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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대하여 - 행동하는 지성 동문선 현대신서 136
슬라보예 지젝 지음, 최생열 옮김 / 동문선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지젝의 글들, 특히 <깨지기 쉬운 절대성>,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그리고 압권인 이 책 <믿음에 대하여>(글라보이 지젝이라는 새로운 저자?) 등 기독교와 관련된 책들은 모두 오역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들이다. 특히 이 책은 짐작하기에 번역자는 초고를 그냥 넘겼으며, 출판사는 원고를 단 한번도 검토하지 않았을 것이다. 틀림없다. 물론 이 책이 번역자의 초고를 아무런 검토 없이 출판한 것이라 해도, 번역자는 애초에 이 책을 번역할 능력이 없었다. 대체 무슨 똥배짱이란 말인가? '케보이?'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음모를 상상하게 된다. 거의 비밀경전에 가까운 해독 불가능한 텍스트가 독자에게, 특히 인쇄된 문자 앞에서 주눅드는 독자에게 다양한 환상을 구성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는 것은 지젝이 라캉을 빌려 말하는 바로 그것, "환상은 스크린이다"가 아닌가? 설마 이 책의 번역과 같은 야만이 출판되었으랴? 우리는 이 비이성적인 폭력 앞에서 일관된 상징계를 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상징계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악마의 계략? 그렇다!

지젝은 서구사회에서 완전히 한물갔다고 여겨지는 텍스트들을 뒤져서는 "여기 바로 오늘의 우리를 위한 중요한 길이 있다!"고 소리치는 학자이다. 그렇게 헤겔이 쓰레기 더미에서 구출되었다. 그렇지만 지젝이게 그에게 일종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헤겔보다 더 중요한 것은 레닌주의, 나아가 지젝에게는 레닌주의의 원류가 되는 기독교이다. 지젝에게 기독교는 상징계의 종교인 유대교를 돌파한(환상을 횡단한) 실재계의 종교로 여겨진다. 예수의 십자가 상에서의 일성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는 지젝에게 상징계를 돌파한 주체의 절망인 동시에 자기 제정의 새출발을 알리는 탄성이기도 하다(여기서 지젝은 들뢰즈와 만난다). 그런데 현실의 기독교는 어떤가? 출구없이 보이는 상징계의 네트워크, 즉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체계로 기능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민중신학을 비롯해 7,80년대 제삼세계 신학들이 이 틀을 깨려 분투하였지만 역부족이었고,  라캉이 68에 대해 우려했던 것처럼, 오히려 상징계의 약점을 보강하는 체제신학으로 전락한 면도 없지 않다. 더 강력한 아버지! 현대 인문학이 기독교 신학에 무심해진 것이 이유가 없지는 않다. 특히 한국의 인문학은 종교학과 신학적 사유에서 거의 유아 수준에 있다. 그렇다.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가?

 

지젝은 기독교 신학의 사유에 새로운 출구를 열고 있다. 물론 그는 신학자가 아니다.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대개의 신학은 체제에 기능하는 도구로 전락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만일 종교, 혹은 제도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그 정신의 원류에서 기독교가 상징계를 돌파하여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는 어떤 모범을 간직하고 있다면, 이러한 모범은 그 어느 시대보다 '문화의 시대'인 오늘날 더욱 중요하다. 바로 여기서 음모론이 제게되는 것이다. 지젝의 새로운 기독교 읽기는 신학 내부의 작업이 아니라 외부의 작업이라는 점에서, 현존하는 기독교의 체제를 비판하는 내부의 움직임과 공명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만일 지젝이 <깨지기 쉬운 절대성>이라는 책의 부제에서 말했듯이, 기독교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유산을 가지고 있다면, 이 싸움의 당사자는 단지 신학에 국한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류의 유산일 뿐 아니라, 오늘날 전세계가 봉착한 위기에 하나의 빛을 밝히는 긴급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간 종교의 문제는 종교 내부의 문제라는 비상식이 상식으로 여겨졌다. 바로 이 비상식에 터하여 교권은 소중한 인류의 유산을 전유, 독점할 수 있었다. 지젝은 환상의 기제에 대한 탐구를 통해 종교와 신앙의 문제가 단지 제도적인 종교 내부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에 만연된 보편적인 삶의 문제임을 밝혀왔다. 그의 작업은 제도적인 종교권력의 독점적인 소유권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당연히 종교권력으로서는 매우 불온한 실천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지젝을 금서 목록에 올려야 할까? 제도종교가 그렇게 아둔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대책은? 바로 <믿음에 대하여>와 같이 그를 왜곡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독자의 접근을 막는 것이다. 혹은 이 책의 번역과 같이 무슨 비밀스런 암호집처럼 만들어 전혀 비판성 없는 새로운 숭배를 조직하는 것이다.  혹시 번역자나 출판사의 담당자는 교권과 모종의 커넥션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들 스스로 보수반동적 신앙인들일지도 모른다. 물론 추측이다. 그러나 냄새는 그들이 풍겼다.

 

이 글은 한결 아빠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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