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 에피소드(28)

바쁜 일들에 치이다보니, 새로 나온 책들을 몇 권 사두고도 눈길 한번 주기 어렵다(*이 글은 2004년 3월 초순에 씌어졌다). 계획상으론 이 연재도 3번을 마저 채워야 하는데(*나는 러시아로 떠나기 전에 30회를 채우고자 했었다), 이래저래 더 바쁘게 됐다. 막간을 이용하여, 몇 권의 책을 소개하기로 한다.

 

 

 



지난주간에 나온 책들 가운데, 내가 가장 읽고 싶은 책은, 그리고 아마도 당분간은 읽기 힘든 책은, 조지 존슨의 <스트레인지 뷰티>(승산)이다. 물리학자 ‘머리 겔만과 20세기 물리학 혁명’이란 부제를 단 이 책은 간단히 말해서, 겔만의 전기이다. 지난 주말 이전에 나는 이 책을 첫손에 꼽을 작정이었지만, 이미 여러 지면에 크게 소개되었기 때문에 때를 좀 놓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이 책을 언급하는 것은 이런 류의 책이 나에겐 ‘휴식’ 같기 때문이다.

같은 출판사에선 나온 <뷰티풀 마인드>(2002)와 마치 시리즈처럼 보이는 이 책은 칼텍(캘리포니아공대)의 동료이자 ‘적대자’ 리처드 파인만의 인기 덕에 좀더 빨리 소개된 감이 없지 않다. 이미 여러 권의 물리학 강의가 번역돼 있는 파인만이 ‘유쾌한 천재’의 전형이라면, ‘쿼크’(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에서 따온 말)의 '아버지' 겔만은 ‘괴팍한 천재’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사실 겔만의 이름을 처음 접한 건 복잡성 과학을 소개하는 책들에서였다. 거기서 그는 복잡성 연구의 메카인 산타페 연구소의 ‘대부’로 자주 소개되었다(‘머레이 겔만’이라고 보통 표기되었다). 이 연구소와 관련된 내용도 신간의 마지막 부분에는 실려 있다. 바로 그 겔만이 어떤 인물이었고, 무슨 일을 한 것인지에 대한 가장 좋은 입문서라 할 만하다. 물론 부제처럼 ‘20세기 물리학’의 현장을 둘러보는 재미도 겸할 수 있겠고. 내가 ‘휴식 같은 책’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문학이나 철학쪽 책들을 읽는 게 내겐 ‘일’이라면, 교양과학서나 과학자들의 전기를 읽는 건 ‘휴식’이다. 여름에 휴양지에서 읽으면 더더욱 제 맛인!...

 

 

 



두 번째 책은 다른 지면들에선 아직 소개되지 않은(아마도 이번 주말 리뷰들에선 다루어질) 비릴리오의 <속도와 정치>(그린비)이다. 그간에 <정보과학의 폭탄>(울력, 2002)이 소개된바 있지만, 이번에 나온 신간을 통해서 이 ‘신형’ 사상가 비릴리오는 비로소 그 이름을 우리에게 각인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언젠가 잡지 <문화과학>에 비릴리오를 소개하는 글이 실린 적이 있다).

알라딘의 소개글에 의하면, “비릴리오는 속도가 전쟁과 권력, 정치와 문화에 끼친 변화를 면밀히 추적했다. 여기에는 속도의 가속화에 의한 변질 과정과 권력과의 상관관계도 포함된다. 인류는 속도를 통해 그들의 존재의의를 높여왔다. 그리고 서구인들은 생체속도(달리기, 돌격)와 동물적 속도(말, 코끼리, 연락용 비둘기)를 거쳐 기계적 속도(함대, 자동차, 탱크)를 선점함으로써 동양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속도는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서구의 악몽이 됐다.” 등등의 내용이 다루어진다고(*그의 인터뷰집 등이 먼저 소개된다면 그의 책을 읽는 어려움이 좀 덜어지지 않을까?).

얼핏, 보드리야르를 연상케 하는데(키워드가 ‘시뮬라크르’에서 ‘속도’로 달라졌을 뿐?), <정보과학의 폭탄>의 역자가 보드리야르 전문 번역자인 배영달 교수인 것도 그러 심증을 갖게 한다. 다행스러운 건 이번 신간의 역자가 배영달 교수가 아니라, 수잔 손택 전문 번역자로 나서고 있는 이재원씨인 것. 자신의 출판사 ‘이후’에서 책을 내지 않은 것은 ‘판권’ 때문으로 보이지만, 기간된 번역서들을 볼 때, 비릴리오로선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대개의 저자들은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이런 ‘운’마저도 누리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세 번째 책은 서정남 교수의 <영화서사학>(생각의 나무). 저자는 '영화 제임스 본드 007 시리즈의 서사체계 연구'란 논문으로 프랑스에서 학위를 한 ‘정통’ 영화서사학자이다. 이번에 두툼하게 나온 신간은 이미 예고돼 있었기 때문에 언제쯤 나오는지 궁금했었는데, 생각보단 빨리 출간됐다. 덕분에, 이 분야에 관심있는 독자들의 수고가 많이 덜어지게 됐다.

이 책은 그동안에 나온 이 분야의 역서들, <영화와 소설의 서사구조>(민음사, 1999), <영화와 소설의 수사학>(동국대출판부, 2001), <영화서술학>(동문선, 2001), <영화와 문학의 서술학>(동문선, 2003) 등이 갖는 불편함을 한꺼번에 해소시켜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특히 <영화와 소설의 수사학>은 믿기지 않는 오역들이 수시로 출몰하기에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말’ 입문서의 강점일 텐데, 다루어지는 내용도 기대보다 충실해 보인다.

