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에로이카 > 알튀세르와 그로스만의 해후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공감이론신서 26
윤소영 지음 / 공감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주요개념: [자본] 난점과 공백 (67),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67), 자본의 추상화와 노동의 구체성 (68, 91, 142-143), 현실의 대상(Gegenstand) 사고의 대상(Objeckt) / concept notion (106-108), individuality (개인성) singularity (특이성) (128, 277), 자본주의적 기술진보의 편향성 (134-5, 220), 역사동역학과 역사적 자본주의론 (143,), 자본주의적 축적의 엔트로피법칙과 네겐트로피 (149-150), 에포크 (164-5, 185, 188,) 경향적 불안정성 (191), 전방효과와 후방효과 (242), 아포리아(277), 인권의 정치 (278, 282-3), 주체화와 예속 (281, 296), 상징의 가상화 (283), R-S-I 셰마의 전도 (285),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해후 (143, 153, 287-289), 과잉결정과 과소결정 (288), 봉기와 구성 (296-8), 공산주의의 가지 역사적 형태 (302-4), 지적 차이와 성적 차이 (309-18), 네가지 차이 (318).

 

책에는 다섯 개의 강의가 본문 격으로 실려져 있고, 부록으로 뒤메닐과 레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현재성] 실려 있으며, 책의 끝에는 정운영 선생에 대한 추도사가 실려져 있다. 뒤메닐과 레비의 부록글은 윤소영 교수의 입장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좌파 경제학 비판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정독이 필요한 글이며, 책에서 가장 마음에 부분이었다. 그러나 부록과 추도사는 서평에서 제외하고 다섯 개의 강의를 통해 지은이 윤소영 교수가 펼치는 논의를 살펴보겠다. 워낙에 이말 저말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개요를 정리하고, 다음에 평을 하기로 한다. 개요는 다섯 부분으로 나눴다: 1. 역사동역학, 2. 역사적 자본주의론, 3. 이데올로기 비판, 4. 윤소영의 역사, 현실 인식, 5. 윤소영의 정치적 판단. 앞의 개요 부분, 특히 중에서도 1, 2, 3 책을 읽지 않았다면 다소 지루할 것이다.

 

 

개요

 

지은이 윤소영 교수가 책에서 포괄하는 대상의 범위는 알튀세르가 [자본] 난점(논리와 역사의 관계) 공백(이데올로기 비판)이라고 칭한 것에 의해 결정된다.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란 이러한 두 가지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칭하는 것이다 (67). 따라서 지은이가 스스로 설정한 과제는 난점을 어떻게 해결하며, 공백을 어떻게 메꿀 것인가 이다. 전자는 2강과 3강에서 역사동역학과 역사적 자본주의론을 통해 다루어지며, 후자는 4강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 구성된다. 또 지은이는 알튀세르적인 경제학 비판은 곧 그로스만의 경제학 비판을 현대화시키려는 노력이라고 주장한다 (69, 105).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알튀세르 초기의 개념을 차용해 본다면, 이중의 프로젝트는 다음과 같이 도식화될 있다.

 

1.

                            일반성I                                                               일반성II                                          일반성III

난점    발리바르, 브뤼노프, 뒤메닐, 아리기         알튀세르-발리바르의 유물변증법       혁신된 그로스만적 계보

공백    스피노자, 게루, 마트롱, 바디우, 이리가레, etc.                 상동                                              인권의 정치

 

[약간의 caveats 추가되어야 한다. 여기서 일반성 III 현재 주어진 결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은이가 염두에 두고 있는 목표의 상이다. 이데올로기(일반성I) 과학(일반성 III) 대한 초기 알튀세르의 엄격한 구분은 무시한다. 윤소영은 구분이 비판사회학(일반성I) 경제학 비판(일반성 III), 소외론(일반성I) 이데올로기 비판(일반성 III) 간의 대조에는 적용될 있고, 이것은 알튀세르에 의해 완료된 것으로 ( 싶어하), 비판사회학과 소외론은 흘러간 옛노래 정도로 취급한다.]

 

1. 역사동역학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은 뉴턴의 동역학과 마찬가지로 운동의 법칙과 힘의 법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치법칙과 잉여가치법칙은 가속도법칙과 같은 운동의 법칙이며, 자본생산성 하락의 법칙은 중력법칙과 같은 힘의 법칙이다. 그리고 양자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해할 있는 행성운동법칙에 해당하는 것이 이윤율 하락의 법칙이다 (133). 뒤메닐과 폴리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가치법칙과 잉여가치법칙은 경험법칙이 아니라 가속도 법칙과 같은 정의법칙이며, 이윤율 하락의 법칙은 행성운동법칙과 같은 경험법칙이다 (133, 138, 141). 

 

 

2.

                                운동의 법칙                                    힘의 법칙                         행성운동법칙

정의법칙         가치법칙, 잉여가치법칙            

경험법칙                                                           자본생산성 하락의 법칙         이윤율 하락의 법칙

 

 

발리바르는 자본에 의한 노동의 포섭이라는 개념을 자본의 추상화와 노동의 구체성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키는데, 자본의 추상화는 가치증식과정에 대한 논리적 분석을 가리키며, 노동의 구체성은 노동과정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가리키며, 논리와 역사 양자의 결합은 역사동역학 역사적 자본주의론으로 구체화된다. 이윤율 하락의 법칙은 동역학 모델에서의 궁극적인 설명대상인 동시에, 동역학 모델 외부의 상쇄 경향과의 경계 지점이다. 따라서 역사적 자본주의론은 역사동역학 바깥에 위치해 있다. 반면, 열역학 모델은 이윤율 하락 법칙과 이에 대한 반작용 요인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150). 열역학 모델에서 자본주의의 역사는 엔트로피(비가역성) 증가의 법칙인 이윤율 하락의 법칙과 이에 반작용하는 제도적 요인의 네겐트로피(가역성) 상호작용을 통해서 설명된다. 뒤메닐은 이러한 역사동역학에 개의 동역학(부문간 경쟁, 경기순환) 추가한다.

 

지은이는 이러한 개념적 패러미터들을 정립한 , 뒤메닐과 아리기를 따라, 이윤율의 이론궤도와 현실궤도를 추적한다 (161-165, 219).

 

2. 역사적 자본주의

지은이는 1차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적 기술혁신의 역사를 대략 다음과 같이 본다 (242).

(1) 1차 산업혁명              1780년대-   : 면직물 산업,

(2) 1차 교통, 통신혁명      1850-60년대: 철도, 전신            1880-90년대: 전화

(3) 2차 산업혁명              1910-20년대: 자동차 산업

(4) 2차 교통, 통신혁명      1950-60년대: 항공, 우주산업      1980-90년대: 컴퓨터, 인터넷산업

 

위의 1에서도 나와 있듯이 윤소영은 발리바르, 브뤼노프, 뒤메닐, 아리기 등에 주로 의지하여 이윤율 하락의 법칙과 이에 반작용하는 제도라는 관점에서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를 살펴보고 있다. 역사동역학은 신자유주의 시대가 금융화에 의해서 추동되는 에포크라는 사실을 설명한다. 제도의 측면에서 보았을 , 20세기 자본주의의 중요한 변화는 법인자본주의의 형성이다. 여기에서는 단계가 관찰된다 (196, 202-220): (1) 1890-1900년대의 법인혁명, (2) 1910-20년대 관리자혁명, (3) 1930-40년대 케인즈혁명.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형성된 법인자본의 다양한 제도가 해체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2차 교통, 통신혁명이라는 맥락 속에서, 그리고 금융화와 법인자본주의 제도의 해체라는 측면에서 이해 되어야 하며, 여기에 9.11 이후 금융세계화와 군사세계화의 평행적 발전 (251)이라는 측면이 고려되어야 한다.

 

3. 인권의 정치

발리바르에 의해 스피노자가 주목받는 이유는 마르크스에게는 공백으로 남아있는 이데올로기 비판을 보충할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인간학에는 자체만으로는 해결할 없는 논리적 궁지, 아포리아가 존재하는데, 이는 특이성이 아닌 개인성에 기반한 인권의 정치에 의해 보충됨으로써 비로소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기능하게 된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의 아포리아를 대중의 공포에서 찾으며, “스피노자의 철학을 현재화하기 위해서 대중의 공포라는 스피노자의 아포리아를 인권의 정치라는 비철학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 (283). [cf. 여기서 철학과 비철학의 결합은 난점으로부터 야기된 논리와 역사의 결합에 상응하는 것처럼 보이며, 이진경이 말하는 내부와 외부 같은 것처럼 읽힌다.]

 

인권 개념은 주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양산한다. 이제 주체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시민, 시민-주체를 뜻한다. 인권의 정치, 시민권의 정치의 메커니즘이 봉기(주체화) 구성(주권적 주체로서 시민 자신에 대한 예속)이다. 인권의 정치는 바로 인간=시민이라는 등식에 더하여 자유=평등이라는 등식을 더한 것이다. 그리고 가지 등식을 선언하는 , 그것이 바로 봉기이다. 봉기적 명제를 실현하기 위한 구성(constitution, 헌법)이라는 측면에서 프랑스 혁명 이후에 전개된 헌법의 토대가 소유인가 공동체인가라는 쟁점은 현대정치를 결정하는 첫번째 모순[소유-공동체 모순]이며,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대두는 모순의 표현이다. 그러나 모순은 지양되고 가지 새로운 모순이 등장한다. 소유 내부에서는 소유권-노동권 모순이, 공동체 내부에서는 민족공동체-계급공동체(노동자연합) 모순이 등장한다. 새로운 전개를 통해서 소유권과 민족공동체가 결합하고, 노동권과 노동자연합이 결합하면서 현대정치의 이데올로기적 형식으로서 인권의 정치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301). 결합 간의 대결, 공화주의적, 민족주의적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갈등이 현대정치를 특징짓는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가지 역사적 형태를 갖고 있다: (1) 기독교적 공산주의, (2) 시민적 공산주의, (3) 마르크스주의, (4) 페미니즘.

 

4. 윤소영의 역사현실인식

책의 도입 부분인 1강에서 윤소영은 1979-80년의 경제위기와 87년의 3저호황, 97년의 경제위기 등과 정권의 성격, 운동권의 흐름들을 일별하고 있다. 가장 특이한 것은 남한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박정희 정부의 1979 4 경제안정화종합시책으로까지 소급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책에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Volcker Recession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이에 따라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은 남한 최초의 반신자유주의 투쟁들이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따라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권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해석에 대한 가치판단은 별개의 문제이지만, 일단은 무척 새로운 해석이다.

 

97 경제위기, 외환위기의 본질은 이윤율의 급속한 하락, 원인은 금융화와 재벌이다.

 

윤소영은 1981년경 시작된 미국경제의 에포크가 2012-13 정도에 종료될 것으로 파악한다 (58, 153, 158, 163-4, 185-186). 그는 1929 대공황을 전후로 해서 영국 노동당이나 독일 사민당도 집권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어쩌면 민주노동당이 2012 대선에서 집권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단다. 윤소영이 보기에, 위기에 집권한 좌파당들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관리하고 공산주의적 이행을 저지하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만약 2012 민주노동당이 집권한다면, 그건 축하할 일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이행을 뜻하므로 역사의 반동. 그러나 윤소영이 보기에 2010년대의 최종적 위기는 영국자본주의에서 미국자본주의로의 이행으로 해결되었던 지난 위기와 달리, 그러한 자본주의적 이행으로 해결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반역이 해후한 공산주의적 이행이 도래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순간 노동자는 대중에서 계급으로 떨쳐일어난다. 크로노스의 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뀐다. 이거 뭔가? 이게 윤소영이 복원하고자 하는 그로스만의 붕괴론인가?]

