지식인이 이론적 비판을 통해 사회.정치.문화적 변동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믿음'이 강조되어 왔다고 지적하고, 이렇게 우리가 당연시하는 지식인들의 사회적.정치적 역할이 우리가 당연하다고 상정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저자의 말을 좀더 옮기면, "우리는 이제 고도로 추상적인 이론적 논의를 사회나 정치개혁에 도움이 안 된다는 구실로 외면하면서 하버마스 같이 평생 고도로 추상적인 이론을 추구해 온 이론가들을 한편으로는 존경하고 대접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버려야 할 때가 됐다" 더불어, "독자적 한국사회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서양의 이론에 의존해왔다는 자성만으로는 가능하지 않고, 그들 이론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그들과의 '비판적 대화'를 유도해냄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바로 그러한 '비판적 대화'의 시도인 셈.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출간된 이 책에 대한 반응은 뜨거운 듯하다. 단적으로 대가급 철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의 추천사는 이렇다(바우만의 책들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 "김경만은 <담론과 해방>에서 우리 시대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이 극복하려고 했던 장애물들, 즉 그들이 제기했지만 결국 적절한 답을 찾지 못했던 문제들, 또한 그들의 저작에서 제기되었어야 했지만 그들이 피하거나 간과했던 문제들이 무엇인가에 대해 폭넓게 분석하고 있다. 지식이 가지는 윤리적 영향력과 지식이 인간의 자유를 획득하는 데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진 어느 누구도 김경민의 분석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문제를 풀려는 미래의 모든 시도는 이 책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정도 반응이라면, '비판적 대화'의 물꼬는 트인 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경만 교수의 다른 책으론 작년초에 나온 <과학지식과 사회이론>(한길사)과 번역서 <지식과 사회의 상>(한길사, 2000)이 있다. 그런 '전력'에서 알 수 있지만, 저자는 과학/이론 사회학에 정통한, 한국에서는 좀 희귀한 사회학자이다. 참고로, 분야는 조금 다르지만, 도전적인 자세로 '이론 다시 읽기'를 시도하고 있는 책으론 두달쯤 전에 나온 산본마쓰의 <탈근대군주론>(갈무리)도 기억해둘 만하다. 나는 이 책의 번역서가 나오자마자 원서를 도서관에 주문해놓았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아마도 겨울쯤에나 읽어보게 될 듯하다. 그래, 그렇게 또 겨울이 올 것이다. 이 가을이 지나가면...

05. 09. 30.

 

 

 

 

P.S. 다섯 권에 꼽지는 않았지만, 눈에 띄는 책 중의 하나는 로베르 마조리의 <동물원에서 사라진 철학자>(마티)이다. 철학자들을 다루고 있는 책으론 좀 특이한데, "책에 실린 33개 항목들은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이나 촌극을 찍은 즉석사진과도 같다. 그 안에서 철학자는 특정 동물들에 대해 말하는데, 때로는 위대한 사상가들이 어리석은 소리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새나 개나 옴벌레를 묘사하면서 사상의 본질을 몇 마디 우화로 표현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힐데가르트는 고래를, 칸트는 코끼리를 전설의 동물처럼 생각했다. 디오게네스는 낙지를 먹다가 개에게 물려죽었다는 일화가 있고, 루소는 오랑우탄을 일종의 유사 인류로 보았다. 소크라테스의 전기가오리나 니체의 사자는 그들의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호라 할 만하다. 저자는 농담을 하는 척하면서, 한 철학자의 사상 세계를 슬쩍 일별하게 한다."(저자에 따르면, 들뢰즈/가타리는 '진드기', 데리다는 '고양이'와 짝지을 수 있다.) 

재치가 돋보이는 경쾌한 책인데, 프랑스에서 2005년 2월에 발간된 이 책은 2004년 7월 19일부터 8월 28일까지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 시옹'에 여름 특집으로 연재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얇은 분량이긴 해도) 굉장히 빨리 번역/소개되는 셈. 특별히 이 책이 눈에 띈 것은 책의 몇 장을 몇 달 전에 미리 읽어볼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정인즉슨, '저명한' 역자께서 몇몇 장의 검토를 의뢰해오셨기 때문인데, 돌이켜 생각하면 과분한 일이었다. 내가 의견을 덧붙일 만한 여지가 없는 깔끔한 번역이었기에...