영화이론 분야에서 국내 필자의 저작으로 내가 기억하는 건, 김용수, <영화에서의 몽타주이론>(열화당, 1996) 이후 처음이 아닐까 싶다. 박성수의 <디지털 영화의 미학>(문화과학사, 2001) 정도까지 더 끼워줄 수 있을까? 한국의 영화학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네 번째 책은 보조비치의 <암흑지점>(도서출판b)이다. 살레츨(살레클)의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에 이어서 ‘슬로베이나학파 총서2’로 나온 이 책은 거의 ‘번역-기계’를 자처하는 역자의 땀과 자부심이 배어 있는 듯한 책이다. 신간은 살레클의 책보다 더 매끈하게 번역돼 있기 때문에, 역자 특유의 ‘기계적인’ 번역(모든 universe는 ‘우주’로, articulate는 무조건 ‘조음하다’로 등등)과 몇 개 번역어에 대한 ‘습관’ 혹은 ‘고집’을 감안하면서 읽는다면(predemocratic을 ‘선-민주주의적’이라고 옮기는 식), 쉽게 보조비치의 통찰과 통할 수 있다.
내가 모든 번역서를 꼼꼼하게 읽는 건 아니지만(<스트레인지 뷰티> 같이 ‘휴식 같은 책’들은 발장난 치면서 읽는다), ‘일’로 읽는 책들은 ‘시’처럼 느리게 음미하면서 읽는다. (하도 얘기를 들어서인지) 이미 읽은 걸 또 읽는 듯한 기분으로 나는 지젝이 서문과, 벤담(벤섬)의 판옵티콘론을 다루고 있으면서 표제가 된 6장 ‘암흑지점’을 읽었는데, 옥의 티처럼 눈에 띈 오역/오타 두 가지를 지적해둔다.

(1)7쪽에서 ‘(절제되지 않은) 나체의 이와 같은 외양’ ‘이와 같은 나체의 외양’은 ‘this appearance of the (unmutilated) naked body’를 옮긴 것으로 ‘나체의 이 같은 출현’의 오역이다. 이미 6쪽에서 “‘자연적인’ 그 나체가 오로지 데카르트적 근대성의 공간 내부에서 출현했다”고 지젝은 지적하며, 그것을 부연하는 내용에서 나오는 부분인데, 역자는 ‘외양’에만 너무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2)190쪽, 중간에 ‘지각가능한 실재적 신체들’은 ‘perceptible real entities’를 옮긴 것인데, ‘지각가능한 실재적 실체들’로 옮기든가 (앞에서 entity를 ‘존재자’로 옮겼으므로) ‘지각가능한 실재적 존재자들’로 옮겨야 한다. 아마도 오타인 듯싶다.

덧붙여 지적하자면, (이건 궁금한 것이기도 해서) 6쪽의 3행에서 역자가 “유사-여성주의적 주장을 때마침 생각해볼 때”라고 옮긴 대목에서 ‘때마침’은 (지젝이 즐겨쓰는) apropos of의 apropos를 옮긴 것인데, 이건 굳이 옮기지 않아도 되는 단어이다. 이후에 나오는 apropos를 역자가 굳이 옮기지 않은 것처럼. 유독 이 대목만 ‘때마침’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본 것일까?

또, 188쪽. “행동이 사고를 따르는 속도라고 해도, 여기서 실행이 명령을 따르도록 되어 있는 속도에 비해 가까스로 더 빠를까말까 하다”라는 벤섬 인용문은 “action scarcely follows thought quicker than execution might here be made to follow command.”를 옮긴 것인데, 일반적으로 scarcely나 hardly 같은 부정 부사어는 ‘거의 -않다’나 ‘결코 -않다’란 뜻이다(물론 ‘가까스로 -하다’란 뜻도 있다). 내 짐작에 이 문장이 번역과제로 주어진다면, 열에 아홉은 “사고에 뒤따르는 행동이라도 여기서 명령에 따르는 실행의 속도보다 결코 빠르지 않다.”라는 식으로 옮길 것 같다. 역자의 유머일까?

유머라고 하기엔 좀 썰렁한 대목도 있다. 160쪽에서, “벤섬이 ‘철학의 위대한 개혁가’였음을, 하지만 밀(J. S. Mill)의 견해와는 달리 ‘위대한 철학자’이기도 했음을 증명하는 것은 바로 판옵티콘과 허구이론이다.” 우리말로도 어색한데, 그건 ‘하지만’이란 접속사 때문이다. 원문은 “It is the panopticon and the theory of fictions that prove Bentham was not only 'a great reformer in philosophy' but, contrary to the opinion of J. S. Mill, also 'a great philosopher'."이다. 말 그대로 not only A but (also) B("A뿐만 아니라 B이다”) 구문인데, 거기서 but을 ‘하지만’이라고 굳이 번역하는 건 상당히 특이하다. 단순한 실수일까 싶었는데, 내가 읽은 대목 중 다른 한 곳에서도 이런 번역이 나오기 때문에, 나름대로 역자의 ‘지론’ 혹은 ‘노하우’인 것인지 궁금하다...

 

 

 

 
다섯 번째 책은 지난 연말에 나왔지만, 최근에 눈에 띈 이정호 교수의 <텍스트의 욕망>(서울대출판부, 2003)이다. 제목이 암시하는 바대로, 텍스트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읽기’를 표방하는데, 주로 영문학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여, 저자 나름의 정신분석학적 독해를 시도하고 있다. 편저를 포함해 10여권 남짓한 저자의 책들이 대부분 대학출판부에서 나온 데서 알 수 있듯이(대학출판부 ‘단골저자’이다), 신간은 교양서라기보다는 교양학술서로 분류됨 직하다. 문학을 전공하는 학부 3.4학년이나 대학원생들에게 적합하다는 뜻이다. 저자의 책들을 여러 권 갖고는 있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읽지는 못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은 읽기에의 동기를 충분히 자극한다.