 

5. 윤소영의 정치적 판단

윤소영은 여기저기서 난삽하게 자신의 정치적 판단들을 밝히고 있다.  생각나는대로 몇가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산별노조 대신 일반노조, 지역노조로 가야 한다. (2) 성매매금지법은 얼치기 페미니스트들이나 주장하는 것이다. 성노동자성을 인정해 한다. (3) 학교는 확대되어야 하고, 가족은 축소되어야 한다. 결혼이 아니라 자유결합이 좋은거다. (4) 참여연대가 하고 있는 것은 뻘짓인데, 소액주주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초민족자본의 지배를 공고히 해주자는 것이다 (233-234, 236). (5) 스크린쿼터문화연대는 웃기는 거다 (297-8). (6)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에서 주목받는 구조조정에 대한 투쟁은 금융세계화의 결과에 대한 투쟁이다. 중요한 것은 원인에 대한 투쟁, 금융세계화 자체에 대해 투쟁해야 한다.

 

 

 

윤소영의 아포리아를 드러내는 식으로 엄밀한 서평을 써볼까 생각하다가, 경제수학도 젬병이고, 불어도 못하며, 마르크스의 가치법칙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내가, 베토벤과 PD 음악에 대한 윤소영의 말들을 뻘소리라고 생각하는 내가, 그걸 하려다 보면 너무 피곤하고 헛물만 가능성도 있고 해서, 그렇게 거창하게 나가기로 했다. [ 사실 윤소영의 절대지에 대한 추구는 나름대로(!) 존경하지만, 절대미에의 탐닉과, 절대지와 절대미를 결합시키고, 그것을 어떤 진짜 마르크스주의자의 자격 같은 것으로 특권화하려는 것은 미안하지만 뻘짓이라고 생각한다.]

 

일단은 1강에서 나온 남한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1979년으로 소급하는 논의는 새로웠다. 일리 있다. 그런데 논의를 지배블럭으로부터 확장시켜서,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을 반신자유주의투쟁이라고 주장하려면 세밀한 역사서술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이것은 윤소영이 그럴 마음도 없을 것이고, 그럴 능력도 될거라고 본다. 주장이 약빨이 먹히려면, 항쟁참여자들이 자신의 적을 뭐라고 규정했으며, 그것이 어떻게 해서 신자유주의가 현실화된 것인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윤소영은 '협상된 이행'으로서의 문민화 과정을 이야기하지만, 신군부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본질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본다. 민주화라는 말은 나온다. 민주화에 대한 경시는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으로 주류화되기 이전 전노협 시절의 남한 노동운동이 브라질이나 남아공 같은 사회운동노조주의라고 있다는 주장과도 닿아있. 그런데 브라질과 남아공의 사회운동노조주의에 대한 Gay Seidman 연구, Manufacturing Militance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은 지역운동과의 결합이라는 미시적 측면 뿐만 아니라, 전체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노동계급운동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것이었다. 남아공과 브라질의 경우는 노동운동이 민주화를 추동했던 반면, 87 7, 8, 9 투쟁은 6 민주항쟁이 갖고 권력 공백이라는 정치적 기회에서 터져나왔다는 점에서 남한의 노동운동은 민주화 운동의 추동자였다기 보다는 수혜자였다 ([민주노조 투쟁과 탄압의 역사] 참조). 또 90년대 중반까지 전국연합의 존재는 바로 노동운동이 운동 내부에서 헤게모니를 확립하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뜻하며, 이는 바로 사회운동노조주의를 (정치적 방향이 아니라, 서술개념으로서) 쉽게 8-90년대 남한에 적용할 없다는 이야기이다.

 

책을 통해서 역사동역학과 역사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비판과 인권의 정치 , 그동안은 말로만 듣던 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있었다. 구조주의적 사유에 취향이 없다. 그렇다. 이걸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구조와 주체의 양분(266-8)을 설정함으로써, 개인성과 특이성, 필연성과 우발성 끊임없는 사변적 이항대립의 늪에서 헤매다 정작 현실적 설명대상으로 돌아와서 현실적 관계들의 변화와 과정을 설명하는 데에 별로 유용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나를 설득하려면, 자체가 아니라 현실을 틀을 통해서 설명했을 , 얼마나 설명이 되는 지가 보여져야 한다. 윤소영이 후배들에게 기여하려면,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치법칙을 받아들여야 하고, 영어만 갖고는 되니까 불어도 하고, 경제수학도 잘해야 된다고 얘기하는 갖고는 안된다. ? 우리가 윤소영에게 기대하는 것은 불어 잘하는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와 안의 부분으로서 남한 경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경제학 비판을 원하는 것이다. 말미(330-335) 이전에 자신이 제시했던 종속심화-독점강화 명제에 대한 현재 생각을 밝히고 있는데, 자기비판과 종속심화를 설명하는 데에 존재하는 난점이 피력된다. 그가 문제들을 딛고 신자유주의의 전개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 이론적 문제를 해명하며 화려하게 복귀할 것을 기대해본다. [이왕이면 2012년 이전에...]  

 

윤소영 선생에 대해 거는 나의 기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책 곳곳에서 발리바르와 브뤼노프 등이 전개했던 노동에 대한 자본의 포섭에 대한 이론이 개진되며, 이것이 트론티나 네그리의 사회에 대한 자본의 포섭과 대비된다 (92, 201). [이 점에서 이는 이진경이 주장한 바 있는 '기계적 포섭'과도 대비될 수 있다.] 이 틀에 따르면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이라는 맑스주의적 가치론의 기본을 유지하면서도, 농민이나 (덤프트럭 운전사와 같은) 자영업자를 "자기착취 당하는 프롤레타리아"로 정의할 수 있게 된다. 이 점은 이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점이다. [농민의 노동자성에 대한 이 주장은 내가 알기로는 한국에서 오래전 김준보 선생이 한 적이 있다고 얼핏 들었다. 아직 읽어보지는 못한 글인데, 며칠전 번역되어 나온 [이윤에 굶주린 자들](울력, 2006)에 실려 있는 르원틴의 "자본주의적 농업의 성숙: 프롤레타리아로서의 농민"도 참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주제는 이론적, 현실적 파급력이 매우 큰 주제이다. 달리 말해, 광범위하면서도 심도있게 논쟁될 수 있고, 이론 영역을 넘어 정치 영역에도 중요한 함의를 가질 수 있는 주제다. 제대로 한 번 파고들 필요가 있으며, 윤소영 선생의 진가가 발휘될 수 있는 주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구조주의적 사유에서 구조와 주체의 양분은 피치못할 추상의 폭력이다. 그런데 이러한 추상의 폭력은 윤소영의 현실 이해에 그대로 재현된다. 활동가의 입장에서는 사르트르가 옳고,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알튀세르가 옳다는 이러한분법적 현실 인식은 사르트르와 알튀세르의 모습 사이에서 열심히 투쟁하고, 나름 공부도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공부나 투쟁, 중에 하나 골라서 그것만 열심히 해라라는 말과 다름 없이 들린다. [그나저나 사르트르는 현장활동가가 아니었다.] 여기에는 공부만 열심히 하는 자기 처지에 대한 정당화 의도가 엿보인. 사람들이 윤소영에게 이론외적으로 불만인 것은 그가 공부만 열심히 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인권의 정치 얘기하면서도 지극히 반정치적인 냉소만을 보이기 때문이다. 윤소영 선생이 그렇게 좋아하는 혁명의 비극적 숭고성은 베토벤 들으면서 눈물 흘리는 순간이나, 자유결합을 실천하는 순간에 존재하지 않는다. 봉기의 순간,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카이로스적 순간에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의 조직을 위해 노력하는 크로노스의 일상적 순간에 존재할 것이다. 거기에는 냉소가 아니라 열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인민주의에 대한 거부가 정치 자체에 대한 거부가 아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운영 선생은 윤소영이 過識하다고 했단다. 윤소영 선생의 냉소는 어쩌면 자신의 과식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자기방어기제에 다름 아닐 것이다.

 

윤소영은 지적 차이를 결국에는 소멸되어야 것이라는 의미에서 노동과 자본 간의 대립과 같은 적대적 모순으로 해석한다. 이런 해석은 이상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그가 설정해놓은 일반성 III, 그로스만적 전통(붕괴론) 복원과 관계되어 있다. 동시에 알튀세르적 의미에서의 이론적 실천의 특권화, 자기정당화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윤소영은 모든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리의 순간이라는 카이로스적 관념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153, 344). 자본주의적 이행과 공산주의적 이행 간의 충돌이라는 이 세계관은 좀 다르긴 해도 월러스틴의 것과 유사하다. 어디 2012년을 한 번 지켜보자. 그리고 그 이후 윤소영 선생이 뭐라고 하는지도...

 

 

사족

 

  책은 많은 말을 하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강의를 녹음한 것을 다시 글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치고는 중구난방이라는 느낌이다. 지은이의 잘난척과 뒷談話는 재미없는 강의 들으면서 졸고 있는 학생들 분위기 환기 차원에서는 약빨이 먹혔을 몰라도, 그것을 활자로 접해야 하는 독자에게는 흐름을 끊는 것이다.부르디외와 라뒤리가 싸가지가 없다는 것이나, 박현채 선생이나 문익환 목사 같은 고인들도 PD 옳다고 생각했다는 등의 야부리를 듣자고 독자들이 윤소영의 책을 사보는 아니다.  강의 도중 번번히 나오는 과천연구실에서 나온 책광고들도 상당히 눈에 거슬린다. 차라리 참고문헌들을 각주처리해서 쪽수까지 알려주는 지은이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강의녹취록이 아니라 다음번에는 좀더 제대로 , 이두가 아니라 한글로 쓰여진 제대로 책을 있기를 기대해본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오자: 92 밑에서 7 : 트론트 -> 트론티

 

 

궁금한

1.        자본생산성 하락의 법칙은 경험법칙인가, 정의법칙인가, 혹은 양자를 매개하는 어떤 것인가?

2.        일반성II (유물변증법) 원칙상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일반성 I III 의해 결정되는 것인가? 논리와 역사의 결합을 위해 구사되는 유물변증법과 이데올로기 비판을 위해 구사되는 유물변증법은 동일한 것인가? 만약 동일한 것이라면, 스피노자의 아포리아(대중의 공포) 상응할만한 마르크스의 아포리아도 동일한 방법으로 주목되는가? 혹시 난점과 공백이 마르크스의 아포리아인가?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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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지난달에 일본의 젊은 비평가이자 사회학자 아즈마 히로키(1971- )가 다녀갔다.' 오타쿠 전문가'로도 불리는 그의 책의 국역본이 곧 출간예정이라고 하는데, 그와 관련한 강연을 가졌던 모양이다. '스포츠칸'의 이종원 기자만이 아즈마의 행보에 대해 관심을 갖고 기사를 써놓은 바 있기에 여기에 옮겨놓는다. 참고로, 나는 지난봄에도 아즈마 히로키의 저서명이기도 한 '우편론적 불안에 대하여'란 페이퍼를 쓴 바 있다.

