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담유 > 윌리엄 S. 버로즈 - 네이키드 런치

 

 

 

 

윌리엄 S. 버로즈, 《네이키드 런치》, 전세재 옮김, 책세상, 2005



섀퍼는 듣고 있지 않다. 그는 충동적으로 대답한다. “잘 아시다시피, 과거에 사용하던 전통적인 수술 방식을 써야 해요. 인간의 신체는 수치스러울 정도로 비효율적이에요. 입과 항문으로 균형을 잡으려 하지 말고, 먹는 기능 싸는 기능을 모두 담당하는 하나의 구멍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코와 입을 막고, 위(胃)에 속을 채워두고, 가장 구멍이 필요한 폐와 직접 통하는 구멍을 하나 뚫으면…….”


벤웨이. “다목적용 물구멍 하나는 어떻고? 자기 항문에게 말하는 방법을 가르친 사람 이야기를 해줬던가? 그가 복부를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보면 항문으로 무슨 단어를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라니까. 들어본 적 없는 신기한 일이야.


항문으로 말하는 것은 일종의 내장 주파수를 이용하지. 거기에 신호를 내려보내면 가라는 뜻이지. 쭈그러진 대장이 옆구리를 결리게 하면 속이 차게 느껴지는데, 그게 몸의 긴장을 풀라는 신호라는 걸 아나? 이런 대화법으로 항문에 신호를 내려보낼 때, 샴페인을 딸 때처럼 매우 둔탁하고 정체된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를 냄새 맡을 수도 있다네.


그자를 카니발 때문에 고용했는데, 그는 처음에는 무슨 고상한 복화술 같은 것을 시작했네. 처음에는 정말 웃겼지. 이 사람이 ‘구관이 명관’이라고 불리는 전화번호를 돌리면, 그 전화에서 비명 소리가 났지. 다른 모든 것은 잊었어도, 그 장면은 정말 그럴듯했어. 마치 ‘늙은이, 당신 아직도 거기에 있소?’라고 외치는 것 같았지.”


“저, 이제 가서 쉬어야겠어요.”


“머지않아 항문이 자기 혼자 지껄이기 시작했지. 그래서 그 사람이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가도, 항문이 즉흥적으로 말하면서 농담을 던지게 되지.


그런 다음 항문에 이빨처럼 생긴, 약간 삐걱거리는 안으로 굽은 갈고리 같은 것이 생겨나서, 그걸로 음식을 먹게 되었지. 그는 처음에는 이것을 재미있게 여겨서 이것을 가지고 농담을 지껄였지. 하지만 항문이 그의 바지까지 먹어버린 다음에는 거리로 뛰쳐나와서 동등한 권리를 달라고 외치기 시작했지. 술까지 마시고 질질 짜면서 법석을 떠니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지. 하지만 항문은 다른 입술과 마찬가지로 키스받기를 원했지. 마침내 항문은 밤낮 가리지 않고 지껄였지. 그 사람은 항문에다 대고 온 동네가 떠나갈 듯이 조용히 하라고 외치고, 항문을 주먹으로 치고 촛불로 지지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지. 항문은 그에게 이렇게 쏘아붙이더군. ‘조용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야. 당신은 이제 필요 없소. 나는 혼자 말하고, 먹고, 그리고 쌀 수 있어.’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아침에 일어나보면 입에 올챙이 꼬리 같은 반투명한 젤리를 물고 있었지. 그 젤리는 과학자들이 이른바 미분화된 세포라고 부르는 것으로, 인간의 몸에 기생하면서 살을 파먹고 살지. 그것을 손으로 입에서 떼어내면 그 조각들이 불붙은 가솔린처럼 손에 옮겨서 그 손에서 젤 리가 다시 자라지. 그곳이 어디든 한 조각이라도 닿으면 거기서 자란다고. 그래서 결국 그의 입이 봉해지고, 머리 전체가 절단되어야 했지. (아프리카 검둥이 사이에서 스스로 새끼발가락을 절단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 알고 있겠지?) 그러나 눈만은 절단될 수 없었지. 그 항문이 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은 보는 것이었어. 눈이 필요했지. 하지만 신경 조직망이 차단되고 감염되고 마비되어 결국 두뇌는 어떤 명령도 내릴 수 없었지. 완전히 봉쇄된 두개골 속에 갇혀 있게 되었지. 두뇌는 한동안 눈 뒤에서 조용히, 무기력하게 고통을 느끼다가 결국 죽고 말지. 따라서 눈도 기능을 상실해, 작살 끝에 꽂힌 게의 눈알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검열을 통과하고 관료들 사이를 비집고 나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성(性)이야. 왜냐하면 대중음악이나 B급 영화에서 항상 미국인들의 원초적인 부패가 만들어내는 곪은 종기가 터지는 것처럼, 미분화된 세포를 마구 퍼트리고, 퇴화된 암적인 생명체에 기생하면서 끔찍한 돌연변이를 재생해내는 그런 공간이 있기 때문이지. 그것은 남자 성기의 발기 조직으로 만들어졌거나, 거의 피부도 없이 내장과 서너 개의 눈이 뭉쳐서, 입과 항문을 서로 열십자로 교차시키고, 나머지 신체 부위는 덜렁거리며 쏟아져 나오게 만들지.