 

 

 



그밖에 미술 관련서들이 최근 1-2년 사이에 강세를 보이면서 국내 필자들의 수준있는 교양(학술)서들이 계속 나오고 있으나, 나의 안목은 첫눈에 그 질을 판가름할 만한 수준에 있지 않다. 최근에 신준형의 <파노프스키와 뒤러>(시공사)를 구입했는데, 전재국(전두환의 장남)이 운영하는 시공사의 책들도 요즘은 간간이 사는 걸 보면 책에 대한 욕심은 나의 정치의식을 능가한다(한동안 나는 시공 디스커버리 시리즈도 사지 않았었다). 존 쿳시의 신간 <철의 시대>(들녘)를 비롯하여 문학 신간들도 여럿 나왔지만, 현재로선 내가 카바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쿳시의 책은 왕은철 교수의 번역으로 이후에도 여러 권이 더 출간됐다. 그의 최신간은 얼마전에 나온 <어둠의 땅>이다).

 

 

 

 

한국소설로는 김종호의 <검은 소설이 보내다>(열림원)에 대해서도 아직 할말이 없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저 인상만을 적자면, 김종호는 ‘베게트과’에 속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정영문과 경쟁하고 이인성과 경쟁한다. 그러니까 그의 이름 혹은 개성이 남기 위해서는, 정영문보다, 그리고 이인성보다 잘 써야 하며, 더 멀리가야 한다. 내 관심은 그것이다. 과연, 그는 어디쯤 가고 있는가, 라는 것(누군가 읽으신 분이 답해주시면 좋겠다). 그나저나, 다들 어디쯤 가고 계시는 걸까?..

2004.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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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 에피소드(28)

바쁜 일들에 치이다보니, 새로 나온 책들을 몇 권 사두고도 눈길 한번 주기 어렵다(*이 글은 2004년 3월 초순에 씌어졌다). 계획상으론 이 연재도 3번을 마저 채워야 하는데(*나는 러시아로 떠나기 전에 30회를 채우고자 했었다), 이래저래 더 바쁘게 됐다. 막간을 이용하여, 몇 권의 책을 소개하기로 한다.

 

 

 



지난주간에 나온 책들 가운데, 내가 가장 읽고 싶은 책은, 그리고 아마도 당분간은 읽기 힘든 책은, 조지 존슨의 <스트레인지 뷰티>(승산)이다. 물리학자 ‘머리 겔만과 20세기 물리학 혁명’이란 부제를 단 이 책은 간단히 말해서, 겔만의 전기이다. 지난 주말 이전에 나는 이 책을 첫손에 꼽을 작정이었지만, 이미 여러 지면에 크게 소개되었기 때문에 때를 좀 놓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이 책을 언급하는 것은 이런 류의 책이 나에겐 ‘휴식’ 같기 때문이다.

같은 출판사에선 나온 <뷰티풀 마인드>(2002)와 마치 시리즈처럼 보이는 이 책은 칼텍(캘리포니아공대)의 동료이자 ‘적대자’ 리처드 파인만의 인기 덕에 좀더 빨리 소개된 감이 없지 않다. 이미 여러 권의 물리학 강의가 번역돼 있는 파인만이 ‘유쾌한 천재’의 전형이라면, ‘쿼크’(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에서 따온 말)의 '아버지' 겔만은 ‘괴팍한 천재’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사실 겔만의 이름을 처음 접한 건 복잡성 과학을 소개하는 책들에서였다. 거기서 그는 복잡성 연구의 메카인 산타페 연구소의 ‘대부’로 자주 소개되었다(‘머레이 겔만’이라고 보통 표기되었다). 이 연구소와 관련된 내용도 신간의 마지막 부분에는 실려 있다. 바로 그 겔만이 어떤 인물이었고, 무슨 일을 한 것인지에 대한 가장 좋은 입문서라 할 만하다. 물론 부제처럼 ‘20세기 물리학’의 현장을 둘러보는 재미도 겸할 수 있겠고. 내가 ‘휴식 같은 책’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문학이나 철학쪽 책들을 읽는 게 내겐 ‘일’이라면, 교양과학서나 과학자들의 전기를 읽는 건 ‘휴식’이다. 여름에 휴양지에서 읽으면 더더욱 제 맛인!...

 

 

 



두 번째 책은 다른 지면들에선 아직 소개되지 않은(아마도 이번 주말 리뷰들에선 다루어질) 비릴리오의 <속도와 정치>(그린비)이다. 그간에 <정보과학의 폭탄>(울력, 2002)이 소개된바 있지만, 이번에 나온 신간을 통해서 이 ‘신형’ 사상가 비릴리오는 비로소 그 이름을 우리에게 각인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언젠가 잡지 <문화과학>에 비릴리오를 소개하는 글이 실린 적이 있다).

알라딘의 소개글에 의하면, “비릴리오는 속도가 전쟁과 권력, 정치와 문화에 끼친 변화를 면밀히 추적했다. 여기에는 속도의 가속화에 의한 변질 과정과 권력과의 상관관계도 포함된다. 인류는 속도를 통해 그들의 존재의의를 높여왔다. 그리고 서구인들은 생체속도(달리기, 돌격)와 동물적 속도(말, 코끼리, 연락용 비둘기)를 거쳐 기계적 속도(함대, 자동차, 탱크)를 선점함으로써 동양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속도는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서구의 악몽이 됐다.” 등등의 내용이 다루어진다고(*그의 인터뷰집 등이 먼저 소개된다면 그의 책을 읽는 어려움이 좀 덜어지지 않을까?).

