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대학생 > 철학을 넘어서는 철학책!
에티카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 서광사 / 1990년 10월
평점 :
절판


제목이 너무 거창한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간행된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서적과 논문들을 살펴보면 이 말을 부분적으로는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데, 68혁명 전후의 프랑스에서 간행된 게루, 마트롱, 마슈레이, 발리바, 그리고 들뢰즈의 주해서가 그렇고,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간행된 컬리의 저작선집과 요벨의 연구서적과 편저가 그러하다. 사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엄격함과 난해함으로 전문철학자들도 상당히 꺼려했던 것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스피노자 전공자는 꽤 드물다. 그러나, 이진경 선생이 '근대 속에서 탈근대를 사유한 철학자'라고 평했던 것처럼, 스피노자를 깊이 공부하면 그만큼 철학적인 학자도 없다.

우선, 그의 주적인 '에티카'를 읽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이슬람 철학을 공부해야 하고, 토미즘과 둔스 스코투스 등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알아야 한다. 아니, 중세철학의 주요 개념들을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사유에 대해 정통해야 하며, 라이프니츠와 서신을 주고 받았던 것처럼, 그의 철학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호이겐스가 그와 친분이 있었던 것처럼, 근대의 과학에 대해서 알아야 하며, '에티카'의 방법론인 기하학에 정통해야 한다. 물론, '에티카' 및 그의 주요저작이 라틴어로 쓰인 점을 감안해, 라틴어를 독해할 줄 알아야 한다.

(1910년 즈음에 나온 라틴어 판본은 구할 수 없을 것이다. 1980년 즈음에 독일에서 라틴어-독어 대역본을 구하라!) 마지막으로, 당시의 네덜란드의 정치적 혼란과 드 비트 형제와의 친분, 그리고 '신학-정치학 논고'에서 그의 정치적 입장을 이해한다면, 당시 홉즈의 사유와 근대의 민주주의 개념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물론, 여기까지는 그 주변의 인물에 대해서만 개괄한 것이다. 그의 사유체계 안에서는 '내재성' 개념, 'potentia/potestas', '자기 원인', '실체', '존재', '능산적 자연/소산적 자연', '속성', '양태', '코나투스', '인식의 3가지 종류'를 알아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에티카'를 읽어보되, 컬리가 편집한 저작선집(85년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에서 간행)을 살펴보면 좋을 것이다.

꼼꼼한 라틴어/영어 개념비교와 함께 '신학-정치학 논고'를 제외한 저작들을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스피노자 이후, 헤겔,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주석가들 이외에 네그리와 하트의 정치적인 변용 등을 살펴보라. 스피노자가 20세기 들어 상당히 연구되었지만, 이제 시작이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저작은 그만큼 중요하다. 긴 글을 여기 적을 수는 없을 것이다. 혹시 참고문헌이 필요하다면 메일을 보내달라. 가장 완벽한 참고문헌 목록을 내가 만들어놓았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정말 매혹적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아직까지 '에티카' 안에서 필연적인 오류를 발견한 것을 보지 못했다. 해석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 그런 비판은 요원한듯 하다. 정말 이 책은 철학 바깥의 철학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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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46)

장마철 치고는 모처럼 개인 날이다. 두 주 전에 책정리(=노가다)를 좀 한 후유증으로 며칠 앓고 나서는 '회복기' 같은 한 주를 보냈다(그래봐야 여기저기 좀 쑤시고 배탈이 난 정도였지만). 15년 전 제대를 하고 나서 다시 서울로 올라와 단촐한 하숙집 독방에 둥지를 틀었을 때, 내가 싸들고 온 책들은 4단짜리 책장을 절반도 채우지 못했었다. 물론 그러고 2년이 못 되어 내 방은 다리를 뻗고 자기도 어려울 만큼 책들로 가득 차게 되었지만(책이 많은 게 아니라 방이 작았다고 해두자). 당시는 책이 지금처럼 많이 나오지도 않았고, 책을 구할 수 있는 루트가 지금처럼 다양하지도 않았다(요즘은 소장하는 책 중 사는 책의 비율이 20% 정도밖에 안된다. 나머지는 다 복사/제본한 책들이다). 물론 요즘은 구하기 힘든 (원서)마스터본들을 당시에는 쉽게 접할 수 있었지만. 하여간에 그 증식 속도에 있어서 책들은 어느 박테리아 못지 않다. 한마디로 못말리는 책들인 것.