그나저나 '동물원에서 사라진 철학자'들은 다 어디로 간 건가? 이들을 다시 데려와야 하나? 이젠 철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수의학도 배워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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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행간 > 오역의 음모
믿음에 대하여 - 행동하는 지성 동문선 현대신서 136
슬라보예 지젝 지음, 최생열 옮김 / 동문선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지젝의 글들, 특히 <깨지기 쉬운 절대성>,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그리고 압권인 이 책 <믿음에 대하여>(글라보이 지젝이라는 새로운 저자?) 등 기독교와 관련된 책들은 모두 오역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들이다. 특히 이 책은 짐작하기에 번역자는 초고를 그냥 넘겼으며, 출판사는 원고를 단 한번도 검토하지 않았을 것이다. 틀림없다. 물론 이 책이 번역자의 초고를 아무런 검토 없이 출판한 것이라 해도, 번역자는 애초에 이 책을 번역할 능력이 없었다. 대체 무슨 똥배짱이란 말인가? '케보이?'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음모를 상상하게 된다. 거의 비밀경전에 가까운 해독 불가능한 텍스트가 독자에게, 특히 인쇄된 문자 앞에서 주눅드는 독자에게 다양한 환상을 구성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는 것은 지젝이 라캉을 빌려 말하는 바로 그것, "환상은 스크린이다"가 아닌가? 설마 이 책의 번역과 같은 야만이 출판되었으랴? 우리는 이 비이성적인 폭력 앞에서 일관된 상징계를 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상징계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악마의 계략? 그렇다!

지젝은 서구사회에서 완전히 한물갔다고 여겨지는 텍스트들을 뒤져서는 "여기 바로 오늘의 우리를 위한 중요한 길이 있다!"고 소리치는 학자이다. 그렇게 헤겔이 쓰레기 더미에서 구출되었다. 그렇지만 지젝이게 그에게 일종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헤겔보다 더 중요한 것은 레닌주의, 나아가 지젝에게는 레닌주의의 원류가 되는 기독교이다. 지젝에게 기독교는 상징계의 종교인 유대교를 돌파한(환상을 횡단한) 실재계의 종교로 여겨진다. 예수의 십자가 상에서의 일성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는 지젝에게 상징계를 돌파한 주체의 절망인 동시에 자기 제정의 새출발을 알리는 탄성이기도 하다(여기서 지젝은 들뢰즈와 만난다). 그런데 현실의 기독교는 어떤가? 출구없이 보이는 상징계의 네트워크, 즉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체계로 기능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민중신학을 비롯해 7,80년대 제삼세계 신학들이 이 틀을 깨려 분투하였지만 역부족이었고,  라캉이 68에 대해 우려했던 것처럼, 오히려 상징계의 약점을 보강하는 체제신학으로 전락한 면도 없지 않다. 더 강력한 아버지! 현대 인문학이 기독교 신학에 무심해진 것이 이유가 없지는 않다. 특히 한국의 인문학은 종교학과 신학적 사유에서 거의 유아 수준에 있다. 그렇다.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가?

 