세포의 가장 완벽한 상태는 암이지. 민주주의는 암적이며, 모든 관료주의가 민족주의의 암이야. 관료주의는 국가의 모든 곳에 뿌리를 내리고 마약단속청처럼 악성으로 변하기도 하고, 점점 더 크게 자라서 자신과 비슷한 것들을 만들어내고, 숙주를 통제하거나 제거할 수 없다면 아예 숨통을 죄어버리지. 관료주의는 숙주 없이는 자랄 수 없는 완벽한 기생 조직이야. (반면 공생은 숙주가 없으면 살 수 없지. 바로 이런 식으로 우리는 살아야 한다고. 그 조직의 기능을 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독립적인 단위 조직을 만드는 것. 반대로 관료 조직은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필요를 창출하지.) 관료주의는 암적인 존재로서 무한한 가능성, 분화, 그리고 독립적이면서도 자발적 행위를 지향하는 진화의 방향을, 바이러스와 같은 완벽한 기생주의로 바꿔놓았지.


(바이러스는 더욱 복잡한 생명체에서 퇴화된 형태라고 여겨진다네. 한때는 독립적인 생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금은 생명체와 비생명체 사이의 경계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숙주 안에서, 다른 생명체를 이용해서 살아 있는 형태―삶을 부정하고, 비유기적이며 비탄력적인 기계로듸 비생명체로의 퇴화.)


국가의 구조가 붕괴될 때 관료주의도 사라져. 그렇게 되면 자리를 잘못 잡은 촌충이나 숙주를 죽인 바이러스처럼 무기력하고 독자적인 생존이 불가능해지지.” (236~240)


*


“당신 여기서 뭐하는 거야? 당신 누구야?”


그리고 나는 내가 거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내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침착하게 행동하기로, 주인이 나타나기 전에 내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파악하기로 했다……따라서 “내가 누구지?”라고 외치는 대신에 침착하게 주위를 살펴본다면 대충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있을 것이었다……태초에 여기에 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종말에 여기에 있지도 않을 것이다……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것인지에 대해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은 피상적이고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내가 생아편으로 연명하는 누렇게 뜬 얼굴의 이 젊은 마약 중독자에 대해 뭘 알겠는가?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언젠가 아침에 일어나보면, 무릎 위에 당신의 간이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요.” 그리고 생아편을 가공해서 독소를 제거하는 방법을 일러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흐리멍덩하고, 그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마약 중독자는 대부분 그 과정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당신도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해줄 수 없을 것이다……흡연자는 담배 피우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은 알고자 하지 않는다……헤로인 중독자도 마찬가지다……항상 바늘을 사용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가루를 사용한다…….


내가 생각건대 그는 탕헤르 외곽 지역의 1920년대 스페인 풍 저택에 앉아서 쓰레기, 돌, 지푸라기가 묻은 생아편을 먹고 있을 것이다……그는 뭔가를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 사로잡혀 있다…….