세월은 흘러, 6년전 지금 살고 있는 전세집에 이사를 올 때 아파트 경비 아저씨는 서점을 하다가 왔냐고 내게 물었다. 지금 그 책들은 2배가 넘게 불어나 있으며, 이번에 50-60권을 갖다 버렸다(그간에 이렇게 버리고 남주고 헌책방에 갖다 팔고 한 책들이 500권은 된다). 전체로 따지면 아마 1%도 안될 듯싶지만. 집사람이 몰래 갖다버린다고 하도 으름장을 놓길래 자진해서 읍참마속을 결행한 것. 장마철이지만 책은 다행히도 잠시 비가 멎은 날에 내다놓았다. 주로 잡지와 소설책(무슨무슨 수상작품집), 그리고 <복잡계 경제학> 같은 책들이었다(사다놓은 경제학 책만 해도 꽤 되는 내가 재테크의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아이러니이자 여기저기서 무시당하는 빌미이다). <어리숙한 척 남자 부려먹기> 같은 책도 누가 볼세라 이 참에 버렸다. 그렇게 갖다 버리고, 또 베란다에 마련한 새 박스들에다 잔뜩 구겨넣어서 생존공간을 얼마간 확보했다. 딸아이는 집이 아주 넓어졌다고 좋아했지만(남들이 보면 웃을 일이다), 읽을 책만 사서 읽으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그건 오늘 아침에도 반복됐다). 이젠 아이도 어느새 못말릴 나이가 돼 버렸다. 하지만, 아이도 언젠가는 알아줄지 모른다. 책이라는 환상이 아빠의 존재근거이며 아빠의 DNA는 (A-T-C-G 대신에) 어쩌면 B-O-O-K 라는 염기서열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젠장, 이런 bookish한 책귀신 얘기 대신에 다시, 새로 나온 책들 얘기나 좀 하기로 한다.

     

제일 먼저 꼽을 책은 '러시아 문화사'란 부제를 단 올랜도 파이지스(O. Figes)의 <나타샤 댄스>(이카루스)이다. 소개에 따르면 "러시아의 근대화를 시작한 표트르 대제가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18세기 초에서부터 소비에트의 브레즈네프시대인 1970년대까지 300백년간의 러시아 문화사를 다루는 책"으로서 "도식적인 사상사 혹은 문화적 인물들의 전기를 넘어 역사와 미술, 음악, 발레, 영화 등을 복합적으로 아우르고 있다." 저자는 1959년생의 비교적 젊은 러시아사가로서 런던대학에 재직중이다. 원서의 이미지를 나란히 올려놓았지만(표지는 원서의 것이 더 마음에 든다), 사실 이 책은 2년쯤 전에 몇 권의 러시아사 책을 아마존에서 구입하면서 사들였던 책 중의 하나이다(같은 저자의 러시아 혁명사 와 함께). 저자는 생소했지만, 러시아사 관련서들 가운데 평이 아주 좋았고(에릭 홈스봄도 상찬한 책이다) 분량도 미더웠다(우리말 번역본이 1015쪽인데, 원서도 729쪽에 이른다). 내가 놀란 것은 이만한 부피의 러시아사 책이 아무런 소리소문없이 툭 번역돼 나온 것.   

 

 

 

 

이 분야에서 그만한 부피에 버금하는 책들은 역시나 러시아 문화사의 전개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덕형의 <천년의 울림 -러시아문화예술>(성균관대출판부, 2001)와 존 톰슨의 <20세기 러시아 현대사>(사회평론, 2004)가 있다.  각각 528쪽과 776쪽. <나타샤 댄스>가 얼마나 방대한 분량인지 짐작할 수 있다. 러시아문화사 분야에 모처럼 읽을 만한 책이 출간된 것이 반갑고 기쁘다. 최근에 출간되어 예상밖(?)의 판매실적을 거두고 있는 책, <세계를 뒤흔든 열흘>(책갈피) '현상'이 거품이나 유행이 아니라면 러시아사의 폭넓은 맥락을 보여주고 있는 책들 또한 많이 읽힐 것으로 기대해봄 직하다. 덧붙여, 러시아사쪽 또다른 신간 리처드 휴의 <전함 포템킨>(서해문집).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1925)로 더 잘 알려진 포템킨 호의 반란사건은 1905년 1차 혁명의 도화선이 됐었던 사건이자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담은 책으로 보이는데, 영화의 결말과는 다르게 실제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었고 주모자들은 총살을 당하거나 유형에 처해진 걸로 안다(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은 장르상 '(역사) 판타지'이다). <전함 포템킨>과 관련한 책들은 나는 두 권 더 갖고 있는데, 이것들이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는 신만이 아신다.

 

 

 

 