지젝은 기독교 신학의 사유에 새로운 출구를 열고 있다. 물론 그는 신학자가 아니다.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대개의 신학은 체제에 기능하는 도구로 전락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만일 종교, 혹은 제도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그 정신의 원류에서 기독교가 상징계를 돌파하여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는 어떤 모범을 간직하고 있다면, 이러한 모범은 그 어느 시대보다 '문화의 시대'인 오늘날 더욱 중요하다. 바로 여기서 음모론이 제게되는 것이다. 지젝의 새로운 기독교 읽기는 신학 내부의 작업이 아니라 외부의 작업이라는 점에서, 현존하는 기독교의 체제를 비판하는 내부의 움직임과 공명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만일 지젝이 <깨지기 쉬운 절대성>이라는 책의 부제에서 말했듯이, 기독교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유산을 가지고 있다면, 이 싸움의 당사자는 단지 신학에 국한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류의 유산일 뿐 아니라, 오늘날 전세계가 봉착한 위기에 하나의 빛을 밝히는 긴급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간 종교의 문제는 종교 내부의 문제라는 비상식이 상식으로 여겨졌다. 바로 이 비상식에 터하여 교권은 소중한 인류의 유산을 전유, 독점할 수 있었다. 지젝은 환상의 기제에 대한 탐구를 통해 종교와 신앙의 문제가 단지 제도적인 종교 내부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에 만연된 보편적인 삶의 문제임을 밝혀왔다. 그의 작업은 제도적인 종교권력의 독점적인 소유권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당연히 종교권력으로서는 매우 불온한 실천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지젝을 금서 목록에 올려야 할까? 제도종교가 그렇게 아둔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대책은? 바로 <믿음에 대하여>와 같이 그를 왜곡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독자의 접근을 막는 것이다. 혹은 이 책의 번역과 같이 무슨 비밀스런 암호집처럼 만들어 전혀 비판성 없는 새로운 숭배를 조직하는 것이다.  혹시 번역자나 출판사의 담당자는 교권과 모종의 커넥션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들 스스로 보수반동적 신앙인들일지도 모른다. 물론 추측이다. 그러나 냄새는 그들이 풍겼다.

 

이 글은 한결 아빠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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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행간 > 오역의 음모
믿음에 대하여 - 행동하는 지성 동문선 현대신서 136
슬라보예 지젝 지음, 최생열 옮김 / 동문선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지젝의 글들, 특히 <깨지기 쉬운 절대성>,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그리고 압권인 이 책 <믿음에 대하여>(글라보이 지젝이라는 새로운 저자?) 등 기독교와 관련된 책들은 모두 오역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들이다. 특히 이 책은 짐작하기에 번역자는 초고를 그냥 넘겼으며, 출판사는 원고를 단 한번도 검토하지 않았을 것이다. 틀림없다. 물론 이 책이 번역자의 초고를 아무런 검토 없이 출판한 것이라 해도, 번역자는 애초에 이 책을 번역할 능력이 없었다. 대체 무슨 똥배짱이란 말인가? '케보이?'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음모를 상상하게 된다. 거의 비밀경전에 가까운 해독 불가능한 텍스트가 독자에게, 특히 인쇄된 문자 앞에서 주눅드는 독자에게 다양한 환상을 구성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는 것은 지젝이 라캉을 빌려 말하는 바로 그것, "환상은 스크린이다"가 아닌가? 설마 이 책의 번역과 같은 야만이 출판되었으랴? 우리는 이 비이성적인 폭력 앞에서 일관된 상징계를 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상징계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악마의 계략? 그렇다!

지젝은 서구사회에서 완전히 한물갔다고 여겨지는 텍스트들을 뒤져서는 "여기 바로 오늘의 우리를 위한 중요한 길이 있다!"고 소리치는 학자이다. 그렇게 헤겔이 쓰레기 더미에서 구출되었다. 그렇지만 지젝이게 그에게 일종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헤겔보다 더 중요한 것은 레닌주의, 나아가 지젝에게는 레닌주의의 원류가 되는 기독교이다. 지젝에게 기독교는 상징계의 종교인 유대교를 돌파한(환상을 횡단한) 실재계의 종교로 여겨진다. 예수의 십자가 상에서의 일성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는 지젝에게 상징계를 돌파한 주체의 절망인 동시에 자기 제정의 새출발을 알리는 탄성이기도 하다(여기서 지젝은 들뢰즈와 만난다). 그런데 현실의 기독교는 어떤가? 출구없이 보이는 상징계의 네트워크, 즉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체계로 기능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민중신학을 비롯해 7,80년대 제삼세계 신학들이 이 틀을 깨려 분투하였지만 역부족이었고,  라캉이 68에 대해 우려했던 것처럼, 오히려 상징계의 약점을 보강하는 체제신학으로 전락한 면도 없지 않다. 더 강력한 아버지! 현대 인문학이 기독교 신학에 무심해진 것이 이유가 없지는 않다. 특히 한국의 인문학은 종교학과 신학적 사유에서 거의 유아 수준에 있다. 그렇다.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가?

