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지난달에 일본의 젊은 비평가이자 사회학자 아즈마 히로키(1971- )가 다녀갔다.' 오타쿠 전문가'로도 불리는 그의 책의 국역본이 곧 출간예정이라고 하는데, 그와 관련한 강연을 가졌던 모양이다. '스포츠칸'의 이종원 기자만이 아즈마의 행보에 대해 관심을 갖고 기사를 써놓은 바 있기에 여기에 옮겨놓는다. 참고로, 나는 지난봄에도 아즈마 히로키의 저서명이기도 한 '우편론적 불안에 대하여'란 페이퍼를 쓴 바 있다.
한편 아즈마는 1994년 23살의 나이로 가라타니 고진이 주관하던 잡지 <비평공간>에 독창적인 자크 데리다론인 '존재적, 우편적'을 발표함으로써 일본 평단에 혜성과 같이 등장했었다. <존재적, 우편적>(1998)은 그의 첫번째 저서가 된다. 가라타니 고진과 아사다 아키라의 계보를 잇는 3세대 비평가로 주목을 받았지만, 이후에 아즈마는 데리다나 들뢰즈 같은 프랑스 현대철학이 아니라 아니메나 오타쿠 같은 하위문화에 경도되어 '오타쿠 전문가'가 되었다. 1999년 도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는 일본 국제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아무려나, 어떤 종류이거나 그의 책들이 번역/소개되기를 기다렸는데, 근간인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외에도 <우편적 불안> 등이 소개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
스포츠칸(2006.03. 26) 한때 ‘오타쿠’와 ‘저패니메이션’이 화두였던 시절이 있었다. 10여년전 일본문화개방을 앞두고 일본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오타쿠’로 번졌던 것. ‘당신, 댁이라는 뜻을 지닌 일본어로 마니아보다 더욱 심취하여 집착하는 사람’이라는 설명이 붙어다녔던 이른바 ‘오타쿠’는, 한때 일본문화의 핵심인양 칭송받기도 했고 때론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오늘날, 모두가 오타쿠가 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던 10년 전의 위기감은 간 곳이 없다. 한국에는 오타쿠 문화보다 다양한 일본문화가 호응을 얻고 있으며, 한국문화도 ‘한류’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것. 과연 한국과 일본을 지배했던 그 많던 오타쿠들은 어디로 갔을까.
-일
본의 사회학자이자 오타쿠 전문가인 아즈마 히로키가 자신의 오타쿠 연구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문학동네)의 한국어판 발간을 앞두고 지난 22일 서울대학교에서 강연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아즈마는 ‘오타쿠는 현대 일본사회를 반영하는 포스트모던적인 존재’라고 분석했다.




▲오타쿠는 오직 일본 특유의 존재=아즈마는 우선 “오타쿠는 일본의 특수한 상황속에서만 나올 수 있는 존재”라고 쐐기를 박는다. 일본 특유의 오랜 만화전통과 거대한 만화시장의 산물이며, 결코 국제적으로 내세우거나 널리 전파될 수 있는 문화는 아니라는 것. 그러나 아즈마는 “일본의 특정 사회, 특정문화를 반영하는 오타쿠야말로 사회학적으로 흥미로운 연구대상”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오타쿠는 변화했다=10여년전인 1990년대, 일본에는 많은 사건이 있었다. 버블경제 붕괴 및 고베 대지진, 오움진리교 독가스 사건 등으로 사회적 불안이 조성되고 국가적 신뢰가 떨어지는 현상이 벌어진 것. 이에 대해 아즈마는 “국가적 사회적 거대 담론이나 서사가 없어짐에 따라 일본만화도 거대 서사가 없어졌다. 대신 인터넷과 게임 등으로 오타쿠가 개인화되면서 캐릭터나 미소녀 등 미시적 존재에 열광하게 됐다”고 주장한다. 장중한 스토리 만화 대신 가벼운 캐릭터를 내세운 에세이만화가 인기를 끄는 최근 한국만화계에도 통용될만한 주장이다.
▲오타쿠와 저패니메이션의 미래는?=아즈마는 일본의 만화, 애니메이션이 두가지 방향으로 발전할 것으로 내다본다. 한가지는 ‘오타쿠에 의한 오타쿠를 위한’ 특수문화산업이 일본 내에서 현재 모습대로 계속 발전한다는 것. 다른 한가지는 ‘저패니메이션’이라는 이름하에 한국, 대만 등으로부터 ‘새피’를 수혈받으며 ‘국제화’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다. 아즈마는 “일본보다 이제 한국과 대만 등의 작가들이 일본풍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더욱 잘 그린다”며 “‘공각기동대’처럼 세계각국의 다양한 인력과 자본이 유입되며 일본색은 점점 옅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가까운 나라이기도 하지만, 아즈마는 지난해 11월초에도 세미나 강연차 한국을 다녀갔다. 그에 관한 소개기사 역시 스포츠칸의 이종원 기자가 썼다.
스포츠칸(2004. 11. 03) 일본과 한국의 만화전문가들이 ‘오타쿠’와 ‘만화독자’를 논했다. 제3회 청강 국제만화세미나’가 지난 2일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 이연홀에서 개최됐다. 청강문화산업대학 청강국제만화교류연구소(소장 박인하)가 주최한 이번 세미나는 ‘대중문화의 새로운 리더, 만화 독자의 재발견’을 주제로 ‘만화 독자’에 대해 한일 전문가들이 국내 최초로 조명했다.