두번째 책은 지난 2003년 가을 방한했던 슬라보예 지젝의 강연록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철학과현실사)이다. 지난 가을쯤에 나왔어야 할 책이 다소 연착했다. 이미 온라인상에 모든 강연원고와 번역문이 공개돼 있는 만큼 책으로 묶이는 게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나 같은 지젝의 애독자에게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다. 일단 너절하게 널려있는 프린트물들을 시원스레 갖다버릴 수 있게 된 것. 그 비용이 18,000원이니까 싼 건 아니다. 책에는 네 개의 강연문과 한 개의 특별강연문, 모두 5편의 강연원고와 번역문이 차례로 실려 있는데, 아쉬운 건 그해 가을호인가 겨울호 <철학과 현실>에 실련던 지젝과 김상환 교수의 대담 등이 빠진 것. 지젝의 서문을 달고는 있지만, 책에는 아무런 역자 해제도 붙어 있지 않다. 아무래도 성의가 부족하다 싶은데, '다산 기념 철학강좌' 시리즈의 일곱번째 책으로서 억지로 구색을 맞추기 위해 출간된 것이 아닌가 싶다. 번역이라도 좀 수정이 됐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법한데, 실상은 역시나 그다지 개선된 듯하지 않다(짐작에 책임 교정자가 없었다는 얘기다). 가령, 17쪽에서 '선의(善意)의 봉사'는 '재화의 공급servicing of the goods'의 오역이다. 이런 단순한 오역(실수)도 체크되지 않고 책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게 유감스럽다(이 강연문들은 시간이 되면 나중에라도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볼 계획이다).

 

 

 

 

그런 유감을 좀 달래기 위해서 꼽아본 책은 프랑스의 정치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이학사)이다. 이미 그의 <폭력의 고고학>(울력, 2002)이 출간돼 있으며('끌라스트르'로 검색해야 한다), 그에 대한 소개는 이미 그때 한번 이루어진바 있다. 다시 반복하자면, "삐에르 끌라스트르(Pierre Clastres, 1934~1977)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과 당시를 풍미하던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을 극복하고 원시 사회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1970년대 프랑스 지식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출간되는 <폭력의 고고학>은 그가 죽고 난 후 1980년 그가 발표했던 에세이와 서평, 그리고 연구물을 모아 펴낸 유고집이다. 연구 논문들은 1976년에 나온 또 다른 논문집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내용들을 보다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이번에 나온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는 그 '또 다른 논문집'이다. 그러니 두 책이 서로 보족적으로 읽혀질 만하다. 클라스트르에 대한 해설은  <오늘의 프랑스 사상가들>(문예출판사, 1998)이 자세하다. 거기에서 클라스트르는 르네 지라르와 비교/대비되고 있는바, 가령 <폭력과 성스러움>(민음사) 등과 같이 읽어보는 것도 독서의 한 가지 방법.

세번째 책은 고전 번역으로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아카넷). 전 3권 2,500쪽이 넘는 그야말로 방대한 분량이다. 존 듀이, 찰스 샌더스 퍼스와 함께 미국 프래그머티즘의 세 거두로 꼽히는 윌리엄 제임스의 주저 중 하나인데(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하버드대학에 오래 봉직했는데, 1875년 미국대학 최초로 심리학 강의를 개설했다고 한다.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인 셈이다), 소개를 보니까 이건 그의 저술여정에서 첫번째 시기의 결과물이다.

"제임스의 저술 시기는 대략 세 단계로 구분된다. 첫번째는 스코틀랜드와 독일철학의 정신이해와 골상학의 관점에서 심리학을 연구했던 당시 미국의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실험에 기초한 심리현상연구를 통해 독자적으로 기능주의 심리학을 수립한 시기이다. 이때 <심리학원론>을 출판했다. 두번째는 종교나 철학에 관련된 주제들을 연구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제임스는 여러 곳으로부터 초빙을 받아 강의를 하였는데, 그 결과물은 책으로 출판되어 제임스에게 명성을 안겨다주기도 하였다. 이 무렵 에든버러대학으로부터 기포드 강연 초청을 받아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을 20개의 주제로 나누어 강연하였다. 세번째는 프래그머티즘, 진리론, 그리고 그의 인식론적인 급진적 경험론에 대한 강연을 통해 자기만의 독특한 사상을 확립한 시기이다. 대표적인 강연은 1908~1909년에 행한 옥스퍼드 대학의 히버트 강연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 저술로는 <프래그머티즘> <다원적 우주> <진리의 의미> 등이 있다." 

이 중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한길사, 2000)이 이미 소개돼 있다(번역에 대해서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역자의 지젝 번역으로 봐서는). 세번째 단계의 <프래그머티즘>은 비교적 얇은 책인데, 아직 소개되지 않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프래그머티즘의 길잡이>(철학과현실사)에 내용이 일부 발췌돼 있던가 정리돼 있었던 듯하다). 어쨌든, <심리학의 원리> 같은 고전의 번역/소개는 반가운 일이지만, 이걸 언제, 누가 읽어(줘)야 하는지는 의문이다(심리학 전공자들은 읽는가?) 멜빌의 <모비딕>보다 두꺼운 책이 그것도 소설이 아니라 철학책인 것이니까!