 

지젝은 기독교 신학의 사유에 새로운 출구를 열고 있다. 물론 그는 신학자가 아니다.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대개의 신학은 체제에 기능하는 도구로 전락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만일 종교, 혹은 제도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그 정신의 원류에서 기독교가 상징계를 돌파하여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는 어떤 모범을 간직하고 있다면, 이러한 모범은 그 어느 시대보다 '문화의 시대'인 오늘날 더욱 중요하다. 바로 여기서 음모론이 제게되는 것이다. 지젝의 새로운 기독교 읽기는 신학 내부의 작업이 아니라 외부의 작업이라는 점에서, 현존하는 기독교의 체제를 비판하는 내부의 움직임과 공명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만일 지젝이 <깨지기 쉬운 절대성>이라는 책의 부제에서 말했듯이, 기독교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유산을 가지고 있다면, 이 싸움의 당사자는 단지 신학에 국한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류의 유산일 뿐 아니라, 오늘날 전세계가 봉착한 위기에 하나의 빛을 밝히는 긴급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간 종교의 문제는 종교 내부의 문제라는 비상식이 상식으로 여겨졌다. 바로 이 비상식에 터하여 교권은 소중한 인류의 유산을 전유, 독점할 수 있었다. 지젝은 환상의 기제에 대한 탐구를 통해 종교와 신앙의 문제가 단지 제도적인 종교 내부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에 만연된 보편적인 삶의 문제임을 밝혀왔다. 그의 작업은 제도적인 종교권력의 독점적인 소유권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당연히 종교권력으로서는 매우 불온한 실천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지젝을 금서 목록에 올려야 할까? 제도종교가 그렇게 아둔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대책은? 바로 <믿음에 대하여>와 같이 그를 왜곡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독자의 접근을 막는 것이다. 혹은 이 책의 번역과 같이 무슨 비밀스런 암호집처럼 만들어 전혀 비판성 없는 새로운 숭배를 조직하는 것이다.  혹시 번역자나 출판사의 담당자는 교권과 모종의 커넥션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들 스스로 보수반동적 신앙인들일지도 모른다. 물론 추측이다. 그러나 냄새는 그들이 풍겼다.

 

이 글은 한결 아빠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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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행간 > 오역의 음모
믿음에 대하여 - 행동하는 지성 동문선 현대신서 136
슬라보예 지젝 지음, 최생열 옮김 / 동문선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지젝의 글들, 특히 <깨지기 쉬운 절대성>,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그리고 압권인 이 책 <믿음에 대하여>(글라보이 지젝이라는 새로운 저자?) 등 기독교와 관련된 책들은 모두 오역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들이다. 특히 이 책은 짐작하기에 번역자는 초고를 그냥 넘겼으며, 출판사는 원고를 단 한번도 검토하지 않았을 것이다. 틀림없다. 물론 이 책이 번역자의 초고를 아무런 검토 없이 출판한 것이라 해도, 번역자는 애초에 이 책을 번역할 능력이 없었다. 대체 무슨 똥배짱이란 말인가? '케보이?'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음모를 상상하게 된다. 거의 비밀경전에 가까운 해독 불가능한 텍스트가 독자에게, 특히 인쇄된 문자 앞에서 주눅드는 독자에게 다양한 환상을 구성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는 것은 지젝이 라캉을 빌려 말하는 바로 그것, "환상은 스크린이다"가 아닌가? 설마 이 책의 번역과 같은 야만이 출판되었으랴? 우리는 이 비이성적인 폭력 앞에서 일관된 상징계를 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상징계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악마의 계략? 그렇다!