얼핏, 보드리야르를 연상케 하는데(키워드가 ‘시뮬라크르’에서 ‘속도’로 달라졌을 뿐?), <정보과학의 폭탄>의 역자가 보드리야르 전문 번역자인 배영달 교수인 것도 그러 심증을 갖게 한다. 다행스러운 건 이번 신간의 역자가 배영달 교수가 아니라, 수잔 손택 전문 번역자로 나서고 있는 이재원씨인 것. 자신의 출판사 ‘이후’에서 책을 내지 않은 것은 ‘판권’ 때문으로 보이지만, 기간된 번역서들을 볼 때, 비릴리오로선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대개의 저자들은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이런 ‘운’마저도 누리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세 번째 책은 서정남 교수의 <영화서사학>(생각의 나무). 저자는 '영화 제임스 본드 007 시리즈의 서사체계 연구'란 논문으로 프랑스에서 학위를 한 ‘정통’ 영화서사학자이다. 이번에 두툼하게 나온 신간은 이미 예고돼 있었기 때문에 언제쯤 나오는지 궁금했었는데, 생각보단 빨리 출간됐다. 덕분에, 이 분야에 관심있는 독자들의 수고가 많이 덜어지게 됐다.

이 책은 그동안에 나온 이 분야의 역서들, <영화와 소설의 서사구조>(민음사, 1999), <영화와 소설의 수사학>(동국대출판부, 2001), <영화서술학>(동문선, 2001), <영화와 문학의 서술학>(동문선, 2003) 등이 갖는 불편함을 한꺼번에 해소시켜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특히 <영화와 소설의 수사학>은 믿기지 않는 오역들이 수시로 출몰하기에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말’ 입문서의 강점일 텐데, 다루어지는 내용도 기대보다 충실해 보인다.

영화이론 분야에서 국내 필자의 저작으로 내가 기억하는 건, 김용수, <영화에서의 몽타주이론>(열화당, 1996) 이후 처음이 아닐까 싶다. 박성수의 <디지털 영화의 미학>(문화과학사, 2001) 정도까지 더 끼워줄 수 있을까? 한국의 영화학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네 번째 책은 보조비치의 <암흑지점>(도서출판b)이다. 살레츨(살레클)의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에 이어서 ‘슬로베이나학파 총서2’로 나온 이 책은 거의 ‘번역-기계’를 자처하는 역자의 땀과 자부심이 배어 있는 듯한 책이다. 신간은 살레클의 책보다 더 매끈하게 번역돼 있기 때문에, 역자 특유의 ‘기계적인’ 번역(모든 universe는 ‘우주’로, articulate는 무조건 ‘조음하다’로 등등)과 몇 개 번역어에 대한 ‘습관’ 혹은 ‘고집’을 감안하면서 읽는다면(predemocratic을 ‘선-민주주의적’이라고 옮기는 식), 쉽게 보조비치의 통찰과 통할 수 있다.
내가 모든 번역서를 꼼꼼하게 읽는 건 아니지만(<스트레인지 뷰티> 같이 ‘휴식 같은 책’들은 발장난 치면서 읽는다), ‘일’로 읽는 책들은 ‘시’처럼 느리게 음미하면서 읽는다. (하도 얘기를 들어서인지) 이미 읽은 걸 또 읽는 듯한 기분으로 나는 지젝이 서문과, 벤담(벤섬)의 판옵티콘론을 다루고 있으면서 표제가 된 6장 ‘암흑지점’을 읽었는데, 옥의 티처럼 눈에 띈 오역/오타 두 가지를 지적해둔다.

(1)7쪽에서 ‘(절제되지 않은) 나체의 이와 같은 외양’ ‘이와 같은 나체의 외양’은 ‘this appearance of the (unmutilated) naked body’를 옮긴 것으로 ‘나체의 이 같은 출현’의 오역이다. 이미 6쪽에서 “‘자연적인’ 그 나체가 오로지 데카르트적 근대성의 공간 내부에서 출현했다”고 지젝은 지적하며, 그것을 부연하는 내용에서 나오는 부분인데, 역자는 ‘외양’에만 너무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2)190쪽, 중간에 ‘지각가능한 실재적 신체들’은 ‘perceptible real entities’를 옮긴 것인데, ‘지각가능한 실재적 실체들’로 옮기든가 (앞에서 entity를 ‘존재자’로 옮겼으므로) ‘지각가능한 실재적 존재자들’로 옮겨야 한다. 아마도 오타인 듯싶다.

덧붙여 지적하자면, (이건 궁금한 것이기도 해서) 6쪽의 3행에서 역자가 “유사-여성주의적 주장을 때마침 생각해볼 때”라고 옮긴 대목에서 ‘때마침’은 (지젝이 즐겨쓰는) apropos of의 apropos를 옮긴 것인데, 이건 굳이 옮기지 않아도 되는 단어이다. 이후에 나오는 apropos를 역자가 굳이 옮기지 않은 것처럼. 유독 이 대목만 ‘때마침’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본 것일까?

또, 188쪽. “행동이 사고를 따르는 속도라고 해도, 여기서 실행이 명령을 따르도록 되어 있는 속도에 비해 가까스로 더 빠를까말까 하다”라는 벤섬 인용문은 “action scarcely follows thought quicker than execution might here be made to follow command.”를 옮긴 것인데, 일반적으로 scarcely나 hardly 같은 부정 부사어는 ‘거의 -않다’나 ‘결코 -않다’란 뜻이다(물론 ‘가까스로 -하다’란 뜻도 있다). 내 짐작에 이 문장이 번역과제로 주어진다면, 열에 아홉은 “사고에 뒤따르는 행동이라도 여기서 명령에 따르는 실행의 속도보다 결코 빠르지 않다.”라는 식으로 옮길 것 같다. 역자의 유머일까?