하여간에 심리학 분야에서 내가 언제쯤 번역될지, 과연 번역이 가능은 한 건지 의문을 가졌던 두 권의 책 중 하나가 이번에 나왔다. 나머지 하나는 야스퍼스의 <일반 정신병리학>(1913)이다. 1997년에 나온 리프린트 영역본의 분량이 594쪽이니까 이 책 역시 나름대로 방대하다.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어서 가끔씩 모스크바의 대형서점에 가서 눈길만 주던 책이었다(2만원쯤 했던 듯싶다). 제임스와 야스퍼스는 모두 의대 출신 철학자들이다. 보통 철학자들은 신학이나 수학 전공자들이 많으며, 러셀에 의하면 그들이 철학의 두 계보이다. 거기에 다른 두 계보를 덧붙이자면 나는 문학과 의학을 꼽겠다. 이 네 가지 계보를 정리하는 건 물론 돈벼락을 맞은 이후에 주제를 모르는 상태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만... 

 

 

 

 

네번째 책은 'e시대의 절대문학' 시리즈의 첫권으로 나온 권미선의 <돈키호테>(살림)이다. 부제는 '비극적 운명을 짊어진 희극적 영웅'으로 돼 있고, 분량은 204쪽이니까 기대보다는 얇다. 아마도 중고생들까지 과녁 안에 넣고 있는 모양이다. 성에 차지는 않지만, 논술 입시용으로 고전들에 대한 급조된 요약정리들이 판치는 판국에 200쪽 정도라면 그래도 양호한 편이라고 해두어야겠다. <신곡>, <서유기>, <마담 보다리>, <모비딕>, <동물농장/1984> 등이 이번에 같은 시리즈로 나온 책들이다. 물론 이런 류의 해제를 읽고 나서 손에 들어야 하는 책은 원전이다. 돈키호테의 경우에는 출간 400주년을 기념하여 새 번역본 <돈키호테>(시공사, 2004)도 출간돼 있다(이게 최초의 스페인어 완역본이라면, 이전에 나온 책들은 어찌된 것인가? 범우사판은?). 시간이 부족하다면 책만 사두고 가끔씩 이 대목, 저 대목 뒤적거려보면 된다. 한편, 도스토예프스키 또한 돈키호테의 영향권하에 있는 작가인데, 특히 <백치>가 그렇다. 그 작품에서 우리는 가장 독특한 돈키호테 해석을 만나볼 수 있는데, 이른바 그리스도-돈키호테 형상의 주인공 므이쉬킨. 동시에 므이쉬킨은 그리스도 형상에 대한 가장 독특한 해석이기도 하다. 돈키호테-그리스도.(참고로 파스테르나크는 그리스도를 햄릿 형상으로 이해한다.)

다섯번째 책은  처음 러시아사와 운을 맞추기 위한 미국사 책으로 레이 라파엘의 <미국의 탄생>(그린비). '미국 역사 교과서가 왜곡한 건국의 진실들'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작년에 나온 아주 따끈따근한 책이며, 저명한 역사가 하워드 진이 품질을 보증하고 있는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하워드 진과 더불어 미국 민중사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역사가로 평가받는 저자가 미국의 역사 왜곡을 고발하는 책이다. 아울러 미국 건국을 둘러싼 신화의 본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미국이라는 나라가 독립을 성취할 수 있게 만든 미국 민중의 진정한 정신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그러니 나란히 읽을 책들도 자연스레 추려진다. 잘 모르는 분야에서는 믿을 만한 사람 한 사람만 물고 늘어지면 되는데, 미국사의 경우엔 <미국 민중저항사>(일월서각)의 저자 하워드 진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의 <오만한 제국>(당대, 2001)이나 자전적 에세이 <달리는 기차 위의 중립은 없다>(이후, 2002) 정도를 일단 리스트에 올려놓기로 하자...

05. 07. 03.

P.S. 이밖에도 나온 책들은 많지만, 내가 굳이 군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좋은 책들이다. 보관함에 있는 책들을 차례로 다섯 권만 호명해보면 이렇다.

 

 

 

 

<나타샤 댄스> 대신에 박태균의 <한국전쟁>(책과함께),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 대신에 폴 패튼의 <들뢰즈와 정치>(태학사), <심리학의 원리> 대신에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선집>(아카넷), <돈키호테> 대신에 <단테>(푸른숲), 그리고 <미국의 탄생> 대신에 <엘리건트 유니버스>의 저자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승산)를 집어넣어도 다섯 권의 책으로 모자람이 없다. 이 또다른 선택도 충분히 옹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또 다른 한판의 바둑이다.

 

 

 

 

지난번에 <시네마2>(시각과언어)에 대해서 언급한다고 해놓고 지나쳤는데, 이제 비로소 들뢰즈의 '영화론' 전체를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된 건 반가운 일이다. 2차 문헌만을 읽는 건 어떤 음식을 '알기' 위해서 안내서를 읽는 것만큼이나 싱거운 일일 수 있다. 중요한 건 '먹어보는' 것이다. 직접 말이다.