한편 아즈마는 1994년 23살의 나이로 가라타니 고진이 주관하던 잡지 <비평공간>에 독창적인 자크 데리다론인 '존재적, 우편적'을 발표함으로써 일본 평단에 혜성과 같이 등장했었다. <존재적, 우편적>(1998)은 그의 첫번째 저서가 된다. 가라타니 고진과 아사다 아키라의 계보를 잇는 3세대 비평가로 주목을 받았지만, 이후에 아즈마는 데리다나 들뢰즈 같은 프랑스 현대철학이 아니라 아니메나 오타쿠 같은 하위문화에 경도되어 '오타쿠 전문가'가 되었다. 1999년 도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는 일본 국제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아무려나, 어떤 종류이거나 그의 책들이 번역/소개되기를 기다렸는데, 근간인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외에도 <우편적 불안> 등이 소개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

 

스포츠칸(2006.03. 26) 한때 ‘오타쿠’와 ‘저패니메이션’이 화두였던 시절이 있었다. 10여년전 일본문화개방을 앞두고 일본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오타쿠’로 번졌던 것. ‘당신, 댁이라는 뜻을 지닌 일본어로 마니아보다 더욱 심취하여 집착하는 사람’이라는 설명이 붙어다녔던 이른바 ‘오타쿠’는, 한때 일본문화의 핵심인양 칭송받기도 했고 때론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오늘날, 모두가 오타쿠가 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던 10년 전의 위기감은 간 곳이 없다. 한국에는 오타쿠 문화보다 다양한 일본문화가 호응을 얻고 있으며, 한국문화도 ‘한류’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것. 과연 한국과 일본을 지배했던 그 많던 오타쿠들은 어디로 갔을까. 

-일본의 사회학자이자 오타쿠 전문가인 아즈마 히로키가 자신의 오타쿠 연구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문학동네)의 한국어판 발간을 앞두고 지난 22일 서울대학교에서 강연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아즈마는 ‘오타쿠는 현대 일본사회를 반영하는 포스트모던적인 존재’라고 분석했다. 

 

 

 

 

▲오타쿠는 오직 일본 특유의 존재=아즈마는 우선 “오타쿠는 일본의 특수한 상황속에서만 나올 수 있는 존재”라고 쐐기를 박는다. 일본 특유의 오랜 만화전통과 거대한 만화시장의 산물이며, 결코 국제적으로 내세우거나 널리 전파될 수 있는 문화는 아니라는 것. 그러나 아즈마는 “일본의 특정 사회, 특정문화를 반영하는 오타쿠야말로 사회학적으로 흥미로운 연구대상”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오타쿠는 변화했다=10여년전인 1990년대, 일본에는 많은 사건이 있었다. 버블경제 붕괴 및 고베 대지진, 오움진리교 독가스 사건 등으로 사회적 불안이 조성되고 국가적 신뢰가 떨어지는 현상이 벌어진 것. 이에 대해 아즈마는 “국가적 사회적 거대 담론이나 서사가 없어짐에 따라 일본만화도 거대 서사가 없어졌다. 대신 인터넷과 게임 등으로 오타쿠가 개인화되면서 캐릭터나 미소녀 등 미시적 존재에 열광하게 됐다”고 주장한다. 장중한 스토리 만화 대신 가벼운 캐릭터를 내세운 에세이만화가 인기를 끄는 최근 한국만화계에도 통용될만한 주장이다. 

▲오타쿠와 저패니메이션의 미래는?=아즈마는 일본의 만화, 애니메이션이 두가지 방향으로 발전할 것으로 내다본다. 한가지는 ‘오타쿠에 의한 오타쿠를 위한’ 특수문화산업이 일본 내에서 현재 모습대로 계속 발전한다는 것. 다른 한가지는 ‘저패니메이션’이라는 이름하에 한국, 대만 등으로부터 ‘새피’를 수혈받으며 ‘국제화’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다. 아즈마는 “일본보다 이제 한국과 대만 등의 작가들이 일본풍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더욱 잘 그린다”며 “‘공각기동대’처럼 세계각국의 다양한 인력과 자본이 유입되며 일본색은 점점 옅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가까운 나라이기도 하지만, 아즈마는 지난해 11월초에도 세미나 강연차 한국을 다녀갔다. 그에 관한 소개기사 역시 스포츠칸의 이종원 기자가 썼다.

스포츠칸(2004. 11. 03) 일본과 한국의 만화전문가들이 ‘오타쿠’와 ‘만화독자’를 논했다. 제3회 청강 국제만화세미나’가 지난 2일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 이연홀에서 개최됐다. 청강문화산업대학 청강국제만화교류연구소(소장 박인하)가 주최한 이번 세미나는 ‘대중문화의 새로운 리더, 만화 독자의 재발견’을 주제로 ‘만화 독자’에 대해 한일 전문가들이 국내 최초로 조명했다.

 

 

 

 

-일본 국제대학 교수이자 저명한 사회평론가인 아즈마 히로키는 이날 발표에서 “일본의 만화 독자들 사이에 이야기보다 캐릭터를 지향하는 ‘모에’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 현지에서 한·일만화교류를 연구하는 이현석씨는 “한국 신세대 만화작가들이 일본만화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하고 있다”며 “이들은 축소된 한국 내 만화시장을 벗어나 일본만화 시스템에 적응하며 한·일만화교류에 기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밖에도 거북이북스 기획자 김현국, 애니사이트 운영자 서찬휘, 한·일만화 칼럼니스트 선정우, 만화 스토리작가 전진석 등 다양한 패널들이 폭넓은 발표와 토론을 벌였다. 이번 세미나를 기획한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 박인하 교수는 “발전한 네트워크 환경에 새롭게 등장한 취향 클러스터는 주로 디지털을 중심으로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을 소비한다”며 “이들 중 일부는 자신을 스스로 타인과 구분해 ‘폐인’이라 칭하는데 이들이 디지털 문화의 트렌드 리더이자 얼리어댑터”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90년대 이후 만화의 충성스러운 독자들은 애니메이션, 캐릭터, 게임을 소비하며 대중문화를 끌어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06. 04. 08.

P.S. 아즈마의 데뷔작인 데리다론을 일부 번역/정리한 글도 인터넷상에는 떠돌아다닌다. 책이 정식으로 번역되기를 기대하는 처지이지만, 맛보기가 될 듯하여 여기에 발췌해놓는다. 참고로, 우리말로는 흔히 '해체'라고 번역하는 'deconstruction'을 일본에서는 '탈구축'이라고 옮긴다. 

 

-데리다의 탈구축은 무엇보다 자기동일성 위에 세워진 근대적 주체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으며, 탈구축적 독해는 근대적 주체의 동일성을 위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기 데리다는 발화 주체의 동일성 유지에 '기여하는 것'과 그것을 '위협하는 것'을 몇 개의 개념적 대립쌍으로 정리한다. 대립쌍을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목소리/문자(쓰여진 것), 다의성/산종, 파롤/에크리튀르, 현전적 주체(지금 여기있는 주체)/비현전적 주체. 전자의 개념들은 기호를 주체의 통제 하에 둔 것으로 만든다. 한편 후자의 개념들은 기호가 주체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인용되고, 해석될 수 있게 한다. 주체의 '목소리'는 말하여진 것의 의미를 통제하여 발화주체의 동일성이 유지되도록 하지만, '쓰여진 것'은 그것을 그 자리에서 파열시켜 이중화 해 버린다. 이중화? 이는 발화의 '이중소속성'을 뜻하는데,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 다음 설명을 차근차근 읽어보도록 하자.

 

 

 

 

-폴 드 만은 "무슨 차이가 있어?(What`s the difference?)"라는 의문문을 예로 데리다의 탈구축을 설명한다. 드 만에 의하면, 이 쓰여진 문장이 뜻하는 바가 "'차이'가 '무엇'인지를 정말 알고 싶다는 것인지, 아니면 차이를 분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목소리'는 그 말이 어느 쪽으로 해석되어야 하는지 답을 준다 = 기호를 주체의 통제 하에 둔다.) 주어진 문장을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차이'의 내용에 대한 질문이 되고, 수식의문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차이'의 존재를 부정하는 문장이 된다. 어느 독해가 올바른 것인지는, 원리적으로 판단 불가능하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두 독해의 차이가 서로 충돌하고 상호 대립하는 요청/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드 만은 이 차이를 '문법'과 '수식'의 차이가 낳은 문제라 했는데, 이를 다르게 말하자면 '콘스타티브'와 '퍼포모티브'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콘스타티브와 퍼포머티브라는 용어는 50년대에 옥스퍼드에서 창시된 언어행위론이 도입한 것으로, 언어가 지닌 지시적 의미와 실천적 의미의 차이를 나타낸다. 콘스타티브한(사실확인적인) 말이란 그 말의 내용이 순수하게 의미하는 것으로, 위의 예에서는 '차이에 대해 알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한 경우에 해당한다. 반면에 퍼포머티브한(행위수행적인) 말은 말의 내용이 지칭하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 자체보다는 그 말의 실질적 의도/현실에서의 실천적 의미에 무게를 두는 것으로, 위의 예에서는 '차이를 분별할 필요가 없다'는 해석이 이에 해당한다.

-하나의 언명이 콘스타티브한 독해와 퍼포머티브한 독해, 즉 두가지 독해 레벨에 동시소속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가 낳는 이율배반(더블·바인드) 현상 - 이것이 탈구축을 설명해 주는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탈구축'적 독해는 모든 텍스트 속에 깃들어 있는 그 '이율배반'을 폭로하기 위해 행해진다. "탈구축은 우리들이 텍스트에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기호는 에크리튀르로서의 면이 있다. 기호가 기호인 한, 어떠한 형태로든 "쓰여질", 즉 기록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크리튀르는 끊임없이 어떤 컨텍스트에서 절단되어 표류하고, 다른 컨텍스트로 흘러가 그와 접목된다. 그 결과 모든 기호는 원리적으로, 항상 동시에 복수(複數)의 언어(랑그), 복수의 컨텍스트, 복수의 독해 레벨에 속해 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기호의 이러한 이중소속성(산종)이 가장 첨예하게 추궁되는 때는, '콘스타티브'와 '퍼포머티브'가 상반되는 요청을 할 경우, 즉 하나의 언명이 하나의 주장을 하면서, 동시에 그 주장을 배반해버릴 경우이다. '탈구축'은 무엇보다도 우선 이 '이율배반'의 경험이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러한 경험을 '불가능성의 경험'이라 부른다. 