 

작가가 작품의 소재로 쓸 만한 유일한 소재가 있다. 글을 쓰는 순간에 자신의 감각에 존재하는 것……나는 기록하는 기계일 뿐이다……나는 ‘이야기’, ‘플롯’, ‘연속성’을 억지로 삽입하려고 하지 않는다……정신 작용의 특정한 부분을 직접 기록할 수만 있다면, 나는 제한적인 기능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나는 연예인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소유욕’이라고 부른다……종종 몸에서 자신들의 실체가 뛰쳐나온다―그 형태는 노란 주황빛 젤리와 같다―고질적인 주택난 해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손을 뻗쳐 지나가는 창녀의 내장을 가르거나 이웃집 아이들을 목 졸라 죽인다. 마치 내가 항상 거기에서 있으면서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아니다! 나는 거기에 없다……소유욕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충고에 따른 움직임을 막을 위치에 있다……사실 순찰을 하는 것이 내 주된 일이다. 경비가 아무리 철통 같다 하더라도, 나는 항상 외부에서 명령을 내린다. 내부에서는 젤리로 된 구속복이 몸을 사방으로 늘리며 외부 검사 도장이 찍힌 모든 움직임, 사고, 충동에 앞서 변화를 시도한다…….


작가들은 죽음의 달콤하고도 역한 냄새에 대해 이야기한다. 반면 마약 중독자들은 죽음에 어떤 냄새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냄새는 숨을 막고, 피를 멈추게 한다……누구도 분홍 소용돌이와 육체의 검은 혈액 여과판을 통과해서 죽음을 호흡하거나 냄새 맡을 수 없다……죽음의 냄새는 분명히 냄새이기는 하지만 냄새가 완전히 부재하는 냄새다……냄새의 부재가 먼저 코를 자극한다. 왜냐하면 생명 있는 모든 존재는 냄새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냄새가 나지 않는 것은 눈에 있어서는 암흑과 같고, 귀에 있어서는 침묵과 같고, 균형과 방향 감각에 있어서는 스트레스와 무중력 상태 같은 것이다…….


당신은 그 냄새를 맡고서, 마약 약효가 다 되어 고통 받는 중독자들이 냄새 맡을 수 있도록 그 냄새를 다시 내뿜어왔다……중독자가 발광을 하면 아파트 전체가 죽음의 냄새 때문에 도저히 살 수 없는 상태로 변할 수도 있다……하지만 환기를 잘 하면 다시 그곳은 적당한 악취가 풍기는, 사람들이 숨을 쉴 수 있을 만한 곳이 될 것이다……당신은 또한 갑자기 일어나는 산불처럼 기하학적으로 움직이는 기름 버너가 탈 때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치료법은 항상 이거다. 가자! 뛰어! (347~350)


*


법전은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있지만 원래는 한 편이었고 또 그렇게 여겨져야만 한다. 하지만 각 부분들이 마치 흥미진진한 성관계처럼 앞뒤로 연결되어 있다. 이 법전은 모든 방향에서 읽힐 수 있다. 인생의 다양한 장면을 보여주는 만화경, 각종 가락과 거리의 소음들, 방귀와 폭도들이 지르는 외침, 가게의 강철 문을 세게 닫는 소리, 고통과 비애의 비명, 그리고 순진한 동성애자의 비명, 교미하는 고양이들, 해고된 고집불통의 분노의 외침, 육두구를 먹고 혼미한 상태에 빠진 브루조가 지껄이는 예언, 목뼈 꺾기, 흰 독말풀에 취한 후 지르는 비명, 오르가슴의 신음 소리, 굶주린 세포가 새벽녘에 헤로인을 갈망하는 침묵, 광적인 담배 경매처럼 소리를 질러대는 카이로 라디오 방송, 섬세한 손가락으로 초록 사기 조각을 더듬으면서, 새벽 회색 지하철의 약간 술에 취한 노동자들처럼 보이는 마약 중독자들을 뒤흔드는 라마단의 플루트 소리.