유머라고 하기엔 좀 썰렁한 대목도 있다. 160쪽에서, “벤섬이 ‘철학의 위대한 개혁가’였음을, 하지만 밀(J. S. Mill)의 견해와는 달리 ‘위대한 철학자’이기도 했음을 증명하는 것은 바로 판옵티콘과 허구이론이다.” 우리말로도 어색한데, 그건 ‘하지만’이란 접속사 때문이다. 원문은 “It is the panopticon and the theory of fictions that prove Bentham was not only 'a great reformer in philosophy' but, contrary to the opinion of J. S. Mill, also 'a great philosopher'."이다. 말 그대로 not only A but (also) B("A뿐만 아니라 B이다”) 구문인데, 거기서 but을 ‘하지만’이라고 굳이 번역하는 건 상당히 특이하다. 단순한 실수일까 싶었는데, 내가 읽은 대목 중 다른 한 곳에서도 이런 번역이 나오기 때문에, 나름대로 역자의 ‘지론’ 혹은 ‘노하우’인 것인지 궁금하다...

 

 

 

 
다섯 번째 책은 지난 연말에 나왔지만, 최근에 눈에 띈 이정호 교수의 <텍스트의 욕망>(서울대출판부, 2003)이다. 제목이 암시하는 바대로, 텍스트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읽기’를 표방하는데, 주로 영문학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여, 저자 나름의 정신분석학적 독해를 시도하고 있다. 편저를 포함해 10여권 남짓한 저자의 책들이 대부분 대학출판부에서 나온 데서 알 수 있듯이(대학출판부 ‘단골저자’이다), 신간은 교양서라기보다는 교양학술서로 분류됨 직하다. 문학을 전공하는 학부 3.4학년이나 대학원생들에게 적합하다는 뜻이다. 저자의 책들을 여러 권 갖고는 있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읽지는 못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은 읽기에의 동기를 충분히 자극한다.

 

 

 



그밖에 미술 관련서들이 최근 1-2년 사이에 강세를 보이면서 국내 필자들의 수준있는 교양(학술)서들이 계속 나오고 있으나, 나의 안목은 첫눈에 그 질을 판가름할 만한 수준에 있지 않다. 최근에 신준형의 <파노프스키와 뒤러>(시공사)를 구입했는데, 전재국(전두환의 장남)이 운영하는 시공사의 책들도 요즘은 간간이 사는 걸 보면 책에 대한 욕심은 나의 정치의식을 능가한다(한동안 나는 시공 디스커버리 시리즈도 사지 않았었다). 존 쿳시의 신간 <철의 시대>(들녘)를 비롯하여 문학 신간들도 여럿 나왔지만, 현재로선 내가 카바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쿳시의 책은 왕은철 교수의 번역으로 이후에도 여러 권이 더 출간됐다. 그의 최신간은 얼마전에 나온 <어둠의 땅>이다).

 

 

 

 

한국소설로는 김종호의 <검은 소설이 보내다>(열림원)에 대해서도 아직 할말이 없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저 인상만을 적자면, 김종호는 ‘베게트과’에 속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정영문과 경쟁하고 이인성과 경쟁한다. 그러니까 그의 이름 혹은 개성이 남기 위해서는, 정영문보다, 그리고 이인성보다 잘 써야 하며, 더 멀리가야 한다. 내 관심은 그것이다. 과연, 그는 어디쯤 가고 있는가, 라는 것(누군가 읽으신 분이 답해주시면 좋겠다). 그나저나, 다들 어디쯤 가고 계시는 걸까?..

2004.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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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의 공간 - 개정판
이정우 지음 / 산해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저자는 현대를 근대적 사유와 탈근대적 사유가 공존하는 시대로 파악한다. 사회의 한쪽에선 진정한 철학적 사유를 결하고 있는 사이비 지식인들이, 다른 한쪽에서는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인 믿음을 추종하는 신도의 부류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철학함의 중용을 이야기한다. 과학없는 철학은 맹목이며, 철학없는 과학은 공허라는 말에 드러난 그의 철학적 지향은 이 책을 통해 그대로 드러난다.

이 책은 후기구조주의의 철학자 미셀 푸코에 대한 연구서이다. 우선 그는 1장에서 푸코의 철학적 작업의 기초가 되는 언표, 언표의 장을 개념적으로 정초한다. 2장에서는 푸코의 저작 <말과 사물>의 내용을 소개하며, 한 사회에서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방식으로 체계화된 언어인 담론의 변환을 분석한다. 푸코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서의 모든 담론들 - 과학의 문턱을 넘지 못한, 하지만 일정한 체계를 갖춘 언어들 - 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들을 필수적으로 요청한다. 즉, 그 담론들이 그 안에 위치함으로써 의미를 가지게 되는, 그러한 場이 객관적인 선험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는 한시대의 담론을 가능하게 해주는 무의식적인 인식체계로서의 '에피스테메'를 이야기하며, 시대의 담론을 가능하게 해주는 에피스테메의 변환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담론들이 서로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바뀌어 가는지를 흥미롭게 분석한다. 3장에서는 푸코의 고고학과 계보학을 현상학, 변증법, 해석학과 비교, 대조하여 분석한다.