그간에 여러 차례가 역자가 바뀌었다는 소문을 들은바 있는데, 이번에 나온 <시네마2>는 최상의 선택/결과이었기를 기대한다. 재미있는 건 이 책의 책날개. 여전히 <시네마2>가 근간으로 돼 있고 역자는 엉뚱한 사람의 이름으로 돼 있다. 출판사가 얼마나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정신없었는가' 를 웅변하는 듯하다. 하지만, 마무리를 잘해서 욕먹을 일은 없는 법이니,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교정/교열 등의 후반부 작업에 출판사들이 좀더 신경을 써야 할 때가 되었다...(그나저나 아마존에서 떠온 이미지들은 왜 안 뜨는 걸까?)  

 05. 07.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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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벤야민의 이름'을 읽기 위하여

 

 

 

 

데리다에 관한 페이퍼를 두 편 쓰는 것이 오늘의 일정 중 하나이다. 그게 단지 '하나'일 뿐이니 다른 일정들을 어찌 소화해야 할는지 의문이지만, 하여간에 할일은 많고 갈길은 멀다(곧 도서관에도 다녀와야 하고). 데리다의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2004)에 수록된 두번째 텍스트 '벤야민의 이름'을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다. 첫번째 텍스트는 재작년에 읽고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글로 정리한 바 있다. 데리다의 벤야민 읽기에 대한 정리는 차후로 넘겼었는데, 대충 그 '차후'의 시간이 된 것. '법과 폭력'을 키워드로 한 논문을 준비하면서 계획했던 책들을 더는 미룰 수도 없고 해서 읽어나가고자 한다(논문은 푸슈킨과 셰익스피어에 관한 것이다).

'폭력'에 관한 책들은 세상의 폭력만큼이나 많이 나와 있지만,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와 함께 내가 일차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책들은 아렌트의 <폭력의 세기>나 메를로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 등이다. 만약에 더 여유가 생긴다면,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이나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폭력의 고고학> 같은 인류학 책들로 눈길을 돌릴 수도 있겠다(진중권의 <폭력과 상스러움>은 예전에 읽었다). 그리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조르지오 아감벤(사진)의 <호모 사케르>나 <예외 상태> 같은 책들이 필독 목록이다.  

국역본 <법의 힘>을 읽으면서 내가 참조한 책은 불어본과 영역본이다. 영역은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Deconstruction and the Possibility of Justice)>(Routledge, 1992)에 실린 것인데, 이 텍스트는 영어판 데리다 선집인 'Acts of Religion'(Routledge, 2001)에도 재수록돼 있다. 사정이 허락한다면, 데리다의 텍스트를 끝까지 읽고 정리하겠지만, '현지 사정'이 또한 그렇지가 않아서 일단은 텍스트의 문턱까지만 정리해두도록 한다('읽기 위하여'란 제목은 그래서 붙여졌다).

영역본의 경우 국역본 72쪽의 "만약 내가 여러분의 인내심을 바닥내지 않았다면"으로 시작되는 문단부터가 본문이고, 이 강의의 '서언'에 해당하는 부분(63-72쪽)은 미주로 돌려져 있다. 그걸 읽겠다는 얘기이다. 이 '서언'에서 데리다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나치즘과 궁극적 해결책'이란 제목의 컨퍼런스에서 자신이 왜 벤야민의 텍스트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대한 독해를 시도하는가에 대한 해명이다. 그 해명을 그는 몇 가지로 나누어 제시한다. 

(1)먼저, "나는 의도적으로 이 텍스트가 말살적 폭력이라는 주제에 (신)들려 있다고 말"한다. 즉, 그것은 '유령의 논리'에 들려 있고,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니며, 죽은 것 이상이고 살아있는 것 이상"인 이 유령의 논리 혹은 법칙은 (나치의 유태인 '청소'라는) '궁극적 해결책'에 대응하는 논리로서 적합하다. 게다가 벤야민 자신이 '유대인'이며, 그의 텍스트는 '유대적 관점' 속에 기입되어 있다.

(2)그리고 또 관심사가 되는 것은 벤야민의 특유의 언어관이다. 벤야민은 표상(=재현)으로서의 언어를 명명(=이름부름)으로서의 언어와 대립시키는데, 전자가 기술적, 효용적, 기호론적, 정보적인 차원에서 언어를 사고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명명과 호명, 이름 속에서 현전의 선사 내지는 호출"을 언어의 소명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이름에 대한 사상이 신들림 및 유령의 논리와 접합되는지 묻게 된다."(65쪽)

  

(3)벤야민의 폭력비판론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1921)는 한편으로 형식적인 의회/대의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이며 때문에 1920년대초의 반의회주의적, 반계몽주의적 흐름과 맞닿아 있다. <독재론>의 저자 칼 슈미트가 벤야민의 논문을 칭찬한 것은 우연이 아닌 셈이다(칼 슈미트에 관한 문장은 영역본에 빠져 있다).   