이는 정액 안테나가 달린 1920년식 광석 수신기로 주파수 변조 없이 들을 수 있었던 계시이자 예언이다……점잖은 독자들이여, 우리는 항문을 통해서 마약 덩어리 오르가슴을 느끼며 신을 만나게 된다……이 구멍들을 통해 당신의 몸을 변화시킨다……나가는 길이 바로 들어오는 길이다…….


이제 나 월리엄 시워드는 말문을 열 것이다……바이킹과 같은 나의 심장은 저 거대한 갈색 강을 항해한다. 그 강에서는 정글의 여명 속에 모터보트가 다니고, 모든 나무들의 나뭇가지에는 커다란 뱀들이 똬리를 틀고 있고, 슬픈 눈을 한 여우 원숭이가 강변을 내려다보고, 미주리 들판을 가로질러(소년은 분홍 화살촉을 발견한다) 멀리서 기차의 기적 소리가 들리고, 나는 하느님이 선사한 항문을 사용할 줄 모르는 거리 소년이 느끼는 굶주림을 느낀다……점잖은 독자들이여, 그 법전이 강철 발톱을 지닌 표범 사나이와 함께 당신에게 덤빌 것이고, 마치 기회주의적인 땅개처럼 손가락과 발톱을 절단낼 것이고, 당신을 교수형에 처할 것이고, 암호를 해독할 줄 아는 개처럼 당신의 정액을 핥을 것이고, 독사처럼 당신의 허벅지를 조일 것이고, 부패한 원형질 주사를 당신에게 주사할 것이고……그렇다면 왜 암호를 해독할 줄 아는 개란 말인가?


일전에 나는 입에서 항문까지 거치는 데 꼬박 일 년이 걸리는 듯한 긴 점심을 먹고 돌아오고 있었다. 그때 나는 한 아랍 소년이 뒷발로 걸을 줄 아는 점박이 개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커다란 점박이가 친근감을 보이며 소년에게 다가갔지만, 소년은 개를 밀쳤다. 그러자 점박이는 으르렁거리더니, 조그만 아이를 물었다. 마치 “이것은 바로 자연에 대한 죄악”이라고 인간처럼 말하는 법을 모른다는 듯이 짖으면서.


그래서 나는 그 점박이를 암호를 해독할 줄 아는 개라고 부른다……그리고 한마디 하겠는데, 나는 항상 진솔한 검둥이로 통해왔다. 그리고 해독할 수 없는 동방(東方)은 그것을 삼키기 위해서 항상 한 움큼의 소금을 필요로 한다……당신네 기자들은 하루에 모르핀 서른 알을 섭취하고 여덟 시간을 대변처럼 이상하게 앉아 있어야 한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몸을 비비꼬고 있는 미국인 관광객이 묻는다…….


나는 대답한다. “모르핀은 리비도와 감정이 있는 시상하부를 억압하고, 전뇌는 후뇌의 자극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또한 대상(代償)형의 시민들은 항상 후부에서 흥분을 느끼기 때문에, 대뇌에서는 어떤 작용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나는 보고해야 합니다. 나는 당신의 존재를 의식하고는 있지만, 마약을 대주는 사람이 내 감정을 끊어버려―내가 더 이상 돈을 낼 수 없기 때문에―그 존재가 나의 감정에 어던 영향도 주지 않으므로 나는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관심이 없습니다……가든지, 오든지, 강철판이나 레즈비언에게 어울리는 그런 것을 가지고 똥을 싸든지 뭘 하든지 마음대로 하세요―죽은 자들과 마약 중독자들은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해독할 수 없어요. (359~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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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59)

이 해가 가기 전에 두 차례 더 최근에 나온 책들을 소개하고자 한다(연말에 책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지지만 않는다면). 그러니까 내겐 패 두 장이 남아 있는 셈이다. 조금 아껴둘까 했지만, 그 중 하나를 펴보이는 것은 순전히 패트리샤 하이스미스(1921-1995) 때문이다. 그녀의 선집이 첫번째 책들이며, 올해는 그녀의 사망 10주기가 되는 해이기에 선집의 출간은 좀더 의미 깊어 보인다.