지젝은 서구사회에서 완전히 한물갔다고 여겨지는 텍스트들을 뒤져서는 "여기 바로 오늘의 우리를 위한 중요한 길이 있다!"고 소리치는 학자이다. 그렇게 헤겔이 쓰레기 더미에서 구출되었다. 그렇지만 지젝이게 그에게 일종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헤겔보다 더 중요한 것은 레닌주의, 나아가 지젝에게는 레닌주의의 원류가 되는 기독교이다. 지젝에게 기독교는 상징계의 종교인 유대교를 돌파한(환상을 횡단한) 실재계의 종교로 여겨진다. 예수의 십자가 상에서의 일성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는 지젝에게 상징계를 돌파한 주체의 절망인 동시에 자기 제정의 새출발을 알리는 탄성이기도 하다(여기서 지젝은 들뢰즈와 만난다). 그런데 현실의 기독교는 어떤가? 출구없이 보이는 상징계의 네트워크, 즉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체계로 기능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민중신학을 비롯해 7,80년대 제삼세계 신학들이 이 틀을 깨려 분투하였지만 역부족이었고,  라캉이 68에 대해 우려했던 것처럼, 오히려 상징계의 약점을 보강하는 체제신학으로 전락한 면도 없지 않다. 더 강력한 아버지! 현대 인문학이 기독교 신학에 무심해진 것이 이유가 없지는 않다. 특히 한국의 인문학은 종교학과 신학적 사유에서 거의 유아 수준에 있다. 그렇다.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가?

 

지젝은 기독교 신학의 사유에 새로운 출구를 열고 있다. 물론 그는 신학자가 아니다.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대개의 신학은 체제에 기능하는 도구로 전락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만일 종교, 혹은 제도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그 정신의 원류에서 기독교가 상징계를 돌파하여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는 어떤 모범을 간직하고 있다면, 이러한 모범은 그 어느 시대보다 '문화의 시대'인 오늘날 더욱 중요하다. 바로 여기서 음모론이 제게되는 것이다. 지젝의 새로운 기독교 읽기는 신학 내부의 작업이 아니라 외부의 작업이라는 점에서, 현존하는 기독교의 체제를 비판하는 내부의 움직임과 공명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만일 지젝이 <깨지기 쉬운 절대성>이라는 책의 부제에서 말했듯이, 기독교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유산을 가지고 있다면, 이 싸움의 당사자는 단지 신학에 국한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류의 유산일 뿐 아니라, 오늘날 전세계가 봉착한 위기에 하나의 빛을 밝히는 긴급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간 종교의 문제는 종교 내부의 문제라는 비상식이 상식으로 여겨졌다. 바로 이 비상식에 터하여 교권은 소중한 인류의 유산을 전유, 독점할 수 있었다. 지젝은 환상의 기제에 대한 탐구를 통해 종교와 신앙의 문제가 단지 제도적인 종교 내부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에 만연된 보편적인 삶의 문제임을 밝혀왔다. 그의 작업은 제도적인 종교권력의 독점적인 소유권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당연히 종교권력으로서는 매우 불온한 실천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지젝을 금서 목록에 올려야 할까? 제도종교가 그렇게 아둔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대책은? 바로 <믿음에 대하여>와 같이 그를 왜곡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독자의 접근을 막는 것이다. 혹은 이 책의 번역과 같이 무슨 비밀스런 암호집처럼 만들어 전혀 비판성 없는 새로운 숭배를 조직하는 것이다.  혹시 번역자나 출판사의 담당자는 교권과 모종의 커넥션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들 스스로 보수반동적 신앙인들일지도 모른다. 물론 추측이다. 그러나 냄새는 그들이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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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정민 선생의 지식경영 비법을 다산에게 배우다.

 

 

 

 

* 정민 선생의 따끈한 신간이 나왔다. 놀랍게도 책의 제목이 {다산 선생 지식 경영법}이다. 정민 선생은 안식년 동안 이 책의 내용을 집필하였고 이를 출간한 것이다. 그 동안 선생이 냈던 책과는 이번 책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서술된 것이 특징이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는 뭔가 새로운 내용을 가득 담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에게 정민 선생이 정말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가 죽어가고 있는 인문학을 다시 살리는 첨병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야말로 '인문학적 콘텐츠'를 가장 포스트 모던한 방식으로 전유하는 대표적 소장학자이기 때문이다. 아래는 동아일보(2006. 11. 29)에 실린 책의 소개 내용이다.

* 동아일보(2006. 11. 29) / “茶山의 500권 多産… 그 비법은 지식경영”



정민 교수는 “다산의 지식경영은 오늘날에도 논문작성법 가이드, 경영지침서로 쓰일 수 있다”고 말했다. 김희경 기자
18년간 약 500권의 책을 썼으니 1년에 28권꼴이다. 그것도 참고 서적이 변변치 않은 귀양지에서다. 한 분야만 들이판 것이 아니라 행정가, 교육학자, 사학자였으며 토목공학자 기계공학자 지리학자 의학자 법학자 국어학자이기도 했다.