 

 

 

 

-'다의성'과 '산종'의 차이에 대해 다른 관점에서 정리해 보자. 양자의 대립은 '파롤'과 '에크리튀르'의 대립과 병행한다. 목소리=파롤은 항상 '지금 여기', 즉 현전적 주체의 통제 하에 있다. 대조적으로 문자=에크리퀴르는 항상 그 통제로부터 벗어난다. (<공각기동대>에서 project 2501이 이 비슷한 말을 했었다. 인류가 문자를 발명할 때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인류가 그것을 통제하지 못할 때가 올터이니... project 2501이라는 존재는 인류라는 주체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문자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러한 극히 상식적인 인식하에 데리다는, 현전적 주체의 환원가능성에 갇혀있는 파롤적 다양성(다의성)과 끊임없이 그로부터 '일탈'하는 에크리튀르적 다양성(산종)이라는 개념대립을 부각시킨다. '산종'은 현전적 주체로부터 벗어날 가능성, 임의의 컨텍스트로부터의 단절가능성=인용가능성에 의해 실현된다. 즉 산종의 효과는 하나의 같은 에크리튀르가 복수의 다른 컨텍스트 사이를 이동함으로써, 항상 사후적으로 나타난다. '하나의 에크리튀르'가 각기 다른 컨텍스트 사이에 위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산종적 복수성을 파생케 한다. '에크리튀르의 단수성'이 기호에 깃든 '산종적 복수성'보다 이론적으로 선행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사에 이 '산종'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 현전적 주체의 의지 하에 형성되었던 철학사는 붕괴의 위험에 처한다. 철학의 역사는 고유명(소크라테스-아리스토텔레스...)의 집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적이고 경험적으로 성립된 것이면서도, 필연적이고 초월론적으로 진리를 논한다. '철학'이라 불리는 앎을 지탱하는 이 역설의 의미를, 데리다는 매우 진지하게 숙고한다. 만약 '철학' 전체가 하나의 언어게임일 뿐이라면(이 입장은 많은 상대주의자, 예를 들면 로티에 의해 논해지고 있다) 다른 모든 철학(=서양중심적인 지금의 철학이 아닌 철학)도 항상 가능하며, 따라서 새로운 철학을, 즉 새로운 어휘와 스타일과 참조표를 발명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고유명의 계보 : 에피쿠로스-마키아벨리-홉즈-스피노자-루소...) 실제로 그러한 시도는 무수히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또한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데리다의 관심은 그런 것이 아니다. 철학적 발명을 아무리 축적해 나간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후적으로 항상 '유일한' 언어게임으로 여겨질 것이다. 복수의 철학이 존재하는 것은, 결국 '철학 명부'를 풍부하게 하는 것(파롤적 다양성=다의성)일 뿐이다. 데리다의 사고는, 오히려 그 풍부함(다의성)을 전도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오히려 우리들의 왜 항상 이러한 언어게임을 해야 하는가, 왜 이 역사는 유일한가(=현전적 주체의 의미통제), 그리고 만약 그것이 유일하다면 그것을 통해 망각된 것은 무엇인가(='산종'의 '다의성'화), 이러한 질문들을 한다. 



-<우편엽서>는 철학자를 우편국으로 비유했다. 개념(우편물)이 철학자(우편국)들에게 배달되어 간다. 이것이 철학에 대한 데리다의 이미지이다.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새로운 철학적 '고유명'이 되는 것, 그것은 새로운 우편물을 새로운 우편국에서 발송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발송한 우편물이 주체의 의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에크리튀르=산종)는 것에 주안점을 두는 데리다의 사유는 오히려 그곳에서 배달의 불확정성(=불가능성의 경험), 즉 행방불명된 우편물(=유령)을 향한다. "그것이 도착하기 위한 조건, 그것은 결국은 그것이 도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애초에 처음부터 도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을지도 모를 우편물을 탐색하는 데리다에게 새로운 우편국은 필요없다. 전기 데리다로부터 후기 데리다로의 변화, 이론적 스타일에서 간텍스트적 스타일로의 이동은 우리들의 생각에 따르면, '철학'과 '역사'에 대한 이 특이한 인식에 의해서 촉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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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우리 학문과 철학

교수신문(2006. 04. 22)의 시론을 옮겨온다. 필자는 이태수 교수(서울대 철학과)이고, 글의 부제는 "철학 없이 새로운 문제를 던질 수 있을까?"이다. 예의 서양 학문의 발달사에 견주에 '우리 학문'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문제제기이고 해법이지만, 이 참에 한번 더 생각해보기로 한다(월요일이기도 하니까). 강조와 몇 마디 군소리는 나의 것이다.

-서양에서 학문사의 발달은 분명히 다양한 전문분과의 다기화, 다양화가 진행되어온 과정이라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통합학문 노릇을 하던 철학으로부터 제반 학문 분야가 분화되어 나오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경우 철학이란 말이 좋아 통합학문이지 실상은 미분화상태의 두루뭉수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과정을 얼핏 보게 되면 꽁트류의 고전적인 실증주의 사관에 따라 한때 인류의 지성이 종교로부터 해방되는 단계에서 철학이 탄생했지만 그 뒤의 진화 단계에서는 과학이 출현하여 철학의 역할을 대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 지성의 역사는 그렇게 단순한 진화의 궤적을 그리지는 않는다. 학문의 다기화, 다양화와 동시에 각 분야의 방법론이 과학적으로 좀 더 정치해져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철학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철학 이전에 종교까지도 그 때문에 소멸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소멸은커녕 전 세계적으로는 여전히 성업 중이다. 고급 종교의 경우는 철학과 과학의 출현을 통해 소멸되거나 약화되기보다는 스스로의 내용을 좀 더 고급화 하는 진화의 계기로 삼은 것이 오히려 진상인 것이다.

 

 

 

 

-예컨대 갈릴레오를 법정에 세웠던 그 옛날의 교회는 지구의 운동 방식이 신앙의 문제와 뗄 수 없는 필연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지만, 오늘날 웬만한 지성을 갖춘 기독교인 중에 누가 하느님이 지구가 움직이게끔 우주의 질서를 꾸몄다고 해서 신앙을 거두어야겠다는 생각하겠는가. 그처럼 황당한 과거의 오해에서 벗어난 만큼은-적어도 그만큼은-오늘날의 기독교는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더 잘 파악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한 것이 틀림없다.

-철학의 경우도 그와 유사하다. 과거 철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분야가 분가하여 나간 뒤 철학이 바로 철거해야 할 빈집이 되고 만 것이 아니다. 오히려 좀 더 깊이 있고 정통적인 철학의 과제에 집중할 수 있어서 내용적으로는 더욱 세련된 학문으로 발전할 계기를 얻은 것이 진상이다. 과학이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처리해야 할 과제를 철학이 자신의 고유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답을 제시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부정확한 인식의 소치로서 제대로 된 과제 처리노력에 방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과거에 철학의 영역에 속했던 것으로 인식되었던 과제가 과학적 처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철학의 발전을 위해 차라리 바람직한 일이다(*철학의 운명애!). 종교의 본질이 과학적 탐구의 결과에 따라 무시로 훼손도 되고 강화도 되고 하는 것이 아니듯이, 철학도 과학과 결코 무관하지는 않지만 과학적 방법으로 처리할 수 있는 과제를 담당하는 것을 본연의 임무로 하지 않는다.(*분가 이후의 철학을 '모더니즘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미술에서의 '모더니즘 회화'처럼. 회화란 무엇인가란 자기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사진의 발명이었다면, 철학이란 무엇인가란 자기반성의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뉴턴 역학의 발견이었다.)

 

 

 

 

-철학은 여타의 모든 분과 학문의 탐구 영역과 병렬된 또 다른 독자적 탐구 영역을 확보하여 그에 관한 지식 정보를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성립한 학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모든 학문 활동에 대한 메타 수준의 반성을 주 임무로 하여 각 분과 학문의 지식 산출과정의 논리와 정당성을 문제 삼고 또 산출된 지식이 인간 삶의 전체 맥락과 연관하여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인지를 사색한다(*메타학문으로서의 철학. 그런데, 메타학문의 자리에 서기 위한 조건은 각 개별학문에 통달하는 것이다. 그게 '애프터' 정신이니까). 그래서 비록 모든 학문 분야를 통합하는 지식체계로 군림할 수는 없지만 분과 학문과는 또 다른 수준에 스스로를 위치시켜 삶과 지식의 전체성에 대한  지향을 유지하려는 끊임없는 노력하는 것이 곧 철학의 과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그렇게 하여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것이 현대철학의 과업이자 욕망이다.)

-그와 달리 여러 분과 학문은 각기 영역을 나누어 그 영역 내에서 학문적 문제로 제기된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가설을 세우고 일정한 규칙에 따라 검증 또는 반증의 절차를 수행하며 진리에 점차적으로 접근해가는 시도를 한다. 이 일에 종사하는 분과학문의 전문인은 자신의 일을 하는 동안은 일단 다른 분야에서 일어나는 일을 포함해 지식 세계 전체에 대한 책임을 의식하지 않아도 좋다. 그와 같은 전문인으로서의 에토스는 분업 체제의 효과를 얻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지성은 거기에서 만족할 수는 없다. 인간의 삶이 전문분야 별로 쪼개져 있어 서로 아무 연관이 없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닌 전체적인 것인 한, 인간 지성은 전체성에 대한 관심을 버릴 수 없다. 만일 지식인이란 지식인은 모두 다 각기 전문 분야 안에서만 머물러 든다면 학문적 지식이 우리의 전체적인 삶에 기여하는 방식도 단편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학문적 지식이 아무리 쌓여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어디로 끌어가야 할지 모를 것이다.

-요컨대 철학이 빠진 학문 활동 즉 전체성에 대한 지향을 포기한 학문 활동은 기실 맹목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인간의 지성의 요구를 외면하는 비지성적인 활동에 불과한 것이다.(*그런데, 내가 가진 혐의는 철학 자체가 그러한 요구를 외면해오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대학에서의 철학은 '철학과'라는 분과학문의 자기보존에 더 급급했었던 것은 아닌지? 더불어 '전체성의 지향'은 여전히 가능한 철학적 과제이겠지만, 그것이 '철학과'의 과제로서 설정 가능한 것인지?)  

-모름지기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혹시 우리나라의 학문 활동이 바로 그런 맹목적인 수준의 것이 아닌지는 심각히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 대목에 관한 한 우리 학문이 결코 높은 평가를 받기는 어렵다고 보는데 그 까닭은 우리 학문의 기구한 역사에서 비롯한 사정에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유구한 학문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급격한 전통의 단절을 겪게 되고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서야 우리의 전통과는 다른 전통에서 유래한 서양의 학문을 수입하여 본격적인 학문 활동을 개시했다.

 

 

 

 

-우리가 서양 학문을 받아들인 시점은 대체로 서양의 학문사에서는 분과 학문의 다기화, 다양화가 상당히 진행된 뒤이기 때문에 우리는 학문의 분화 과정에 대한 역사의 기억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분과 학문의 모태였던 철학은 이미 소멸된 것처럼 여겨도 상관이 없었고 오직 자신이 종사하는 전문 학문 분야에서 급하게 성과를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려 왔던 것이다.(*우리 학문사의 특수성쯤 되겠다. 그리고 여기서 전문화된 '학문'은 '서양 근대 학문'을 가리키는 것이겠다.) 

-그래서 우리 학계는 겉으로는 그렇게 바람직한 일이라고 강조해 마지않는 학제간 협업도 실제로는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한다.(*그런 조정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철학이라는 쪽으로 결론이 도출되겠다.) 인접 학문 간의 협업도 쉽지 않은데, 성격이 크게 다른 여러 문제가 교차되는 인간 삶의 현장에 처할 때에는 당황해 하기 일쑤다. 가령 생명과학의 문제가 윤리 문제와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 실제의 인간 삶이지만 사고가 나기 전에는 미리 이 점을 심각하게 다루려 들지 않는다. 그런 예는 도처에서 발견되는데 분과 학문의 울타리 넘어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미리 학문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여유를 갖기 까지는 한참 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보인다.(*철학의 의욕을 따라주지 못하는 것은 철학의 걸음처럼 보인다. 생명과학의 윤리적 문제에 깊이 개입할 만한 전문적 식견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개입이란 건 도덕적 교훈론에 그치기 십상이지 않을까?) 