 

 

 

 

이번에 선집으로 나온 건 <동물 애호가를 위한 잔혹한 책>(민음사)을 포함해서 3권이다. 그 중 표제작은 올초인가 <세계의 문학>에 소개되었기에 출간이 임박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3권이 한꺼번에 나올 줄을 몰랐다. 2003년에 <낯선 승객>(해문출판사)과 <태양은 가득히>(동서문화사)가 번역된 바 있기에, 제법 하이스미스 컬렉션의 꼴이 갖추어진 셈이 된다. 다른 건 몰라도 알랭 들롱이 주연했던 르네 클레망의 영화 <태양은 가득히>를 기억하는 독자들은 많은 것이다(아찔한 영화 중 하나이다). 그리고 사실, 내가 접해본 하이스미스도 영화 <태양은 가득히>가 전부이다(그녀가 원작자라는 걸 알게 된 건 훨씬 나중이고). 당신도 사정이 비슷하다면, 초급 하이스미스를 뗀 것이 된다.

 

 

 

 

중급 하이스미스는 <낯선 승객>이 히치콕의 영화 <스트레인저>의 원작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소개에 따르면 그녀의 첫 장편인 <낯선 승객>은 "1950년 출간되자마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었다." 그게 얼마전 출간된 스포토의 <히치콕>(동인, 2005)에서는 <열차의 이방인>으로도 번역된 <스트레인저>(1951)이다. 그리고 물론 이 영화에 대해서는 지젝 등의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을 참조할 수 있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지젝이 자주 언급하며 높이 평가하는 현대 작가의 한 사람이다(덕분에 나로서도 친숙해질 수 있었던 이름이다). 이후 하이스미스가 1955년 발표한 <재주꾼 리플리>는 그녀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린 작품으로 르네 클레망 감독의 <태양은 가득히>,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리플리>로 두 번 영화화되었다. 이런 정도까지 카바하면 하이스미스 중급이 되겠다.

그리고 이제 고급 단계로 진입할 기회가 주어졌으니 그건 이번에 나온 선집들을 읽는 일이다. 다시 소개를 옮기면 그녀는 "1961년 이후에는 주로 프랑스와 스위스에 거주하면서 단편 작가로 활동했는데, 영어로 쓴 작품이 독일어로 먼저 번역.소개될 만큼 유럽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하이스미스는 '20세기의 에드거 앨런 포'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두 사람은 112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 정확히 같은 날, 같은 미국 땅에서 태어나 고국보다 유럽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공통점 또한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를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20세기의 에드거 앨런 포'로 기억하는 것이다. 위의 이미지들은 차례대로, 최근간 포우 작품집, 포, 젊은 날의 하이스미스, 노년의 하이스미스이다. 젊은 날의 하이스미스는 패트리샤 카스 못지 않은 미모를 자랑하지만, 노년의 모습은 실례가 아니라면, <미저리>의 케시 베이츠를 떠올리게 한다(나이란 그런 것이다). 고급 하이스미시언이라면, 빔 벤더스의 영화 <미국인 친구>(1977)이 리플리 시리즈 중 한 편인 <리플리의 게임>(리플리스 게임)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두어야겠다. 얼마전 개봉되었던 존 말코비치 주연의 영화 <리플리스 게임>(2003)도 같은 원작의 영화(두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해서 비교는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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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에 실련던 소개 기사를 잠시 발췌해 보면, "이탈리아 여성 감독인 릴리아나 카바니가 2004년 연출한 <리플리스 게임>은 리플리 시리즈의 후기작으로 선과 악의 통념에 대한 반기라는 점에서 감독이 영화 속에서 지속적으로 펼쳐왔던 관심사와 원작의 주제가 맞아 떨어진다. 여기에 삼위일체를 이루는 것이 귀족처럼 우아한 말투로 섬뜩한 범죄자 역할을 능란하게 해내는 좀 말코비치의 탁월한 연기다. 알랭 들롱, 브루노 간츠 맷 데이먼 등 역대 리플리들이 하나같이 독특한 매력을 보여줬지만 <리플리스 게임>의 존 말코비치처럼 배우의 카리스마에 많이 기댄 리플리도 없을 것 같다."(비디오는 언제 나오나?) 