(4)벤야민의 이 기묘한 논문에서 대의(=표상)이라는 다면적/다의적인 문제는 그가 제시하는 정초적/보존적 폭력의 문제와도 결부된다. "소위 정초적 폭력은 때로는 보존적 폭력에 의해 '표상/대리'되고 필연적으로 반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확장하여 데리다는 "'궁극적 해결책'이라는 주제에 대해 벤야민이라면 무엇을 생각했을까?"를 질문한다. "벤야민이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데리다가 제시하는 잠정적인 의견에 따르면, "여러 징표들로 미루어볼 때, 벤야민은 '궁극적 해결책'이었던 게 될 이 표상불가능한 것 이후에는 담론 및 문학, 시가 불가능하지 않게 될 것으로" 본다. 오히려 "표상의 언어에 대립하는 이름들의 언어 및 명명의 언어나 시학의 복귀, (...) 그것들의 도래를 말하게 될 것"으로 본다.  

정리하면, 데리다는 1942년의 '궁극적 해결책'이라는 역사적 지평에서 벤야민의 1921년 텍스트를 읽고자 하는 것이다. '오래된 미래'의 텍스트로 읽겠다는 것. 그게 그의 취지이다. 그리고 이 취지가 놓여 있는 두 가지 맥락.  

(1)먼저, 데리다 자신이 '철학적 민족성 및 민족주의'라는 3년짜리 세미나를 기획하면서 '칸트, 유대인, 독일'이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이미 1년간 진행했다는 것. 칸트에게서 '독일적인 것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을 던지면서 자연스레 유대계 독일 사상가/작가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얘기이다. 그러면서 데리다가 주목하게 된 것은 몇몇 유대인 독일 사상가와 비유대인 독일 사상가들 사이의 유사점들(analogies)이다. "독일 식의 어떤 애국주의(대개는 민족주의이지만, 때로는 1차 세계대전 기간과 그 이후의 군국주의이기도 하다)"(굵은 글씨는 국역본에 누락된 부분)가 코헨이나 로렌츠바이크, 그리고 부분적으로 후설 등에 나타난다는 게 결코 전부가 아니다(아마도 이 점에 대해서는 지적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보다 주목되어야 하는 것은 벤야민과 칼 슈미트, 그리고 심지어는 하이데거의 텍스트들 간에 보이는 어떤 '친화성'이다. "이는 단지 의회 민주주의나 심지어 민주주의 일반에 대한 적개심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계몽주의에 대한, 폴레모스와 전쟁, 폭력 및 언어의 특정한 해석에 대한 적개심이라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당시에 널리 확산되어 있던 '해체'라는 주제 때문이기도 하다."(70쪽) 이 대목은 약간의 교정이 필요해 보이는데(굵은 글씨 '적개심'이 빠져야 한다), 영역본을 인용하면 이렇다:

"Not only because of the hostility to parliamentary democracy, even to democracy as such, or to the Aufklarung, not only because of a certain interpretation of the polemos, of war, violence and language, but also becasue of a thematic of 'destruction' that was very widespread at the time."(66쪽)

구문상으로는 'Not only A, not only B, but also C' 형태이며, 'A나 B뿐만 아니라 C도'란 뜻이겠다. 여기서 '적개심(hostility)'은 A에 나열된 항들에만 걸리며 '해석에 대한 적개심'으로 확장되지 않는다(내가 본 불어본의 문장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벤야민, 슈미트, 하이데거가 공유하는 것은 (1)의회 민주주의, 심지어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적개심과 (2) 투쟁(polemos)과 전쟁, 폭력, 그리고 언어에 대한 특정한 해석 (3)해체/파괴라는 주제, 세 가지인 것. 물론 하이데거식의 '해체/파괴(Destruktion)'와 벤야민의 '해체/파괴(destruction)'론은 구별되어야 하지만, 양차 대전 사이에 '해체/파괴'라는 주제가 거의 강박적인 수준이었다는 데 데리다는 주목한다.

(2)또 다른 맥락은 뉴욕 예시바 대학의 카르도조 법학대학원에서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주제로 개최된 콜로키움(사진은 이 콜로키움에서 강연하는 데리다의 모습). (서문에서 밝혀진 바이지만) 여기서 데리다는 '법의 힘: 권위의 신비한 토대'(<법의 힘>의 제1부)라는 강연문을 읽어나갔으며, '벤야민의 이름'은 비록 낭독되지 않았지만 참석자들에게 배포되었다. 데리다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그리고 궁극적으론 '벤야민의 이름'이란 데리다 텍스트의 제목을 낳은 것은 벤야민 텍스트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텍스트의 마지막 단어들, 마지막 구절은 한밤중의, 또는 우리가 더 이상 또는 아직 알아듣지 못하는 기도의 밤의 쇼퍼(=나팔)처럼 울려퍼진다." 나중에 다시 반복되겠지만, 벤야민의 그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Die gottliche Gewalt, welche Insignium und Siegel, Niemals Mittel heiliger Vollstreckung ist, mag die waltende heissen. Walter Benjamin.(징표이고 봉인이지만 결코 신의 집행 수단은 아닌 신성한 폭력은 아마도 주권적인 것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발터 벤야민)"(125쪽, 서명은 내가 집어넣은 것이다) 