다산(茶山) 정약용.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분야에서 동시에, 그것도 탁월한 성취를 이룩할 수 있었을까.

정민(46)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그 비결을 “정보를 필요에 따라 수집하고 배열해 체계적이고 유용한 지식으로 탈바꿈시킬 줄 알았던 지식경영의 힘”에서 찾았다.

최근 정 교수가 펴낸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은 다산이 ‘무엇을 했느냐’보다 ‘어떻게 했느냐’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미쳐야 미친다’로 잘 알려진 정 교수는 최근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1년간의 안식년을 마친 뒤 고전에서 현대에 필요한 지혜를 퍼 올린 이 책을 들고 돌아왔다.

“18세기 지성사를 연구하다 보니 그 시기를 실학이 아니라 정보화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대 ‘사고전서’ 간행 이후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온 18세기는 21세기 정보화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경전에 대한 사소한 해석 차이를 두고 티격태격하던 시대는 힘을 잃고 넘쳐나는 정보를 어떻게 재편집해 가치 있는 정보로 만들 것이냐가 중요해진 거죠.”

수집벽과 정리벽이 대단했던 18세기 지식인들을 좇다 정 교수가 마주친 사람은 ‘지식경영, 지식편집의 귀재’인 다산이었다. 정 교수가 연보를 통해 저술 연대를 추정해 본 결과 다산은 언제나 동시에 7, 8가지의 작업을 병행해 추진했으며 한 작업이 다음 작업의 원인이자 결과로 엮여 있었다.


 

                

책을 계통별로 분류해 놓은 조선시대 선비의 서재를 보여 주는 ‘책가도 8폭 병풍’. 일본 구라키시 민예관 소장. 사진 제공 김영사

예컨대 ‘목민심서’는 역대 역사기록 속에서 추려 낸 수만 장의 카드를 바탕으로 정리한 목민관의 사례 모음집이다. 이 책을 쓰다가 형법 집행의 중요성을 절감해 이 부분만 확대해 ‘흠흠신서’를 엮었다. 또 ‘경세유표’는 이 작업의 결과들을 국가 경영의 큰 틀 위에서 현장 실무경험을 살려 하나의 체계로 재통합한 것이다.

정 교수는 이 책에서 다산의 정보 처리 방식을 촉류방통법(觸類旁通法·묶어 생각하고 미루어 확장하라), 어망득홍법(魚網得鴻法·동시에 몇 작업을 병행하여 진행하라) 등 50개의 방법으로 정리했다.

“다산의 작업 진행과 일처리 방식은 아주 명쾌합니다. 먼저 필요에 기초해 목표를 세우고 관련 있는 자료를 취합해 카드 작업을 합니다. 이를 분류한 다음 통합된 체계 속에 재배열하는 것이죠.”

스스로 정교한 체계를 세워 지식을 조직화했을 뿐 아니라 다산은 자식과 제자들에게도 하나의 정보가 나오면 계속 찾아서 체계를 잡고 질서화하는 것이 공부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다산은 아들이 닭을 기른다고 하면 빛깔에 따라 구분해 보기도 하고 횃대를 달리해 보기도 하고 닭에 관한 글들을 모아 ‘계경(鷄經)’을 쓰라면서 그것이 ‘글 읽는 사람의 양계’라고 가르쳤습니다.”

정 교수는 다산이 ‘목민심서’를 집필할 때와 똑같은 방식을 따라 이 책을 썼다. “이전엔 대개 몇 년에 걸쳐 쓴 글을 모아 책을 냈는데 이번엔 처음부터 설계 도면을 만들어 작업하면서 다산식의 작업이 얼마나 효율적인지를 체험했다”고 한다.

“다산의 위대성은 그의 작업량이 아니라 작업의 방식에 있습니다. 그의 지식경영은 효율적인 공부 방법과 경영 지침서로도 여전히 유용합니다.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과거가 오래된 미래가 될 수 있는 것이죠.”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http://www.donga.com/fbin/output?sfrm=1&n=20061129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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