한편, 클로드 샤브롤의 <올빼미의 울음>(1987) 등도 하이스미스 원작이라고 한다(아직 국내에는 공개되지 않았다). 하이스미스의 소설들은 미국보다 유럽에서 더 인정받으며 유럽 감독들에게 인기가 더 많다는 걸 확인할 수 있겠다. 이 겨울의 추위가 덜 매서워 보인다면,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쿨한' 세계에 한번 빠져보시길...

두번째 책은 역시나 미국 작가 윌리엄 버로스(버로우즈; 1914-1997)의 <네이키드 런치>(책세상).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에 의해서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졌던 작품(1991)의 원작. 영화의 소개는 "인간과 다른 생명체와의 몽환적 결합을 그린 환타지물"로 돼 있다. 마약과 환각 등을 소재한 걸로 아는데, 그러한 경향은 작가가 속했던 1950년대 비트 제너레이션 문학(비트 문학)의 일반적인 성격을 이룬다(비트 세대의 대표적인 시인은 앨런 긴즈버그이다). <네이키드 런치>는 그 대표작이고 타임지 선정 100대 영문 소설에 뽑혔던 작품. 요컨대, <네이키드>는 (수치스럽게도!) 이젠 정장한 '클래식'의 반열에 들어간 작품이다.

 

 

 

 

세번째 책은 최근 몇 년간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급부상한 박찬욱 감독의 문집 두 권이다. 보다 관심을 끄는 건 <박찬욱의 몽타주>(마음산책). 같이 나온 <박찬욱의 오마주>는 소개대로 이전에 나왔던 <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 - 비디오드롬>(삼호미디어, 1994)의 개정증보판이다. 나는 그 책을 10년쯤 전에 사서 읽은 듯하다. <달은 해가 꾸는 꿈>이나 <3인조> 같은, (보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를 아주 '쿨'하게 만들었던 영화들을 찍은 '너무 아는 게 많은' 영화감독이 아니라 예리한 감식안의 영화마니아의 모습을 그 책에서는 읽을 수 있었다(정성일의 평문들보다 기억에 남지는 않았지만). 개정증보판이라고 하니까 이후에 더 쓴 내용들이 얼마나 포함된 건지 모르겠다.

<내 인생의 영화>(씨네21, 2005)에 실린 꼭지글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박찬욱은 필력으로도 영화인들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위인이다(<씨네21>에 칼럼을 연재했던 김지운 감독도 책을 낼 만한 위인이고). 그걸 나에게 각인시켜준 게 언젠가 한 신문에(경향신문이었던 것 같은데) 실렸던 그의 칼럼이었다. 이후에 나는 그의 칼럼/산문들이 한 권의 책으로 묶이길 기대했는데, 그 기대가 생각보다는 빨리 충족되었다. 이 또한 <올드보이>의 힘이 아닌가 싶다. 나는 작년 11월말에 모스크바통신에서 <올드보이>의 러시아 개봉에 맞춰 이루어진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를 옮겨놓은 바 있는데, 혹 생소하신 분들이 있을까 해서 여기에 발췌해놓는다(<아피샤>는 러시아의 공연전문 잡지이다). 나의 군더기말들은 빼고.  

 

 

  

 

아피샤: 서구에서는 요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천재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박찬욱: 나로선 자신에 대해 쉽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비록 내가 칸느에서 돌아왔을 때 나에 대한 주변의 태도가 달라지긴 했지만 말이다. 팬사인회에 초청됐고, 대통령은 나에게 공로 메달(훈장)을 수여했다. 솔직히 말해서, 전작(<복수는 나의 것>)을 찍었을 때는 나를 죽이려고들 했으니까, 사정이 좋아진 것만은 분명하다.