-우리 학계에 철학이라는 간판을 단 분야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전체성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려는 철학이 우리 학계에서는 마치 여러 다른 학문 분야와 별도로 독립된 분야인 양 따로 성채 안에 거주하고 있어서 본래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연구하는 서양 철학이 현실 적합성을 결여한 것처럼 보이는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과거 유학은 그런 점에서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연구, 교육되는 철학과는 달리 모든 학문 활동의 전체적인 이념적 통제 장치로서 작용을 했기 때문에 강력한 현실 적합성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지식을 하나로 꿰서 인간 삶 전체 즉 생활 세계 전반에 연관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우리가 연구하는 서양철학이 현실 적합성을 결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진단은 유효하며 적확하다. 반성은 철학이 주특기이지만, 철학자들은 그 주특기를 잘 살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유학이 그런 힘을 과도하게 발휘한 때문에 오히려 학문의 성장에 특히 과학적 방법의 개발에 심각한 장애가 되었다는 비판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시 유학이 확보한 현실 적합성은 마치 국민의 삶을 마구 재단하려 드는 독재정권의 강압 앞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약자들이 느끼는 현실적 힘과도 같은 것에 유사한 것이었다. 우리는 결코 그런 식으로 숨 막히는 학문 세계를 이상적인 것으로 동경할 수는 없다. 철학이 전체적인 그림을 완성해 가지고 있는 양 행세를 하면, 그래서 몇 가지 철학적 원리에서 분과학문이 담당해야 할 지식의 내용까지 연역적인 하향통로를 통해 모두 직접 제공할 수 있다는 식으로 행세를 하면 그것은 명백히 학문사의 후퇴를 뜻할 것이다. 그것은 신앙의 교리를 근거로 지구의 운동까지 이러 저러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요하는 중세로 후퇴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이제는 전체의 그림을 함부로 그리지는 못하더라도 분과 학문의 지식들 간의 상호 연관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이 우리의 삶 전반에 대해 지니는 의미를 탐구하며 그것이 전체 지식 세계 내에서 또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자리를 메김 하려는 시도를 하는 철학의 필요가 절감되는 때다. 그런 철학은 분과학문의 발전에 장애가 되지 않으면서 그것들의 성과를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겠다. 그런 철학이 아직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은 것 그것이 우리 학문 세계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필자가 과제로 제시하는 것은 분과학문들간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탐구와  학문과 삶과의 바람직한 상호 자리매김의 시도이겠다. 그리고 더 기본적으로는 철학이 이런 문제들에 '개입'해야 한다는 것.)  

-좀 낡은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는 가끔 학문 활동에 있어서 주체성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의 학문이 주체성을 확보해 가지지 못할 때 우리는 결국 서구의 하청 학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자가 비판의 목소리도 자주 듣게 된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창조적 사유도 이런 비판과 깊이 관련된 주제다. 우리는 아직까지는 서양 학문이 만들어 낸 문제들 즉 그들의 학문사에 역사적 배경을 둔 문제의 한 자락을 마치 우리에게 주어진 지상의 과제인 양 붙잡고 씨름을 해왔다.

 

 

 

 

-정말 창조적 사유가 빛을 발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주어진 문제의 답만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세계에 던질 수 있을 때다. 그리고 그럴 수 있을 때가 바로 우리 학문의 주체성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때다. 철학적인 노력이 없이 그럴 때가 오기를 기대할 수는 있을까. 그 대답은 너무나 명백하다.(*너무나 명백한 대답에 굳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창조적 사유'와 '학문의 주체성'을 후학들에게 모범으로 제시해주는 것, 그것이 '우리 학자'들의 진정한 과제가 아닐까?) 

06. 0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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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맑스주의와 이진경주의

 

 

 

 

최근에 나온 화제의 신간은 이진경(박태호 교수)의 <미-래의 맑수주의>(그린비, 2006)이다. 아직 구해서 읽어보진 않았지만, 맑스(주의)에 관한 책으로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5) 2부와 함께 듀엣으로 읽어볼 계획은 갖고 있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니콜라스 쏘번의 <들뢰즈 맑스주의>(갈무리, 2005)를 꼽을 수 있겠다(네그리/하트의 <제국>까지 포함시키고자 하면 줄줄이 딸린 책들 때문에 또다른 한판의 방대한 책읽기가 되므로, 가급적 자제해야겠다). 해서, 예비적으로 <미-래의 맑스주의>에 대한 몇 개의 리뷰를 읽어보았다. 이 페이퍼는 그걸 정리한 것이다. 세 개의 서평인데, 각각 한겨레, 동아일보, 경향신문의 것이다.

(1)먼저, 한겨레의 리뷰(06. 04. 07)는 "마르크스 근대성 넘어 '이진경주의'로"로 제목을 달고 있다(*해서, 이 글 제목 '이진경주의'의 출처가 됐다). 내가 읽기에, 그 속사정은 (전통적) '맑스주의'와 이진경의 (과격한) 맑스주의를 분리시키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해서, '미-래의 맑스주의'를 '이진경 맑스주의', 혹은 더 줄여서 '이진경주의'라고 불러주는 것. 서로 인상 구기지 않게 말이다. 그건 그냥 나의 '추측'이고, 다른 속사정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리뷰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진경씨의 새 책이 나왔다. <미래의 맑스주의>(2006)다. 그의 이력은 그가 쓴 책으로 대표된다.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1986년), <철학과 굴뚝청소부>(1994), <맑스주의와 근대성>(1997년),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2000), (노마디즘>(2002), <자본을 넘어선 자본>(2004년). 그는 쉼없이 생각하고 썼다.(*물론 저자는 거명된 책들보다 더 많은 책을 썼다. <철학과 굴뚝청소부>는 대학가 베스트셀러였고,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은 박사학위논문이며, <노마디즘>은 한국사회의 '메인스트림'으로부터도 호평을 얻으면서 '이진경'이란 운동권 브랜드가 '인문학 브랜드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책이다. 동시에 국내에 들뢰즈와 노마드/노마디즘 붐을 가져온.)

-<사회구성체론> 이후 꼭 20년만에 나온 <미래의 맑스주의>는 그 이력에 책 하나를 더하는 의미 이상이다. 책 제목에 마르크스주의라는 꼬리표를 달았지만, 실은 ‘이진경주의’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앞으로 그를 말할 때는 <사회구성체론>과 <미래의 맑스주의>를 언급하게 될 것이다. <사회구성체론>에서 그러했듯이, <미래의 맑스주의>에서 그는 사상가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즉, '사상가' 맑스나 맑스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상은 이진경 자신의 이야기라는 함축이다). 이를 따라가며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두 책의 또다른 공통점이다(*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90년대 이후 그의 화두는 근대의 패러다임에 오염된 마르크스주의를 재구성·재작동시키는 것이었다. 이 화두를 풀기 위해 10여년이 넘도록 사상의 초원 위를 유목하며 고독한(실은 난해한) 전투를 벌였다. 푸코, 들뢰즈, 가타리 등 서구 탈근대론자들의 문제설정과 씨름했다. 동양사상과 생명과학 등도 섭렵했다(*'10여년이 넘도록'이 아니라 '10여년도 안되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사회구성체론> 이후에 나온 모든 책들은 그런 편력의 특정한 대목을 반영하는 것이다. 책이 나올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이진경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박수를 치건 돌을 던지건,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이 이 책에 담겨 있다. 그동안 몇몇 책에서 등장했던 독특한 사유와 개념들이 <미래의 맑스주의>를 통해 비로소 전체적인 얼개 속에 자리를 잡았다.

-우선 유물론을 물질개념에서 탈피시켰다. “물질이란 말로부터 유물론을 해방시키지 않고서는 유물론에 대한 적절한 정의에 이를 수 없다.” 그는 물질과 관념을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유물론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대신 “유물론이란 ‘외부’에 의한 사유”라고 말한다. 이에 비해 관념론은 “내부에 의해 스스로 완결되는 사유”다. 유물론은 “모든 것의 본질은 그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철학이다.(*단순한 의문. '외부'에 관한 사유는 규정하기에 따라서 초월적 관념론을 모두 포괄하는 거 아닌가? 혹은, '철학의 외부'란 철학이 자신의 무능력한 대면하는 지점 아닌가? 철학의 외부에 대해서 (유물론)철학은 무엇을 사융할 수 있는가? 사유되는 외부도 여전히 '외부'인가?) 

-이어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의 한계도 넘나든다. 인간과 자연의 결합을 넘어 인간과 기계와 자연의 합일을 말한다. 그의 생태학 안에서는 “기계와 자연은 더이상 대립하지 않는”다. 예컨대 “자연으로 돌아가는 보존의 생태주의가 아니라 기계와 문명조차 거대한 자연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는” 게 그의 세계 인식의 틀이다.(*이미 '포스트-휴먼' 시대에 진입하고 있는지라 이러한 주장은 특별히 생소하거나 과격하지 않다. 물론 '생태주의자'들이라면 불편해 할 주장일 것도 같지만). 

-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인 노동가치론도 전복시켰다. 기존의 노동가치론은 “노동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는 자만이 인간이라는 인간중심주의”의 함정에 빠져있다고 비판했다. “노동의 특권적 중심성을 제거해 노동과 비노동의 구별을 넘어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명제는 과거의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과정의 기계화를 언급하면서 “이젠 ‘인간화된 기계’가 가치를 생산한다”고 말한다.(*인간과 기계의 결합에서 유추될 수 있는 자연스런 결론이다. 요컨대, 그는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휴머니즘에 반대한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의 계급론이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노동계급을 구분했다. 그가 보기에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자 계급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란 “사회를 지배하는 척도에서 배제되거나 벗어난 자들”이다. 여기서 ‘프롤레타리아-되기’ 전략이 나온다.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 척도에 복속되는 길을 벗어나 이것과는 다른 삶의 방식, 다른 종류의 가치, 다른 종류의 세계를 창안하는 것”이 핵심이다. ‘프롤레타리아-되기’는 기존 지배질서를 거부하는 다양한 소수자들을 한데 모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이런 전략은 그가 주창해온 ‘코뮨주의’의 핵심이다.(*하면, 노동자계급은 이렇게 자문하도록 해야겠다. "내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란 말인가?" 여성이라고 해서 자연스레 '여성'이 되는 게 아니며, '여성-되기'가 요청되듯이, 노동자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 편입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겠다. 프롤레타리아트-되기가 필요한 것. 한편으로 생각하면, 노동계급은 부르주아도 아니고 프롤레타리아트도 아니다! )

-거칠게 보자면 그는 국가·노동계급·인간 중심주의를 거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진경주의’는 확실히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와 상당히 다르다. <미래의 맑스주의>는 이진경이 몸담고 있는 연구집단 ‘수유+너머’가 주창한 코뮨주의적 실천에 대한 하나의 선언이거나 알리바이다.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의 불온함이 책을 읽는 분들의 또다른 불온함을 촉발하고 증식시키길 바란다”고 적었다.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함의를 오늘에 되살리려는 그의 깊은 모색의 끝에서, 그러나 여전히 남는 의문은 있다. 지금 이진경의 사유와 ‘수유+너머’의 실험을 불온하게 여기며 두려워 하는 이는 과연 누구인가?(*뭐가 불온하냐는 반문이겠다. 한편으론 자신의 '불온함'에 대한 과신도 불온함의 일종인 것일까? 문득 자신의 '야함'에 대해서 언제나 자신하는 마광수가 떠오른다.)   



