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담유 > 돌아온 탕아를 위해 씌어진 20세기의 위대한 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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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테의 수기 ㅣ 릴케전집 12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김용민 옮김 / 책세상 / 2000년 2월
평점 :
절판
'순간'에 사로잡힌 사람. 착란도 하나의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찰나'에 미혹되어버린 사람. 찰나에 미혹되면서 서사가 지워져버린 사람. 그래서 매순간 불안한 사람. 그런 사람에게 《말테의 수기》를 권하고 싶다. 말테가 고백한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고 싶다.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모든 것이 내 안 깊숙이 들어와서, 여느 때 같으면 끝이었던 곳에 머물지 않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지금까지는 모르고 있었던 내면을 지금 나는 가지고 있다. 이제 모든 것이 그 속으로 들어간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나는 모른다."
보는 법을 새로 배울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남겨진 삶이란 단절과 분열, 몰락의 형식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러나 시간을 건너뛰는 법을 알아차린 사람만이 추억과 미래를 교통시키며 현실을 재창조해나갈 수 있다. 릴케는 바라보는 것만이, 정면을 응시하고 그 너머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만이 시간을 건너뛸 수 있는―도처에 무수히 널린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충실한 길이라고 오늘 우리에게 전한다.
도시의 한켠에서 죽음을 맞닥뜨리다
스물여덟 살의 덴마크 시골 청년 말테가 대도시 파리에 도착한 지 3주가 흘렀다. 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오는 도시. 그러나 실상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도시. 그는 떠나온 사람들에게 이곳의 소식을 전하고 싶다. 편지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는다. 그러나 도시에서 보낸 3주가 마치 몇 년은 지나가버린 듯한 부피감으로 다가온다. 그는 변해버린 것이다. 그가 변해버렸다면 이제 그가 알고 있었던 사람은 낯선 타인이나 다름없다. 타인에게 편지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말테는 이제 누구에게 편지를 써야 할까.
그는 시간을 건너뛸 수밖에 없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게 말을 건다. 내면에게 말을 거는 행위는 추억을 호출하는 일과 같다. 죽음을 맞닥뜨린 도시에서 그는 그의 기억 속 미답지로 남아 있는 여러 죽음의 얼굴을 호출한다. 그의 고향에서는 죽음이 병원 영안실에서 대량 생산되는 죽음과 달랐다. 거기에서는 죽음이 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 시종관 브리게는 두 달 동안 요란하게 죽어갔다. 유서 깊은 저택, 이 방 저 방 옮겨 다니며 사람들에게 웃어라, 이야기하라, 유희하라, 조용히 하라고 요구하고 때로는 호령하면서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힘든 죽음을 받아들였다. 말테에게 할아버지의 죽음은 삶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적어도 도시에 속해 있기 전까지 말테에게 죽음은 누구에게나 고유한 삶의 한 형식이었다. "남자들은 갑옷 깊숙이 죽음을 지니고 있었"고 "아주 늙어서 자그맣게 오그라든 여자들은 무대처럼 엄청나게 큰 침대에 누워 모든 가족과 하인과 개가 지켜보는 앞에서 분별 있고 주인다운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그들은 '죽어갔고' 말테의 집안은 몰락했다. 그는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으며, 이제 그의 유년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말테는 그들을 다시 삶 속으로 불러들이는 방법을 이곳, 죽음이 도처에 널린 도시에서 알아차린다.
쓰지 않으면 안 된다
파리의 허름한 여관방, 밤마다 불을 밝히고 글을 쓰는 예술가 말테. 보는 법을 새로이 배우고 있는 그는 두려움과 공포에 맞서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 길을 걸어온 것처럼 피곤을 느끼는 그는 이제 아는 사람도 없고 가진 것도 없다. 집도, 물려받은 물건도, 개도 없는 삶에 몸서리가 처진다. 추억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탄식만이 그의 친구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다. 그의 유년은 추억 속에 있고 추억은 땅 속에 묻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 모든 추억에 다시 다다르기 위해서는 나이를 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나이 먹는 일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시를 쓰는 행위는 그에게 나이를 먹는 일과 같다. 시는 그에게 감정이 아니라 경험이기 때문이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평생을, 가능하다면 오래 살아서 삶의 의미와 달콤함을 모아야 한다. 그러나 추억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추억이 많아지면 그것을 잊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추억이 다시 솟아오르기를 기다려야 한다. "추억이 우리 몸 속에서 피가 되고 눈짓이 되고 몸짓이 되어 이름을 잃어버리고, 우리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게 될 때에 비로소 아주 드물게 그 추억의 한가운데에서 시의 첫 단어가 솟아올라 걸어나오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작은 방에 앉아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테는 생각하고 있다. 수많은 진보와 발명,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표면에만 머물러 있는 인간 삶의 본질을 바라보기 위해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는, 그것만이 그의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고독과 불안과 공포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정면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일 뿐.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말테에게 현실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맞섬을 뜻한다.
돌아온 탕아, 그리고 사랑
현실에 맞서는 이는 한번쯤 현실에서 튕겨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한번쯤 튕겨나갔다 돌아와야만 한다. 그래야만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사랑받기를 기대하는 이는 현실의 편안한 품속에서 정체되기를 바라는 이와 같다. 그때의 사랑은 반쪽짜리, 불구의 그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소유하지 않는 사랑, 사랑 받기를 바라지 않는 그것이다. 아낌없이 주는 어머니의 사랑이, 조건 없이 기다리는 여인의 사랑이 그 어떤 사랑보다 위대한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집을 떠나 먼 길을 헤매던 탕아가 어느 날 불현듯 집으로 돌아와 집안 식구들의 발밑에 몸을 던진다. 그것은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일까, 사랑해주지 말기를 간청하는 몸짓일까. 분명한 것은 그는 이제 사랑하기에는 몹시 어려운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는 신만이 그를 사랑할 수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신은 아직 그를 사랑하려 하지 않는다. 이로써 비극이 시작된다. 그러나 사랑받기를 원하지 않는 자는 그 비극을 넘어설 수 있다. "사랑받는 것은 불타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마르지 않는 기름으로 타오르며 빛을 내는 것이다. 사랑받는 것은 무상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영원하다."
돌아온 탕아, 그가 곧 말테이고 릴케이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그들만이 인간 실존의 비극을 끌어안을 수 있다. 순간순간에 깃들이는 사랑을 몸소 실천할 수 있는 그들만이 바로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