아피샤: 누가 죽이려고 했는가?

박찬욱: 관객들이다. 물론 말로, 비유적으로 그랬을 뿐이지만, 어쨌든 유쾌하진 않았다. 

아피샤: 원작만화인 <올드보이>는 원래는 다른 감독이 찍으려고 한 걸 당신이 그 프로젝트를 가로챘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박찬욱: 처음 듣는 얘기다. 나는 만화에 별로 관심이 없다. <올드보이>는 제작자가 나에게 읽어보라고 권해준 것이다. 내가 이 영화를 찍도록 한 건 순전히 그의 아이디어이다.


아피샤: <올드보이>가 우연히 칸느의 경쟁부문에 올랐다는 게 사실인가?

박찬욱: 그렇다. 영화사에서는 일반적인 제작 절차에 따라 영화를 (칸느에) 보냈을 뿐이다. 경쟁부분에 오른 건 정말로 예기치 않은 일이었고 기쁜 일이었다. 알다시피, 나의 전작들은 (경쟁부문은커녕) 칸느의 비경쟁부문에도 오른 적이 없다.

아피샤: <올드보이>의 두 주인공은 거의 동갑내기이다. 하지만 복수자를 연기한 유지태는 희생자를 연기한 최민식보다 두 배 정도 어리다. 왜 그런가?

박찬욱: 그건 아주 특별하다. 눈에 띌 정도이기 때문에 너무 거친 설정인지도 모른다. 복수자의 경우 40은 확실히 넘었을 텐데, 실제로는 훨씬 젊어 보인다. 나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일생을 한 가지 목적에만 걸 경우 그렇게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본질적으로 삶을 사는 게 아니므로 늙지 않는다. 복수자는 극단적으로 말해서 인간이 아니며, 그 자신이 자신을 그렇게 간주한다. 우리는 한 장면을 찍었었는데(최종 버전에서는 빠졌다), 거기서 복수자는 오대수와의 마지막 대화장면을 반복해서 연습한다. 제스처와 억양을 수정하고, 대화에서의 이런저런 화제 전환시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미리 준비한다. 이 장면을 이후에 잘라냈는데, 관객들이 마지막의 결정적인 대화장면에 대해서 미리 예측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유감스럽기까지 한데, 왜냐하면 그 장면이 많은 걸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보통의 사람은 특히 극한적인 상황에서 유창하게 말하지 못한다. 우물우물거리거나 더듬거리고 같은 말을 10번은 반복하게 될 것이다. 상대방이 모르는 걸 알고 있을 때에라도 마치 시간을 지배하듯이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 미리 준비해야 한다. 한 스웨덴 작가가(이름은 잊어먹었는데) 학교에 관한 단편을 쓴 게 있는데, 거기서 교사들은 학생들의 생활을 초 단위까지 정확하게 통제한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신이 된다. 복수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마치 감독처럼 자신의 희생자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사전에 알고 있다. 그래서 오대수가 복수자의 계획을 거스르고자 할 때 그는 신에게 반항하는 인간에 견줄 수 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아피샤: <올드보이>는 원칙적으로 행복하게 마무리될 수 없는 영화이다. 그런데도 왜 해피엔드로 끝냈는가?


박찬욱: 그게 해피엔드라고 할 수 있는가.


아피샤: 하지만 주인공이 행복한 표정으로 웃지 않는가?

 

 

 

 

  

 

 

  

박찬욱: 그는 웃는다고 볼 수 없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마지막 장면에서 라프샤(*이 단어는 대문자로 돼 있는데 뭔지 모르겠다. 등장인물인가? 영화를 몇 번 봤었는데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가 웃는 모습이 기억나는가? 그건 망각의 기쁨이다. 그에겐 아무런 좋은 일이 없다. 나는 관객에게 위안을 준다거나 영화의 끝에 가서 낙천주의를 주입시키고자 하지 않았다. 거기에 대해서 물어본 거라면.


아피샤: 당신이 영화를 찍을 때 모든 일을 아내와 상의한다는 게 사실인가?