이 대목에 대한 데리다의 설명을 따라가면, "텍스트의 마지막에서 마지막 문장, 종말론적인 마지막 문장은 서명과 봉인을 명명하고, 이름(Walter)과 '주권적인 것(die waltende)'이라 불리는 것을 명명한다. 발텐발터 사이의 이러한 '유희'는 어떠한 논증도, 어떠한 확실성도 산출할 수 없다. 더욱이 그것의 '논증적' 힘의 역설은 이 힘이 인지적인 것과 수행적인 것의 분리에서 생겨난다는 데 있다."(71쪽)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고틀리히 게발트(신의 폭력)... 발텐데(주권)... 발터(벤야민)'라고 하여, 시적인 음성논리에 따르자면 '신의 폭력=주권=벤야민'이라는 유사 계열체가 형성된다. 이러한 '유희'는 합리적/논리적인 근거를 갖는 것이 아니기에 "어떠한 논증도, 어떠한 확실성도 산출할 수 없다." 한데, 역설적으로 '논증적(demonstrative)' 힘을 갖는다(이것은 '논증 아닌 논증'이기에 '역설적'이다) . 이때 '논증적'이라는 것은 '말이 되게 하는 힘', 곧 (신비한) '설득력'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리고 '인지적인 것'과 '수행적인 것'이 분리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기의 논리와 기표 논리의 분리이다. 가령 아래서 (A)의 번역문은 기의의 논리를 따른 것이고, (B)를 음역해서 읽을 경우 기표의 논리를 따른 것이 된다(그러니까 '벤야민의 이름'이 갖는 효과는 낭독할 경우에만 발휘될 수 있다).  

(A) 징표이고 봉인이지만 결코 신의 집행 수단은 아닌 신성한 폭력은 아마도 주권적인 것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발터 벤야민.

(B) Die gottliche Gewalt, welche Insignium und Siegel, Niemals Mittel heiliger Vollstreckung ist, mag die waltende heissen. Walter Benjamin.

벤야민 텍스트에서 이 두 논리는 서로 따로 논다. 그래서 유희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희'는 전혀 유희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벤야민이 특히 '괴테의 <친화력>'이라는 논문에서 우연하지만 의미심장한 일치들(고유명사들이야말로 이것들의 고유한 장소이다)에 대해 아주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유희는 한편으로 의도된 것이면서 신비주의의 아우라를 거느리고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데리다의 본격적인 독해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에는 벤야민 텍스트의 이러한 면모가 포함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마침내 도착한 곳은 데리다 텍스트의 입구이자 문턱이다(그리고 이 글의 출구이다).

"만약 내가 여러분의 인내심을 바닥내지 않았다면, 이제 다른 스타일로, 다른 리듬에 따라 벤야민의 짧지만 당혹스러운 한 텍스트에 대해 약속했던 독해를 시작해보자."(72쪽)   

06. 01. 31.

P.S. 데리다에 대한 또 다른 페이퍼는 시간관계상 다음으로 미룬다. <목소리와 현상> 번역본에 대한, 역자의 취향에 대한 낭패감과 유감을 담은 글이 될 텐데, 몇 마디 앞당겨 쓴 글은 조금 전에 날아가버렸다. 때로 신의 은총과 폭력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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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시체렐라 > 내가 서 있는 곳의 이야기
말테의 수기 릴케전집 12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김용민 옮김 / 책세상 / 2000년 2월
평점 :
절판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걸까?'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따위의 생각은 내 생활을 피폐하게 만든다. 나의 생활은 아침에 일어나 소속되어 있는 곳에서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와야 할 것 만 같다. 그런 공식에서 벗어나 있는 삶은 불안하고 공포스럽다. 익숙하게 길들여져 온 것들로 부터 도망치는 것은 그리 쉽지않은 일이다.

'사람들의 얼굴은 가설 무대에서 비치는 빛을 받아 환했고, 벌어진 상처에서 고름이 흘러나오듯 웃음소리가 입에서 솟아나왔다. 내가 점점 초조해져서 앞으로 뚫고 나가려 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이 웃음을 터트렸고 더 빽빽하게 밀려들었다.'

<말테의 수기>는 말테라는 청년이 세상을 보는 이야기이다. 책의 첫 줄에서부터 말테가 평범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예감이 들고, 몇 줄 더 읽어나가다 보면 이 사람은 백수일 것이라는 느낌도 든다. 나와 별다를 것 없는 이 한가한 사람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거기다 왜 뭔가 세세하게 관찰하고 이야기하는걸까. 말테가 서 있는 곳은 도시의 거리이다. 도시는 살기위해 몸부림치는 온갖 냄새들로 붐비고 있다. 그러나 도시 속에서의 삶은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로부터 떠밀려 사는 것이다. 대량생산된 사람들, 다를 수 없는 얼굴들은 죽음마저도 번호표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 도시는 사람을 길들이고 사람은 그 익숙함에 중독되어 보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말테가 볼 수 있는 것을 볼 수 없게 된걸까?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어른이 되면서 세상과 타협하고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한 새로운 법칙을 인정하고 학습하게 된다. 그것은 사람이 만들어 낸 사고체계이며 좀더 편리하게 사회라는 구조를 움직이기 위한 것이다. 아이들은 어떤 체계에 의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물과 이야기 할 뿐이다. 그리고 거기서 들은 것을 그대로 믿고 인정한다. 대화에서 얻은 것들을 통해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 속에 새로운 세상을 펼쳐낼 줄 안다.