(*)이어지는 건 기사의 보충설명인데, '이진경의 지적 이력'이라고 해서 군대 차트식으로 '화염병→감옥→사회주의 붕괴→‘수유+너머’'라고 정리하고 있다. 

-400여쪽의 책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맑스주의와 코뮨주의’라는 제목의 장이다. 20여쪽의 짧은 글에서 이진경은 자신의 지적 이력을 담담하게 돌아보고 있다. “돌맹이와 화염병, 매캐한 최루가스로 가득찬 전투의 바람, 혹은 아련한 꿈같은 혁명의 바람”이 스물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적었다. 1980년대에 대한 회상이다. 그러나 감옥에 있는 동안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했다. 고민에 빠졌다. “좀 더 나은 삶의 꿈을 포기할 수 없는 한, 맑스스주의는 쉽게 버릴 수 있는 하나의 이념이 아니었다.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집스런 지조로 그저 안고 가기만 하면 되는 그런 이념도 아니었다.”

-그는 기존의 사회주의 사회 역시 또다른 ‘근대 사회’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여기서부터 ‘근대성’에 대한 긴 모색이 시작됐다. 근대적 마르크스주의를 넘으려는 모색은 “맑스주의 외부에서 던져져야 했고, 맑스주의 안에 없는 것, 그 공백을 통해서 사유돼야 했다.” 푸코, 들뢰즈, 가타리, 네그리, 심지어 동양의 화엄학까지 끌어들였다. ‘수유+너머’ 연구실을 출범시킨 것도 이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연구와 삶이 하나로 결합된, 근대적인 것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창안하고 실험하며 새로운 종류의 습속과 무의식을 생산하는 ‘연구자들의 코뮨’”을 시도했다.(*그러니까 노동자 계급보다 혁명적인 것이 이 '연구자들'이겠다. 프롤레타리아트 후보 1순위. 한데, 노동자도 아니고 연구자도 아닌 이들, 즉 삶과 결합될 '연구'를 안 갖고 있는 이들은 어디에 포함되어야 하는지?)

-이진경은 이제 “기존의 맑스주의, 지배적 형태의 맑스주의를 다른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계급과 혁명에 대한 구도에 다른 이질적 요소들이 침투해 뒤섞이는 것, 이미 자본주의 사회의 또다른 주류 계급이 된 노동운동을 소수화의 전략을 통해 새롭게 혁명화하는 것”을 통해 이뤄진다고 믿는다.(*그러니까 이진경에게서 맑스주의는 '맑스의 정신'을 뜻하는 것이겠다. 맑스의 정신을 근대 맑스주의주로부터 분리/구출하고자 하는 것.) 

-그런 그가 ‘급진 혁명가’가 아니라 스테디셀러 작가로 인식되는 경향은 분명 불행한 일이다.(*자본의 외부에 대한 사유도 자본주의 안에서 유통되는 것이니까.) 20년전 봄에 나온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서문에서 이진경은 “사상적 논쟁 과정이 주체의 형성과정”이라고 썼다. 코뮨주의의 주체를 형성하려는 그에겐 지금 논쟁할 상대가 없다. 어쩌면 논쟁하려는 사람들이 없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아무도 대꾸를 안 해준다는 얘기인가?)

(2)이어서 동아일보의 리뷰(06. 04. 08)는 '마르크스 넘어서 코뮌주의'란 제목을 달고 있고, 따라서 방점은 맑스주의가 아닌 '코뮌주의'에 찍힌다.  

 

 

 



-<굿바이 프로이트>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한때 그를 믿었다가 버린 사람의 수로 쳤을 때 이 빈 출신의 의사(프로이트)를 능가하는 것은 마르크스밖에 없다.” 그렇다. 프로이트도 울고 갈 만큼 수많은 개종자를 양산했던 그 마르크스에 대한 개종을 거부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 1980년대 운동권의 대표적인 논객이었고 1990년대 탈(脫)근대사상 연구에 주력해 왔던 박태호 서울산업대 교수다. 필명 이진경으로 더 유명한 그는 한때 사회주의혁명을 꿈꾸다 감옥까지 다녀온 뒤 한동안 푸코와 들뢰즈의 사상에 푹 빠져 지냈다. 그러다 2004년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발표하며 마르크스의 사상을 집단주의적이고 경제결정론적인 공산주의가 아닌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로서 코뮌주의로 재해석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요컨대, '코뮌주의자로서'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한국사회의 '주류'로부터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 연장선상에 놓였다. 그가 주장하는 코뮌주의는 익숙한 마르크스 사상과 많이 다르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DNA로 꼽히는 변증법적 유물론, 노동가치설, 계급투쟁론, 자본주의 붕괴론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모든 것이 물질적 요소에 의해 좌우된다는 ‘경제주의’와는 다른 ‘외부에 의한 사유’라고 주장한다. 관념론이 모든 문제를 체계 내부의 인과관계에서 바라본다면 유물론은 이를 초월해 우리 삶을 규정하는 체계 외부 조건에 대한 통찰을 말한다는 것이다.(*마르크스 또한 자본주의를 '자본의 외부'와 관련지어 사고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체계의 예외성으로서의 '외부'란 체계의 구성적 조건이기도 하다는 상식 정도만 상기하기로 하자. 그의 '외부'는 어떤 외부인 것일까? '수유+너머'?)

-그는 노동가치설에 대해 기계나 화폐, 지대도 가치를 생산한다는 측면에서 인간중심주의적 노동가치설의 폐기를 주장한다. 또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 계급질서 내 노동자계급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계가 포착할 수 없는 ‘비(非)계급’으로 바라볼 것을 주장한다. 그것은 다양한 비주류 소수자 그룹으로 재해석돼야 한다는 것이다. 코뮌주의는 바로 이런 소수자들이 자본주의라는 체계 외부의 공간을 마련하려는 모든 불온한 노력을 말한다는 것이다.(*'불온성'은 저자가 표나게 강조하는 바인 모양이다. 한데, '체계 외부의 공간'은 어디일까? '율도국'? 아니면, '존 말코비치'의 머리속?)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것이 과연 마르크스주의일까. 근대적 사상가였던 마르크스에게 온갖 탈근대적 사유를 주입한 뒤 이게 본래의 마르크스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국 유생들이 중국 취푸(曲阜) 공자 생가에 걸려 있는 초상화가 공자를 안 닮았다고 버럭 화를 내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고 했던 선불교의 기개가 못내 아쉽다.(*미래의 맑스주의, 아직 도래하지 않는 맑스주의가 제안하는 것은 한편으론 모든 과거에 실재해던 모든 '역사적' 맑스주의의 기각이다. "너네, 맑스주의 아냐, 딱지 다 반납해!" 한데, 그건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역사적 자본주의, 혹은 현실 자본주의의 모순은 '미래의 자본주의', 진정한 자본주의에 의해서 극복될 거라고.) 

(3)경향신문의 리뷰(06. 04. 09)는 "마르크시즘을 뒤집어 새 마르크시즘 만났다"란 제목이다. 여기서 '이진경주의'는 '새 마르크시즘'이란 표현을 얻었다. 가장 호의적인 게 아닌가 싶다(인터뷰라서 그런가?).

-사회학자 이진경씨(서울산업대 교수·43)가 ‘미-래의 맑스주의’(그린비)를 내놓았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석서이지만, 책에는 ‘이것이 마르크시즘인가?’ 할 정도로 새로운 내용이 적지 않다. 이 책에서 이씨는 도시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적인 계급이 아니라고 말한다. 노동자가 프롤레타리아트는 아니다라는 주장도 펼친다. 인간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에 대해서는 ‘기계적 포섭’ 개념을 통해 기계 또한 가치를 생산한다며 맞선다. 공산주의를 대신하는 ‘코뮨주의’라는 사회모델도 내놓았다. 독창적이다 못해 낯설고 도발적이다.

-그래서 책은 이씨의 독창적인 사회구성체론으로도 읽힌다. 이씨가 20대인 1987년 내놓았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의 연장선인 셈이다(*나는 이 80년대의 '고전'을 읽지 않았다. 다들 사회과학 서적들을 읽을 때라서, 나는 딴 걸 읽었다). 한때 들뢰즈, 가타리, 푸코 등에 탐닉하며 ‘노마디즘’을 유행시킨 이씨를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만났다.

-마르크시즘으로 다시 돌아온 것인가.

“아니다. 대학시절 마르크스를 만난 이후 한번도 마르크스를 떠난 적이 없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마르크스보다는 푸코, 들뢰즈와 같은 비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만났지만, 모두 마르크스를 제대로 알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의 연구를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보다 잘 재구성할 수 있었다.”

-흔히 마르크시즘은 사적 유물론으로 알려져 있는데.

“유물론은 흔히 물질의 일차성을 인정한다거나 정신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것을 말하지만, 나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외부에 의한 사유’로 정의한다(*유물론에 대한 알튀세르의 정의는 탈목적론으서의 우연성에 대한 사고이다). 역사유물론에서 ‘역사’가 사물의 본질을 규정하는 조건들을 뜻한다고 볼 때 사적유물론은 역사 과학이라기보다는 외부를 통해 사유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하는 게 옳다. 스탈린주의자들처럼 사적유물론을 사회발전단계론으로만 봐서는 곤란하다.”

-그렇다면 마르크시즘의 핵심은 무엇인가.

외부에 의한 사고다. 사물은 정해진 것도 없고 본성도 관계 속에 달라진다. 사물은 조건에 비춰 사유하고 관계 속에서 해석하는 게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다.(*'人'이 아닌 '人間'에 대해 사고했던 동아시아 사상, 혹은 불교의 연기론 사상이야 말로 '관계적 사유'라는 의미에서 유물론에 근접하는 것이겠다.) 외부에 의한 사고는 유물론을 물질이란 개념과 결별하도록까지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계급 개념 등이 통설과 달라 혼란스럽다.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문제 등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요구한다. 오늘날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은 노동자 계급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비계급’으로 보아야 한다. 한국노총 등에서 보듯 노동자가 귀족화되는 속에서 노동운동은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문제 등과 연대를 가져야 한다. 현재의 노동운동만으로는 변혁의 힘을 가질 수 없다.”

-‘기계적 포섭’은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을 부정하는 것인가.

“가치나 가치 생산에 대한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기계화·자동화도 가치를 생산한다. BT(생명공학) 산업도 잉여가치의 중요한 원천이 되고 있다. 정보화시대, 생명복제시대에는 인간과 기계, 생명체와 기계에 관해서도 기존과 다르게 사유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인간 중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하다.”(*물론 저자는 알튀세리언의 경력을 거쳤으며, 알튀세르적 맑스주의는 반휴머니즘을 표방했었다.)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밝힌 이씨는 루카치, 그람시,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랬듯이 마르크시즘은 역사 속에서 계속 재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씨가 책 제목을 ‘미-래의’ 마르크스주의라고 붙인 것은 마르크시즘이 다가온 현재뿐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을 이해하는 데도 유용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에게 마르크시즘은 ‘새로운 것을 찾는’ 무엇이 아니라 ‘아직 사유되지 않은 것을 사유하는’ 사상이자 철학이다.(*그에게서 마르크시즘은 일종의 '메시아주의'인 것이다.)