-일본 국제대학 교수이자 저명한 사회평론가인 아즈마 히로키는 이날 발표에서 “일본의 만화 독자들 사이에 이야기보다 캐릭터를 지향하는 ‘모에’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 현지에서 한·일만화교류를 연구하는 이현석씨는 “한국 신세대 만화작가들이 일본만화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하고 있다”며 “이들은 축소된 한국 내 만화시장을 벗어나 일본만화 시스템에 적응하며 한·일만화교류에 기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밖에도 거북이북스 기획자 김현국, 애니사이트 운영자 서찬휘, 한·일만화 칼럼니스트 선정우, 만화 스토리작가 전진석 등 다양한 패널들이 폭넓은 발표와 토론을 벌였다. 이번 세미나를 기획한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 박인하 교수는 “발전한 네트워크 환경에 새롭게 등장한 취향 클러스터는 주로 디지털을 중심으로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을 소비한다”며 “이들 중 일부는 자신을 스스로 타인과 구분해 ‘폐인’이라 칭하는데 이들이 디지털 문화의 트렌드 리더이자 얼리어댑터”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90년대 이후 만화의 충성스러운 독자들은 애니메이션, 캐릭터, 게임을 소비하며 대중문화를 끌어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06. 04. 08.
P.S. 아즈마의 데뷔작인 데리다론을 일부 번역/정리한 글도 인터넷상에는 떠돌아다닌다. 책이 정식으로 번역되기를 기대하는 처지이지만, 맛보기가 될 듯하여 여기에 발췌해놓는다. 참고로, 우리말로는 흔히 '해체'라고 번역하는 'deconstruction'을 일본에서는 '탈구축'이라고 옮긴다.
-데리다의 탈구축은 무엇보다 자기동일성 위에 세워진 근대적 주체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으며, 탈구축적 독해는 근대적 주체의 동일성을 위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기 데리다는 발화 주체의 동일성 유지에 '기여하는 것'과 그것을 '위협하는 것'을 몇 개의 개념적 대립쌍으로 정리한다. 대립쌍을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목소리/문자(쓰여진 것), 다의성/산종, 파롤/에크리튀르, 현전적 주체(지금 여기있는 주체)/비현전적 주체. 전자의 개념들은 기호를 주체의 통제 하에 둔 것으로 만든다. 한편 후자의 개념들은 기호가 주체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인용되고, 해석될 수 있게 한다. 주체의 '목소리'는 말하여진 것의 의미를 통제하여 발화주체의 동일성이 유지되도록 하지만, '쓰여진 것'은 그것을 그 자리에서 파열시켜 이중화 해 버린다. 이중화? 이는 발화의 '이중소속성'을 뜻하는데,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 다음 설명을 차근차근 읽어보도록 하자.






-폴 드 만은 "무슨 차이가 있어?(What`s the difference?)"라는 의문문을 예로 데리다의 탈구축을 설명한다. 드 만에 의하면, 이 쓰여진 문장이 뜻하는 바가 "'차이'가 '무엇'인지를 정말 알고 싶다는 것인지, 아니면 차이를 분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목소리'는 그 말이 어느 쪽으로 해석되어야 하는지 답을 준다 = 기호를 주체의 통제 하에 둔다.) 주어진 문장을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차이'의 내용에 대한 질문이 되고, 수식의문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차이'의 존재를 부정하는 문장이 된다. 어느 독해가 올바른 것인지는, 원리적으로 판단 불가능하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두 독해의 차이가 서로 충돌하고 상호 대립하는 요청/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드 만은 이 차이를 '문법'과 '수식'의 차이가 낳은 문제라 했는데, 이를 다르게 말하자면 '콘스타티브'와 '퍼포모티브'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콘스타티브와 퍼포머티브라는 용어는 50년대에 옥스퍼드에서 창시된 언어행위론이 도입한 것으로, 언어가 지닌 지시적 의미와 실천적 의미의 차이를 나타낸다. 콘스타티브한(사실확인적인) 말이란 그 말의 내용이 순수하게 의미하는 것으로, 위의 예에서는 '차이에 대해 알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한 경우에 해당한다. 반면에 퍼포머티브한(행위수행적인) 말은 말의 내용이 지칭하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 자체보다는 그 말의 실질적 의도/현실에서의 실천적 의미에 무게를 두는 것으로, 위의 예에서는 '차이를 분별할 필요가 없다'는 해석이 이에 해당한다.
-하나의 언명이 콘스타티브한 독해와 퍼포머티브한 독해, 즉 두가지 독해 레벨에 동시소속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가 낳는 이율배반(더블·바인드) 현상 - 이것이 탈구축을 설명해 주는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탈구축'적 독해는 모든 텍스트 속에 깃들어 있는 그 '이율배반'을 폭로하기 위해 행해진다. "탈구축은 우리들이 텍스트에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기호는 에크리튀르로서의 면이 있다. 기호가 기호인 한, 어떠한 형태로든 "쓰여질", 즉 기록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크리튀르는 끊임없이 어떤 컨텍스트에서 절단되어 표류하고, 다른 컨텍스트로 흘러가 그와 접목된다. 그 결과 모든 기호는 원리적으로, 항상 동시에 복수(複數)의 언어(랑그), 복수의 컨텍스트, 복수의 독해 레벨에 속해 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기호의 이러한 이중소속성(산종)이 가장 첨예하게 추궁되는 때는, '콘스타티브'와 '퍼포머티브'가 상반되는 요청을 할 경우, 즉 하나의 언명이 하나의 주장을 하면서, 동시에 그 주장을 배반해버릴 경우이다. '탈구축'은 무엇보다도 우선 이 '이율배반'의 경험이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러한 경험을 '불가능성의 경험'이라 부른다.