주체가 세상을 인식하는 것은 오직 객관적 선험의 장을 통해서이다. 푸코는 주체철학의 오래된 사고틀인 주체과 객체의 이분법, 그리고 나름의 방식으로 둘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는 일련의 철학적 시도들이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한다. 이제 주체가 선행하고 주체의 관점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의 위치가 정해짐으로써 주체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푸코의 인식론은 반주체적이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해석학과의 비교를 통해 푸코의 작업을 더욱 입체화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극단적인 반주체주의에 경험이라는 요소를 도입하려는 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은 철학을 현대사회에는 무의미한, 단순한 개념놀음이라고 생각해왔던 사람들과, 푸코의 철학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는 독자들 모두에게 좋은 지침서가 되어줄 것이다. 특히 철학의 담론사적 변환에 관한 내용은 독자들에게 메타적인 차원에서의 철학에 대한 이해를 도와줄 것이다. 철학적 지식을 그저 나열할 뿐인 '철학과 교수'만이 있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철학자'가 부재하는 현상황에서, 저자는 이 시대의 철학함이 어때해야 하는가를 이 책을 통해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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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의 공간 - 개정판
이정우 지음 / 산해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저자는 현대를 근대적 사유와 탈근대적 사유가 공존하는 시대로 파악한다. 사회의 한쪽에선 진정한 철학적 사유를 결하고 있는 사이비 지식인들이, 다른 한쪽에서는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인 믿음을 추종하는 신도의 부류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철학함의 중용을 이야기한다. 과학없는 철학은 맹목이며, 철학없는 과학은 공허라는 말에 드러난 그의 철학적 지향은 이 책을 통해 그대로 드러난다.

이 책은 후기구조주의의 철학자 미셀 푸코에 대한 연구서이다. 우선 그는 1장에서 푸코의 철학적 작업의 기초가 되는 언표, 언표의 장을 개념적으로 정초한다. 2장에서는 푸코의 저작 <말과 사물>의 내용을 소개하며, 한 사회에서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방식으로 체계화된 언어인 담론의 변환을 분석한다. 푸코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서의 모든 담론들 - 과학의 문턱을 넘지 못한, 하지만 일정한 체계를 갖춘 언어들 - 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들을 필수적으로 요청한다. 즉, 그 담론들이 그 안에 위치함으로써 의미를 가지게 되는, 그러한 場이 객관적인 선험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는 한시대의 담론을 가능하게 해주는 무의식적인 인식체계로서의 '에피스테메'를 이야기하며, 시대의 담론을 가능하게 해주는 에피스테메의 변환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담론들이 서로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바뀌어 가는지를 흥미롭게 분석한다. 3장에서는 푸코의 고고학과 계보학을 현상학, 변증법, 해석학과 비교, 대조하여 분석한다.

주체가 세상을 인식하는 것은 오직 객관적 선험의 장을 통해서이다. 푸코는 주체철학의 오래된 사고틀인 주체과 객체의 이분법, 그리고 나름의 방식으로 둘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는 일련의 철학적 시도들이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한다. 이제 주체가 선행하고 주체의 관점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의 위치가 정해짐으로써 주체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푸코의 인식론은 반주체적이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해석학과의 비교를 통해 푸코의 작업을 더욱 입체화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극단적인 반주체주의에 경험이라는 요소를 도입하려는 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은 철학을 현대사회에는 무의미한, 단순한 개념놀음이라고 생각해왔던 사람들과, 푸코의 철학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는 독자들 모두에게 좋은 지침서가 되어줄 것이다. 특히 철학의 담론사적 변환에 관한 내용은 독자들에게 메타적인 차원에서의 철학에 대한 이해를 도와줄 것이다. 철학적 지식을 그저 나열할 뿐인 '철학과 교수'만이 있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철학자'가 부재하는 현상황에서, 저자는 이 시대의 철학함이 어때해야 하는가를 이 책을 통해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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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 에피소드(3)

매주 각 일간지 서평담당자의 책상에는 200-300권의 신간이 올라온다고 한다. 그 중에서 지면에 단평이라도 오르는 책은 10% 정도에 불과하다. 프랑코 모레티가 문학사의 비유로 든 '도살장'의 사례를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는 셈이다. 이름하여 '도서 도살장'이라고나 할까? '최근에 나온 책들'이란 걸 연재(?)하면서, 나도 덩달아 그 도살업자 대열에 끼게 된 것 같아 우쭐하기도 하고 겸연쩍기도 하다. 우쭐하다는 것은, 내가 평가/판단의 주체이기 때문이다(권력은 그렇게 영혼을 잠식한다!).

 

 

 



하여간에 책들은 쏟아져나온다. 출판평론가라면 지난주에 두어 일간지 프런트에 오른 이태원의 <현산어보를 찾아서>(청어람미디어) 같은 책에 눈길을 주어 마땅하다. 정약전의 <자산어보>(<현산어보>라고 해야 맞다고 한다)를 다시 번역하고 그것을 오늘의 관점에서 보완하고 있는 책이라는데, 몇몇 서평을 읽은 감으로는 '올해의 책'으로도 손색이 없다. 한 30대 고교 생물교사가 그 저자라는 것도 놀랍고, 7년의 준비기간을 거쳤다는 그 노력도 경탄스럽다. 물론 그런 저자를 발굴하고 책으로 만들어낸 기획력도 치하할 만하다. 5권짜리 중 3권이 먼저 출간되었고, 2권은 내년에 나온다고 하는데, 어찌됐든 장서용으로 꽂아둘 만하다(*책은 2003년 11월에 완간되었다). 하지만 이 물고기책들을 사들고 가는 건 나에겐 아직 모험에 가까운 일이다. 돈벼락을 맞기 전까지는...