06. 04. 12.

P.S. '이진경'의 이미지를 검색하다가 눈에 띈 글은 김규항의 '이진경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이다. 'B급 좌파'의 견해(04. 07. 10)도 참고삼아 들어보기로 한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진경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이따금 받는다. 오늘은 이렇게 대답했다.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이진경의 방법은 지적 편력, 혹은 지적 허세다. 편력이든 허세든 그가 알아서 선택할 일이지만 그런 방법이 지나치게 많은 존중을 얻는 건 우스운 일이다. 그 배경엔 그가 80년대 PD 운동권의 주요한 이론가였다는 다소 엉뚱한(그러나 한국이라는 기지촌 지식 사회에선 지극히 당연한) 이유가 있다.

-이진경의 주 메뉴가 현실 변혁의 가능성을 차단당한 유럽 좌파들의 정신적 공황과 지적 허세(특히 프랑스의)의 결합에 의해 탄생한 탈근대 철학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탈근대철학은 90년대 이후 한국에서 이진경을 비롯한 80년대 우등생 좌파들의 정신적 공황과 포기할 수 없는 지적 허세에 안성맞춤이었다. 주류 사회에 편입되기엔 자의식이 강하고, 기약 없이 풍찬노숙하며 운동하기에도 너무나 유약한 그들에게 탈주, 횡단, 유목 같은 탈근대 철학의 개념들은 뇌까리는 건 모든 것을 실제로 청산하면서도 뭔가 진지한 탐색을 지속하는 듯한 외양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진경은 최근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라는 책을 ‘예약 이벤트’까지 벌이며 냈다. 그 책의 맑스주의적 가치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있지만, 그 점에 대해선 이미 맑스가 말한 바 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해 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하는 것이다.”(*요컨대, '근대적 맑스주의자'로서 김규항은 '새로운 맑스주의'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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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맑스주의와 이진경주의

 

 

 

 

최근에 나온 화제의 신간은 이진경(박태호 교수)의 <미-래의 맑수주의>(그린비, 2006)이다. 아직 구해서 읽어보진 않았지만, 맑스(주의)에 관한 책으로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5) 2부와 함께 듀엣으로 읽어볼 계획은 갖고 있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니콜라스 쏘번의 <들뢰즈 맑스주의>(갈무리, 2005)를 꼽을 수 있겠다(네그리/하트의 <제국>까지 포함시키고자 하면 줄줄이 딸린 책들 때문에 또다른 한판의 방대한 책읽기가 되므로, 가급적 자제해야겠다). 해서, 예비적으로 <미-래의 맑스주의>에 대한 몇 개의 리뷰를 읽어보았다. 이 페이퍼는 그걸 정리한 것이다. 세 개의 서평인데, 각각 한겨레, 동아일보, 경향신문의 것이다.

(1)먼저, 한겨레의 리뷰(06. 04. 07)는 "마르크스 근대성 넘어 '이진경주의'로"로 제목을 달고 있다(*해서, 이 글 제목 '이진경주의'의 출처가 됐다). 내가 읽기에, 그 속사정은 (전통적) '맑스주의'와 이진경의 (과격한) 맑스주의를 분리시키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해서, '미-래의 맑스주의'를 '이진경 맑스주의', 혹은 더 줄여서 '이진경주의'라고 불러주는 것. 서로 인상 구기지 않게 말이다. 그건 그냥 나의 '추측'이고, 다른 속사정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리뷰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진경씨의 새 책이 나왔다. <미래의 맑스주의>(2006)다. 그의 이력은 그가 쓴 책으로 대표된다.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1986년), <철학과 굴뚝청소부>(1994), <맑스주의와 근대성>(1997년),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2000), (노마디즘>(2002), <자본을 넘어선 자본>(2004년). 그는 쉼없이 생각하고 썼다.(*물론 저자는 거명된 책들보다 더 많은 책을 썼다. <철학과 굴뚝청소부>는 대학가 베스트셀러였고,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은 박사학위논문이며, <노마디즘>은 한국사회의 '메인스트림'으로부터도 호평을 얻으면서 '이진경'이란 운동권 브랜드가 '인문학 브랜드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책이다. 동시에 국내에 들뢰즈와 노마드/노마디즘 붐을 가져온.)

-<사회구성체론> 이후 꼭 20년만에 나온 <미래의 맑스주의>는 그 이력에 책 하나를 더하는 의미 이상이다. 책 제목에 마르크스주의라는 꼬리표를 달았지만, 실은 ‘이진경주의’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앞으로 그를 말할 때는 <사회구성체론>과 <미래의 맑스주의>를 언급하게 될 것이다. <사회구성체론>에서 그러했듯이, <미래의 맑스주의>에서 그는 사상가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즉, '사상가' 맑스나 맑스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상은 이진경 자신의 이야기라는 함축이다). 이를 따라가며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두 책의 또다른 공통점이다(*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90년대 이후 그의 화두는 근대의 패러다임에 오염된 마르크스주의를 재구성·재작동시키는 것이었다. 이 화두를 풀기 위해 10여년이 넘도록 사상의 초원 위를 유목하며 고독한(실은 난해한) 전투를 벌였다. 푸코, 들뢰즈, 가타리 등 서구 탈근대론자들의 문제설정과 씨름했다. 동양사상과 생명과학 등도 섭렵했다(*'10여년이 넘도록'이 아니라 '10여년도 안되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사회구성체론> 이후에 나온 모든 책들은 그런 편력의 특정한 대목을 반영하는 것이다. 책이 나올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이진경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박수를 치건 돌을 던지건,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이 이 책에 담겨 있다. 그동안 몇몇 책에서 등장했던 독특한 사유와 개념들이 <미래의 맑스주의>를 통해 비로소 전체적인 얼개 속에 자리를 잡았다.

-우선 유물론을 물질개념에서 탈피시켰다. “물질이란 말로부터 유물론을 해방시키지 않고서는 유물론에 대한 적절한 정의에 이를 수 없다.” 그는 물질과 관념을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유물론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대신 “유물론이란 ‘외부’에 의한 사유”라고 말한다. 이에 비해 관념론은 “내부에 의해 스스로 완결되는 사유”다. 유물론은 “모든 것의 본질은 그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철학이다.(*단순한 의문. '외부'에 관한 사유는 규정하기에 따라서 초월적 관념론을 모두 포괄하는 거 아닌가? 혹은, '철학의 외부'란 철학이 자신의 무능력한 대면하는 지점 아닌가? 철학의 외부에 대해서 (유물론)철학은 무엇을 사융할 수 있는가? 사유되는 외부도 여전히 '외부'인가?) 

-이어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의 한계도 넘나든다. 인간과 자연의 결합을 넘어 인간과 기계와 자연의 합일을 말한다. 그의 생태학 안에서는 “기계와 자연은 더이상 대립하지 않는”다. 예컨대 “자연으로 돌아가는 보존의 생태주의가 아니라 기계와 문명조차 거대한 자연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는” 게 그의 세계 인식의 틀이다.(*이미 '포스트-휴먼' 시대에 진입하고 있는지라 이러한 주장은 특별히 생소하거나 과격하지 않다. 물론 '생태주의자'들이라면 불편해 할 주장일 것도 같지만). 

-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인 노동가치론도 전복시켰다. 기존의 노동가치론은 “노동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는 자만이 인간이라는 인간중심주의”의 함정에 빠져있다고 비판했다. “노동의 특권적 중심성을 제거해 노동과 비노동의 구별을 넘어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명제는 과거의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과정의 기계화를 언급하면서 “이젠 ‘인간화된 기계’가 가치를 생산한다”고 말한다.(*인간과 기계의 결합에서 유추될 수 있는 자연스런 결론이다. 요컨대, 그는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휴머니즘에 반대한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의 계급론이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노동계급을 구분했다. 그가 보기에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자 계급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란 “사회를 지배하는 척도에서 배제되거나 벗어난 자들”이다. 여기서 ‘프롤레타리아-되기’ 전략이 나온다.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 척도에 복속되는 길을 벗어나 이것과는 다른 삶의 방식, 다른 종류의 가치, 다른 종류의 세계를 창안하는 것”이 핵심이다. ‘프롤레타리아-되기’는 기존 지배질서를 거부하는 다양한 소수자들을 한데 모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이런 전략은 그가 주창해온 ‘코뮨주의’의 핵심이다.(*하면, 노동자계급은 이렇게 자문하도록 해야겠다. "내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란 말인가?" 여성이라고 해서 자연스레 '여성'이 되는 게 아니며, '여성-되기'가 요청되듯이, 노동자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 편입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겠다. 프롤레타리아트-되기가 필요한 것. 한편으로 생각하면, 노동계급은 부르주아도 아니고 프롤레타리아트도 아니다! )

-거칠게 보자면 그는 국가·노동계급·인간 중심주의를 거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진경주의’는 확실히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와 상당히 다르다. <미래의 맑스주의>는 이진경이 몸담고 있는 연구집단 ‘수유+너머’가 주창한 코뮨주의적 실천에 대한 하나의 선언이거나 알리바이다.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의 불온함이 책을 읽는 분들의 또다른 불온함을 촉발하고 증식시키길 바란다”고 적었다.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함의를 오늘에 되살리려는 그의 깊은 모색의 끝에서, 그러나 여전히 남는 의문은 있다. 지금 이진경의 사유와 ‘수유+너머’의 실험을 불온하게 여기며 두려워 하는 이는 과연 누구인가?(*뭐가 불온하냐는 반문이겠다. 한편으론 자신의 '불온함'에 대한 과신도 불온함의 일종인 것일까? 문득 자신의 '야함'에 대해서 언제나 자신하는 마광수가 떠오른다.)   



(*)이어지는 건 기사의 보충설명인데, '이진경의 지적 이력'이라고 해서 군대 차트식으로 '화염병→감옥→사회주의 붕괴→‘수유+너머’'라고 정리하고 있다. 

-400여쪽의 책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맑스주의와 코뮨주의’라는 제목의 장이다. 20여쪽의 짧은 글에서 이진경은 자신의 지적 이력을 담담하게 돌아보고 있다. “돌맹이와 화염병, 매캐한 최루가스로 가득찬 전투의 바람, 혹은 아련한 꿈같은 혁명의 바람”이 스물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적었다. 1980년대에 대한 회상이다. 그러나 감옥에 있는 동안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했다. 고민에 빠졌다. “좀 더 나은 삶의 꿈을 포기할 수 없는 한, 맑스스주의는 쉽게 버릴 수 있는 하나의 이념이 아니었다.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집스런 지조로 그저 안고 가기만 하면 되는 그런 이념도 아니었다.”

-그는 기존의 사회주의 사회 역시 또다른 ‘근대 사회’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여기서부터 ‘근대성’에 대한 긴 모색이 시작됐다. 근대적 마르크스주의를 넘으려는 모색은 “맑스주의 외부에서 던져져야 했고, 맑스주의 안에 없는 것, 그 공백을 통해서 사유돼야 했다.” 푸코, 들뢰즈, 가타리, 네그리, 심지어 동양의 화엄학까지 끌어들였다. ‘수유+너머’ 연구실을 출범시킨 것도 이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연구와 삶이 하나로 결합된, 근대적인 것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창안하고 실험하며 새로운 종류의 습속과 무의식을 생산하는 ‘연구자들의 코뮨’”을 시도했다.(*그러니까 노동자 계급보다 혁명적인 것이 이 '연구자들'이겠다. 프롤레타리아트 후보 1순위. 한데, 노동자도 아니고 연구자도 아닌 이들, 즉 삶과 결합될 '연구'를 안 갖고 있는 이들은 어디에 포함되어야 하는지?)