말테가 어린 시절 소소한 추억들을 늘어 놓을 때마다 나는 자연스레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지금의 나를 키워내었던 겁없던 눈 속의 세상. 그것은 아프던 더럽던 모두 애정이 묻어나는 것들이다. 그런 애정을 지켜 주는 것이 말테에게는 어머니 였다. 그러나 누구나 그런 애정을 어머니로 부터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내 밑 바닥에 나도 알 수 없는 애정을 심어 준 것들. 아버지나 형제, 사람이 아닌 동물,꽃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아직 사회 속에 길들여 지기 전 맹목적인 애정을 한번쯤은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그런 애정을 준 적도 있었음을. 이 애정이 비로소 우리를 살아있게 만드는 눈이 된다. 우리는 그 눈을 잊어버리고 있다.

그것은 하루하루 생활하는 것에는 불편이 없지만, 잠시 돌아오는 혼자만의 시간에는 알 수 없는 공포와 불안을 느낀다. 말테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도시는 텅 빈 사람들과 함께 죽어간다는 것을.하지만 밤의 긴 시간동안 말테의 꽁무늬를 쫒아 가다보면 잃어버린 애정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말테의 이야기는 산만하고 정신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둘러가는 것은 아마도 말테가 그의 뒤를 쫒아오는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을 눈치채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가 맡은 역할을 모르고 있음을 안다. 우리는 거울을 찾아 분장을 지워내고 잘못된 것을 없애버리고 진실해지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아직도 어딘가에 한 조각의 분장이 남아 있다. 우리의 눈썹에는 과장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우리의 입술 끝이 삐뚤어져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다. 이런 상태로 우리는 돌아다니고 있다. 조롱거리이자 반쪽 존재인 채로, 진실한 존재도 아니고 배우도 아닌 채로.'

책은 어둡고 음울한 길을 가고 있다. 하지만 순간순간 걸음을 멈추지 않는 말테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누구라도 자신만의 따뜻함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온전하게 어느것에 기울어진 삶은 없다. 단지 잃어버린 것을 포기하지않고 찾아가는 것이 소중할 다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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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김남균 > 토성의 납빛처럼 흐려진 세계
말테의 수기 릴케전집 12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김용민 옮김 / 책세상 / 2000년 2월
평점 :
절판


애드거 앨랜 포우의 소설 <라이지아>에서 나오는 인상적인 색채로 토성의 납빛이 등장한다. 무슨 빛깔인지 모른다. 포우도 알리가 없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나에게 너무도 선명하게 다가왔다. 황금처럼 빛나던 문자가 사랑하는 애인을 잃었을때 퇴색되어 나타나는 그 느낌.

말테가 이국적 도시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스케치를 할때 그렇게 흐려진 빛깔로 채색되는 것만 같다. 삶과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채 표류하는 인생들, 자신의 존재마저 불안해하는 청년 예술가의 의식의 흐름은 납빛처럼 흐려진 대도시를 뚫고 지나간다.

제임스 조이스의 기법에 조금 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을 쉽게 대할 수 있었다. 쉽게 읽었다는 것은 이해를 했다는 뜻이 아니라 감동적으로 재미있게 읽었다는 의미이다. 의식의 흐름, 곧 모더니즘 계열의 소설이 이렇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서 또 하나의 큰 기쁨을 얻었다.

윤동주의 시 <별헤는밤>에서 다정한 어감을 주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거기 나오는 강아지, 토끼 등의 동물이 이 작품에서도 계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이채롭게 느껴졌다. 엄숙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서정적인 분위기와 풍성한 감수성으로 작품을 이끌어 가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소리보다 무서운 정적, 개짖는 소리에서 전달되는 이미지, 한가로운 가게의 묘사, 시에 대한 논평, 임종의 장면에 대한 묘사, 생일날의 고통스런 수술, 찬란한 침묵이라는 시어가 주는 여운은 압권이었다. 하지만 역사적인 배경을 다루는 부분은 어려웠고, 돌아온 탕자의 재해석은 공감이 가지 않았다.

사랑받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에 약간 무리가 있는 듯 싶다. 최고의 경지로서 신에 대한 사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신도 인간을 사랑한다는 생각도 가능하지 않을까? 시적 재능을 주신 분이 시인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텐데..

삶과 의식이 흐려진 세계에 생명을 주고, 그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그와같은 사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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