 

 

 

 

두어 주쯤 됐지만, 최근에 나온 책 중에서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건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폭력의 고고학>(울력)이다. 그의 이름을 처음 본 건, <오늘의 프랑스 사상가들>(문예출판사,1998)이란 책에서인데, 거기서 소개된 프랑스 사상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생소한' 이름이었다(국내에 번역된 책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바로 그 클라스트르의 이름을 일간지에 신간소개도 나기 전에 교보의 신간코너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 반갑고 신기했다. 물론 바로 책을 사지는 않았지만(나는 가급적 인터넷 할인서점을 이용한다), 곧바로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민음사, 1997; 진중권이 <폭력과 상스러움>이라고 패러디한 책이다)과 같이 읽을 책의 목록에 올렸다. 나에게 클라스트르는 지라르의 짝패인데, 그 둘이 어떻게 다른지는 읽어본 다음에 말하도록 하겠다(<폭력의 고고학>은 현재 주문중이다).(*책은 바로 샀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클라스트르의 책으론 작년에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가 마저 출간됐다. 이건 구입했던가? 대신에 <폭력과 상스러움>을 다 읽은 기억이 있다.)

  

 

 



<폭력의 고고학>만 아니었다면 가장 먼저 언급되었을 책은 <카프카의 편지>(솔출판사)이다. 990쪽의 만만찮은 분량인데(*2004년에 후속으로나온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는 더 두껍다!), 사실 나는 이 책이 언제나 번역되나 고대하던 참이었다. 올해 나온 편지로는 서중식의 <옥중서한>(야간비행)과 쌍벽을 이룰 만하다. 그 책도 831쪽짜리이다.

 

 

 

 

카프카의 편지에 대해서 내가 관심을 갖게 된 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문학과지성사, 1999) 덕분이다(*국역본은 3종이 나와 있다). 언젠가 서평에서도 썼지만, 그 편지들에는 카프카 문학의 비밀이 고스란히 숨겨져 있다(아니 드러나 있다!). 그래서 그의 편지들을 찾았는데, 영역본으로는 두꺼운 펭귄북이 있었다. 하지만, 펭귄북을 제본한다는 게 얼마나 속쓰린 일인가 하는 건 아는 사람은 안다! 그래서, 다 읽을 수도 없고, 제본할 수도 없이 망설이다가 그냥 우리말 번역본이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는데, 이번에 드디어 책이 나온 것.

책을 자세히 뒤적거리진 못했는데, 카프카는 약혼녀인 펠리체 바우어 말고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들도 포함돼 있는지 모르겠다. 빠져 있다면 그마저 번역돼야 할 테고, 더불어 그의 방대한 일기들도 번역 소개되어야 할 것이다. 카프카 전집이 언제 완간될지는 모르겠지만(한국카프카학회원들도 모를 것이다) 완간의 그날까지 다들 좀더 노력해주었으면...(사실 아직 괴테 전집도 다 나오지 않았다.)

 

 

 



인터넷 서점을 검색하다가 뜻밖에 발견한 책이 마이클 루스의 <다윈주의자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가?>(청년정신)이다. 내가 '발견'이라고 한 건 책이 아니라 저자이다. 마이클 루스는 저명한 생물철학자로서 나도 그의 원서 몇 권을 갖고 있다(나는 생물학도 좋아하고 철학도 좋아한다). 때문에 그의 책이라면 일단 사서 읽을 만한 준비가 돼 있는 터였는데, 우연찮게 <다윈주의자...>를 발견한 것. 주문을 해놓고 아직 만지지도 못한 책이지만, 기다려지는 책이다. 참고로 생물철학 입문서로는 데이비드 헐의 <생명과학철학>(민음사, 1994)가 있고, 한스 요나스의 <생명의 원리>(아카넷, 2001)도 '철학적 생물학을 위한 접근'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루스의 책으론 2003년에 <생물학의 철학적 문제들>이 더 출간됐다. 엘리엇 소버의 <생물학의 철학>도 2004년에 나온 이 분야의 책으로 소장할 만하다.) 

 

 

 



김동춘 외 3인의 인터뷰 <인텔리겐차>(푸른역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소개돼 있어서 더 언급하지 않겠다. 나는 대담이나 인터뷰들을 좋아하는데, 특히 지식인들에게 접근하는 가장 유용한 통로는 사실 '글'이 아니라 '말'이다. 우리 출판계에서 이런 인터뷰 기획이 많아지고 있는 건 작년에 나온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민음사) 덕분이다. 그 책의 (기획의) 성공 때문에 이러한 유사 기획이 탄력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다. 어쨌든 우리는 더 많이 대화하고 더 많이 소통할 필요가 있다. 지식과 교양은 그러한 과정에서 자극을 받으며 성장한다. 이종영의 <내면성의 형식들>(새물결)이 출간됐다. 그의 전작 2권(<지배와 그 양식들>, <성적 지배와 그 양식들>)도 사두고는 있지만, 아직 읽지 않은 나로서는 뭐라 말할 수 없다. 다만, 자신의 이론적 기획을 성실하게 밀고 나가는 추진력만큼은 높이 사고 싶다.

 

 

 

 

그와 함께 두 권의 주석서도 기록해 두고 싶다. 하나는 이진경의 <노마디즘1,2>((휴머니스트). 전체 15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혹은 <천의 고원>) 주석서이다. 사실 <천 개의 고원>도 방대하지만, 이 주석서는 한술 더 뜬다. 아마 영미나 프랑스에도 이만한 주석서가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나는 <천 개의 고원>은 커녕 아직 <안티 오이디푸스>도 읽지 못했지만(후자가 전자보다 어렵다), 때문에 당분간은 <노마디즘>과 대면할 시간이 없을 터이지만, 두꺼운 책들은 하여간에 나를 즐겁게 한다(!?) 다만, 다른 고전들의 주석서들은 왜 그리 굼뜬 것인지 의아할 따름이다.