-'다의성'과 '산종'의 차이에 대해 다른 관점에서 정리해 보자. 양자의 대립은 '파롤'과 '에크리튀르'의 대립과 병행한다. 목소리=파롤은 항상 '지금 여기', 즉 현전적 주체의 통제 하에 있다. 대조적으로 문자=에크리퀴르는 항상 그 통제로부터 벗어난다. (<공각기동대>에서 project 2501이 이 비슷한 말을 했었다. 인류가 문자를 발명할 때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인류가 그것을 통제하지 못할 때가 올터이니... project 2501이라는 존재는 인류라는 주체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문자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러한 극히 상식적인 인식하에 데리다는, 현전적 주체의 환원가능성에 갇혀있는 파롤적 다양성(다의성)과 끊임없이 그로부터 '일탈'하는 에크리튀르적 다양성(산종)이라는 개념대립을 부각시킨다. '산종'은 현전적 주체로부터 벗어날 가능성, 임의의 컨텍스트로부터의 단절가능성=인용가능성에 의해 실현된다. 즉 산종의 효과는 하나의 같은 에크리튀르가 복수의 다른 컨텍스트 사이를 이동함으로써, 항상 사후적으로 나타난다. '하나의 에크리튀르'가 각기 다른 컨텍스트 사이에 위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산종적 복수성을 파생케 한다. '에크리튀르의 단수성'이 기호에 깃든 '산종적 복수성'보다 이론적으로 선행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사에 이 '산종'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 현전적 주체의 의지 하에 형성되었던 철학사는 붕괴의 위험에 처한다. 철학의 역사는 고유명(소크라테스-아리스토텔레스...)의 집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적이고 경험적으로 성립된 것이면서도, 필연적이고 초월론적으로 진리를 논한다. '철학'이라 불리는 앎을 지탱하는 이 역설의 의미를, 데리다는 매우 진지하게 숙고한다. 만약 '철학' 전체가 하나의 언어게임일 뿐이라면(이 입장은 많은 상대주의자, 예를 들면 로티에 의해 논해지고 있다) 다른 모든 철학(=서양중심적인 지금의 철학이 아닌 철학)도 항상 가능하며, 따라서 새로운 철학을, 즉 새로운 어휘와 스타일과 참조표를 발명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고유명의 계보 : 에피쿠로스-마키아벨리-홉즈-스피노자-루소...) 실제로 그러한 시도는 무수히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또한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데리다의 관심은 그런 것이 아니다. 철학적 발명을 아무리 축적해 나간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후적으로 항상 '유일한' 언어게임으로 여겨질 것이다. 복수의 철학이 존재하는 것은, 결국 '철학 명부'를 풍부하게 하는 것(파롤적 다양성=다의성)일 뿐이다. 데리다의 사고는, 오히려 그 풍부함(다의성)을 전도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오히려 우리들의 왜 항상 이러한 언어게임을 해야 하는가, 왜 이 역사는 유일한가(=현전적 주체의 의미통제), 그리고 만약 그것이 유일하다면 그것을 통해 망각된 것은 무엇인가(='산종'의 '다의성'화), 이러한 질문들을 한다.

-<우편엽서>는 철학자를 우편국으로 비유했다. 개념(우편물)이 철학자(우편국)들에게 배달되어 간다. 이것이 철학에 대한 데리다의 이미지이다.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새로운 철학적 '고유명'이 되는 것, 그것은 새로운 우편물을 새로운 우편국에서 발송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발송한 우편물이 주체의 의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에크리튀르=산종)는 것에 주안점을 두는 데리다의 사유는 오히려 그곳에서 배달의 불확정성(=불가능성의 경험), 즉 행방불명된 우편물(=유령)을 향한다. "그것이 도착하기 위한 조건, 그것은 결국은 그것이 도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애초에 처음부터 도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을지도 모를 우편물을 탐색하는 데리다에게 새로운 우편국은 필요없다. 전기 데리다로부터 후기 데리다로의 변화, 이론적 스타일에서 간텍스트적 스타일로의 이동은 우리들의 생각에 따르면, '철학'과 '역사'에 대한 이 특이한 인식에 의해서 촉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