-이진경은 이제 “기존의 맑스주의, 지배적 형태의 맑스주의를 다른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계급과 혁명에 대한 구도에 다른 이질적 요소들이 침투해 뒤섞이는 것, 이미 자본주의 사회의 또다른 주류 계급이 된 노동운동을 소수화의 전략을 통해 새롭게 혁명화하는 것”을 통해 이뤄진다고 믿는다.(*그러니까 이진경에게서 맑스주의는 '맑스의 정신'을 뜻하는 것이겠다. 맑스의 정신을 근대 맑스주의주로부터 분리/구출하고자 하는 것.) 

-그런 그가 ‘급진 혁명가’가 아니라 스테디셀러 작가로 인식되는 경향은 분명 불행한 일이다.(*자본의 외부에 대한 사유도 자본주의 안에서 유통되는 것이니까.) 20년전 봄에 나온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서문에서 이진경은 “사상적 논쟁 과정이 주체의 형성과정”이라고 썼다. 코뮨주의의 주체를 형성하려는 그에겐 지금 논쟁할 상대가 없다. 어쩌면 논쟁하려는 사람들이 없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아무도 대꾸를 안 해준다는 얘기인가?)

(2)이어서 동아일보의 리뷰(06. 04. 08)는 '마르크스 넘어서 코뮌주의'란 제목을 달고 있고, 따라서 방점은 맑스주의가 아닌 '코뮌주의'에 찍힌다.  

 

 

 



-<굿바이 프로이트>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한때 그를 믿었다가 버린 사람의 수로 쳤을 때 이 빈 출신의 의사(프로이트)를 능가하는 것은 마르크스밖에 없다.” 그렇다. 프로이트도 울고 갈 만큼 수많은 개종자를 양산했던 그 마르크스에 대한 개종을 거부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 1980년대 운동권의 대표적인 논객이었고 1990년대 탈(脫)근대사상 연구에 주력해 왔던 박태호 서울산업대 교수다. 필명 이진경으로 더 유명한 그는 한때 사회주의혁명을 꿈꾸다 감옥까지 다녀온 뒤 한동안 푸코와 들뢰즈의 사상에 푹 빠져 지냈다. 그러다 2004년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발표하며 마르크스의 사상을 집단주의적이고 경제결정론적인 공산주의가 아닌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로서 코뮌주의로 재해석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요컨대, '코뮌주의자로서'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한국사회의 '주류'로부터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 연장선상에 놓였다. 그가 주장하는 코뮌주의는 익숙한 마르크스 사상과 많이 다르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DNA로 꼽히는 변증법적 유물론, 노동가치설, 계급투쟁론, 자본주의 붕괴론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모든 것이 물질적 요소에 의해 좌우된다는 ‘경제주의’와는 다른 ‘외부에 의한 사유’라고 주장한다. 관념론이 모든 문제를 체계 내부의 인과관계에서 바라본다면 유물론은 이를 초월해 우리 삶을 규정하는 체계 외부 조건에 대한 통찰을 말한다는 것이다.(*마르크스 또한 자본주의를 '자본의 외부'와 관련지어 사고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체계의 예외성으로서의 '외부'란 체계의 구성적 조건이기도 하다는 상식 정도만 상기하기로 하자. 그의 '외부'는 어떤 외부인 것일까? '수유+너머'?)

-그는 노동가치설에 대해 기계나 화폐, 지대도 가치를 생산한다는 측면에서 인간중심주의적 노동가치설의 폐기를 주장한다. 또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 계급질서 내 노동자계급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계가 포착할 수 없는 ‘비(非)계급’으로 바라볼 것을 주장한다. 그것은 다양한 비주류 소수자 그룹으로 재해석돼야 한다는 것이다. 코뮌주의는 바로 이런 소수자들이 자본주의라는 체계 외부의 공간을 마련하려는 모든 불온한 노력을 말한다는 것이다.(*'불온성'은 저자가 표나게 강조하는 바인 모양이다. 한데, '체계 외부의 공간'은 어디일까? '율도국'? 아니면, '존 말코비치'의 머리속?)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것이 과연 마르크스주의일까. 근대적 사상가였던 마르크스에게 온갖 탈근대적 사유를 주입한 뒤 이게 본래의 마르크스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국 유생들이 중국 취푸(曲阜) 공자 생가에 걸려 있는 초상화가 공자를 안 닮았다고 버럭 화를 내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고 했던 선불교의 기개가 못내 아쉽다.(*미래의 맑스주의, 아직 도래하지 않는 맑스주의가 제안하는 것은 한편으론 모든 과거에 실재해던 모든 '역사적' 맑스주의의 기각이다. "너네, 맑스주의 아냐, 딱지 다 반납해!" 한데, 그건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역사적 자본주의, 혹은 현실 자본주의의 모순은 '미래의 자본주의', 진정한 자본주의에 의해서 극복될 거라고.) 

(3)경향신문의 리뷰(06. 04. 09)는 "마르크시즘을 뒤집어 새 마르크시즘 만났다"란 제목이다. 여기서 '이진경주의'는 '새 마르크시즘'이란 표현을 얻었다. 가장 호의적인 게 아닌가 싶다(인터뷰라서 그런가?).

-사회학자 이진경씨(서울산업대 교수·43)가 ‘미-래의 맑스주의’(그린비)를 내놓았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석서이지만, 책에는 ‘이것이 마르크시즘인가?’ 할 정도로 새로운 내용이 적지 않다. 이 책에서 이씨는 도시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적인 계급이 아니라고 말한다. 노동자가 프롤레타리아트는 아니다라는 주장도 펼친다. 인간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에 대해서는 ‘기계적 포섭’ 개념을 통해 기계 또한 가치를 생산한다며 맞선다. 공산주의를 대신하는 ‘코뮨주의’라는 사회모델도 내놓았다. 독창적이다 못해 낯설고 도발적이다.

-그래서 책은 이씨의 독창적인 사회구성체론으로도 읽힌다. 이씨가 20대인 1987년 내놓았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의 연장선인 셈이다(*나는 이 80년대의 '고전'을 읽지 않았다. 다들 사회과학 서적들을 읽을 때라서, 나는 딴 걸 읽었다). 한때 들뢰즈, 가타리, 푸코 등에 탐닉하며 ‘노마디즘’을 유행시킨 이씨를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만났다.

-마르크시즘으로 다시 돌아온 것인가.

“아니다. 대학시절 마르크스를 만난 이후 한번도 마르크스를 떠난 적이 없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마르크스보다는 푸코, 들뢰즈와 같은 비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만났지만, 모두 마르크스를 제대로 알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의 연구를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보다 잘 재구성할 수 있었다.”

-흔히 마르크시즘은 사적 유물론으로 알려져 있는데.

“유물론은 흔히 물질의 일차성을 인정한다거나 정신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것을 말하지만, 나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외부에 의한 사유’로 정의한다(*유물론에 대한 알튀세르의 정의는 탈목적론으서의 우연성에 대한 사고이다). 역사유물론에서 ‘역사’가 사물의 본질을 규정하는 조건들을 뜻한다고 볼 때 사적유물론은 역사 과학이라기보다는 외부를 통해 사유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하는 게 옳다. 스탈린주의자들처럼 사적유물론을 사회발전단계론으로만 봐서는 곤란하다.”

-그렇다면 마르크시즘의 핵심은 무엇인가.

외부에 의한 사고다. 사물은 정해진 것도 없고 본성도 관계 속에 달라진다. 사물은 조건에 비춰 사유하고 관계 속에서 해석하는 게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다.(*'人'이 아닌 '人間'에 대해 사고했던 동아시아 사상, 혹은 불교의 연기론 사상이야 말로 '관계적 사유'라는 의미에서 유물론에 근접하는 것이겠다.) 외부에 의한 사고는 유물론을 물질이란 개념과 결별하도록까지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계급 개념 등이 통설과 달라 혼란스럽다.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문제 등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요구한다. 오늘날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은 노동자 계급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비계급’으로 보아야 한다. 한국노총 등에서 보듯 노동자가 귀족화되는 속에서 노동운동은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문제 등과 연대를 가져야 한다. 현재의 노동운동만으로는 변혁의 힘을 가질 수 없다.”

-‘기계적 포섭’은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을 부정하는 것인가.

“가치나 가치 생산에 대한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기계화·자동화도 가치를 생산한다. BT(생명공학) 산업도 잉여가치의 중요한 원천이 되고 있다. 정보화시대, 생명복제시대에는 인간과 기계, 생명체와 기계에 관해서도 기존과 다르게 사유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인간 중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하다.”(*물론 저자는 알튀세리언의 경력을 거쳤으며, 알튀세르적 맑스주의는 반휴머니즘을 표방했었다.)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밝힌 이씨는 루카치, 그람시,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랬듯이 마르크시즘은 역사 속에서 계속 재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씨가 책 제목을 ‘미-래의’ 마르크스주의라고 붙인 것은 마르크시즘이 다가온 현재뿐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을 이해하는 데도 유용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에게 마르크시즘은 ‘새로운 것을 찾는’ 무엇이 아니라 ‘아직 사유되지 않은 것을 사유하는’ 사상이자 철학이다.(*그에게서 마르크시즘은 일종의 '메시아주의'인 것이다.)

06. 04. 12.

P.S. '이진경'의 이미지를 검색하다가 눈에 띈 글은 김규항의 '이진경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이다. 'B급 좌파'의 견해(04. 07. 10)도 참고삼아 들어보기로 한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진경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이따금 받는다. 오늘은 이렇게 대답했다.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이진경의 방법은 지적 편력, 혹은 지적 허세다. 편력이든 허세든 그가 알아서 선택할 일이지만 그런 방법이 지나치게 많은 존중을 얻는 건 우스운 일이다. 그 배경엔 그가 80년대 PD 운동권의 주요한 이론가였다는 다소 엉뚱한(그러나 한국이라는 기지촌 지식 사회에선 지극히 당연한) 이유가 있다.

-이진경의 주 메뉴가 현실 변혁의 가능성을 차단당한 유럽 좌파들의 정신적 공황과 지적 허세(특히 프랑스의)의 결합에 의해 탄생한 탈근대 철학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탈근대철학은 90년대 이후 한국에서 이진경을 비롯한 80년대 우등생 좌파들의 정신적 공황과 포기할 수 없는 지적 허세에 안성맞춤이었다. 주류 사회에 편입되기엔 자의식이 강하고, 기약 없이 풍찬노숙하며 운동하기에도 너무나 유약한 그들에게 탈주, 횡단, 유목 같은 탈근대 철학의 개념들은 뇌까리는 건 모든 것을 실제로 청산하면서도 뭔가 진지한 탐색을 지속하는 듯한 외양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진경은 최근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라는 책을 ‘예약 이벤트’까지 벌이며 냈다. 그 책의 맑스주의적 가치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있지만, 그 점에 대해선 이미 맑스가 말한 바 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해 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하는 것이다.”(*요컨대, '근대적 맑스주의자'로서 김규항은 '새로운 맑스주의'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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