재미있는 건 <노마디즘>이 지난주 한겨레와 조선일보 서평에서 모두 1면에 올랐다는 사실. 한겨레의 것은 고명섭 기자가 썼고, 조선일보의 것은 들뢰즈 전공자인 서동욱씨가 썼다. 그런데, 과연 조선일보는 들뢰즈를 지지하는 것인지?(조선일보의 얄팍한 지식인-대중주의가 읽히는 대목인데) 문제는 '아무생각없이' 그런 지면에 서평을 쓰고 하는 행태이다. 들뢰즈라면 조선일보에 기고했을까?(이종영의 말대로 파시스트라면 그랬겠지.) 그런데, 왜 들뢰즈 연구자라는 사람(들)은 아무런 고민없이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가? 부르디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부르디외라면 조선일보에 기고했을까? 그런데, 부르디외 전공자라는 한 교수는 조선일보에 칼럼까지 연재하곤 했다. 분명 사상은 유행과 구별되어야 한다. 체 게바라 티를 입고 다닌다고 체게바라주의자 혹은 혁명가가 되는 것이 아니듯이, 들뢰즈를 들먹이고 다닌다고 들뢰즈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노마드가 되는 것도 아니다(노마디스트는 될지 모르겠다). 유능한 연구자가 생각없이 행동하는 것은 보기에 거슬린다.

 

 

 



또 한권의 주석서는 김동식 교수의 <로티-철학과 자연의 거울>(울산대출판부)이다. 소리소문없이 나온 이 책을 나는 구내서점에서 구입했는데(인터넷서점에도 없다), 현재 미국의 가장 흥미로운 철학자인 리차드 로티의 출세작 <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쉽게 소개한 책이다. 그 책은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까치글방, 1998)로 이미 번역돼 있다(우리말로 어색하게 '그리고'가 제목에 들어간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중의성을 피하려고 한 거 같은데, 생각이 얕다.).

물론 두툼한 책이고 초보자가 읽기엔 어려운 책이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까지는 교양서 범주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따라서 이번 주석서를 참고서삼아 좀더 많은 사람들이 한번 도전해 보시기를 권한다. 김동식 교수의 <로티와 신실용주의>(철학과현실사, 1994)가 분량은 좀 많지만(532쪽) 로티 철학 전반에 대한 친절한 해설서이다.(*로티 입문서로는 2003년에 나온 이유선 교수의 <리처드 로티>도 추천할 만하다.)

 

 

 



끝으로, 존 롤즈. 알마전에 <정의론>의 저자 존 롤즈 하버드대 교수가 타계했다. 철학에 조금이라고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1971년에 처음 출간된 그의 <정의론>은 미국 분석철학에 일대 방향전환를 가져왔다고 평가를 받을 만큼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물론 그 책은 일찌감치(1979년) 우리말로 번역됐지만, 고전답게 거의 읽히지 않는 책이다. 나도 원서는 갖고 있지만, 번역서 구입은 미루다가 아직도 사지 못했다. 그 사이에 4,000원하던 책값은(내가 대학 1학년때) 지금 19,000원으로까지 뛰었다. 어쨌든 조만간 <정의론>(서광사)과 <공정으로서의 정의>(서광사)를 구입할 예정이다(*<정의론>만 구입한 것 같다).

다행히도 롤즈의 다른 주저들인 <정치적 자유주의>(동명사, 1999)와 <만민법>(이끌리오, 2000)가 모두 번역돼 있고, 단행본 연구서도 하나 나와 있다. 때문에 롤즈는 기다릴 필요없이 그냥 읽기 '시작'하면 된다. 롤즈와 관련한 연구서로 스테판 뮬홀 등이 쓴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한울, 2001)이 권할 만하다. 이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논쟁의 중심에 존 롤즈가 있기 때문에 그의 이론이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저자인 뮬홀은 하이데거와 스탠리 카벨 연구서를 갖고 있는 소장 학자이다.(*롤즈에 관한 연구서들은 기억에 두세 권쯤 된다. 엄수균의 <롤즈의 민주적 자유주의>는 그 중 한 권이다.) 



하여간에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할 책의 목록은 끝이 없다. 말이 나온 김에 라캉의 <에크리> 새 영역본이 출가됐다는 소식을 전한다. 역자는 예고된 대로 브루스 핑크이고, 지난 11월에 선을 보였다(*핑크는 <에크리>의 선역본과 완역본을 잇따라 선보였다. 몇달 전에 구한 두툼한 영역본이 지금은 서가에 꽂혀 있다). 인터넷 교보를 통해서 다른 책 몇 권과 함께 주문을 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쉐리단의 번역보다 훨씬 읽기가 수월하기를 기대한다. 더불어 계속 유예되고 있는 <에크리>의 국역본도 빨리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라캉의 재탄생'은 제비 몇 마리가 떠들어댄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런 식으론 풍문만이 늘어갈 뿐이다. 라캉의 '실체'와 맞대면하는 것이 최선이다. 라캉주의자들의 분발을 촉구한다(물론 분발해야 할 사람들이 어디 라캉주의자들 뿐이랴!)...

2002. 12. 10.

 

 

 

 

P.S. 저명한 탈식민주의 이론가인 호미 바바의 <문화의 위치>도 이맘때 출간된 책이지만, 다른 분들의 소개가 있어서 생략했었다. 탈식민주의와 바바의 입문서로서는 바트 무어-길버트의 <탈식민주의! 저항에서 유희로>(한길사, 2001)가 좋은 평을 얻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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