박찬욱: 그렇다. 모든 단계에서 나는 아내의 의견을 반드시 묻는다. 아내는 매우 분별력이 있고 사려 깊은 사람이고, 영화와는 아무런 관련도 갖고 있지 않다. 주부로서 그녀가 아는 건 생활이다. 때문에 그녀의 충고는 나에게 아주 소중하다. 감독의 일이란 건 신의 일과 닮은 데가 있어서, 일에 몰입하다 보면 정말로 자신을 신이라고 자만할 위험이 있다. 감독들은 종종 유머감각을 잃고 아주 바보스런 처지에 놓이기도 한다. 아내는 내가 이런 걸 피하도록 도와준다.

아피샤: 아이들이 몇 살 정도가 되면 <올드보이>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박찬욱: 당신의 아이는 몇 살인가? 나의 딸아이는 지금 10살이다. 아이가 15살이 되면, 반드시 보여주겠다.

 

아피샤: 서구의 비평가들은 당신의 영화에서의 물리적 폭력이 강한 인간적 감정의 비유(=은유)라고들 쓴다.


박찬욱: 그건 헛소리다. 영화가 마음에 들면, 비평가들은 문화론적인 설명을 시도하려고 애쓴다. 만약에 그게 잔혹한 영화라면 그들은 아무리 환영적이고 부서지기 쉬운 것일지라도 자기 사회의 도덕적 표준과 일치하는 어떤 걸 가져와서 그걸 희석시키려고 애쓴다. 사회는 폭력을 단죄한다. 때문에 그들은 폭력이 비유라고 쓰는 것이다.


아피샤: 당신이 비평가였을 때에는 같은 일을 하지 않았는가?


박찬욱: 아니다. 나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나는 정직한 비평가가 되려고 노력했다.

 

아피샤: 당신은 <올드보이>의 미국판 리메이크를 찍을 저스틴 린을 만나 보았는지?


박찬욱: 나는 리메이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들은 단지 이야기와 제목에 대한 판권을 샀을 뿐이다. 나는 저스틴 린의 영화를 한편도 본 적이 없고 그를 알지도 못한다. 이름은 들어봤지만.

 

아피샤: 미국판의 주연도 최민식이 맡는다는 소문이 있다.


박찬욱: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벤 에플렉이나 누군가 미국에서 인기 있는 배우를 고를 것이다.

아피샤: 당신은 정말로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라면 납치가 그렇게 나쁜 행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박찬욱: 나에 관한 무슨 인터뷰를 읽어봤는가? 아마도 내 말을 잘못 번역한 것 같다. 종종 내 말이 잘못 옮겨지는 것 같다는 의심이 든다. 내가 분명히 말하고 싶었던 건 이런 거다. 만약에 누군가가 당신을 납치한다면 그게 아주 무용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것. 자기인식과 개인의 어떤 예기치 않은 능력의 발견이라는 관점에서 말이다.

 

아피샤: 전작인 <복수는 나의 것>에서 당신은 자본주의 일반과 그 한국적 모델에 대해 혹독하게 비판했었다. 당신은 사회주의자인가?


박찬욱: 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그 특정한 결함들을 들춰낼 뿐이다.


아피샤: 그 말은 당신이 예술의 정치적 기능에 대해서 믿는다는 것인가?


박찬욱: 물론이다. 예술은 세상을 더 좋게 만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오늘날의 한국에 대해서 성급하게 폭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비교의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도 알겠지만, 1992년까지 우리에겐 독재정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 최초로 선출된 민간 대통령에 의해서 우리 나라는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솔직히, 그때서야 나를 포함한 새로운 세대의 한국 감독들은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갖게 됐다.

 

아피샤: 타란티노는 한해 내내 <올드보이>의 광고만 하고 다녔다. 어딜 가든, 어디에서건 이 영화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영화라고 열변을 토했다. 물론 당신이 그의 찬사에 대해서 응답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질문을 한다면, 당신은 <킬빌>을 보았는지? 두 사람의 영화가 아이디어상으로 서로 가깝다고 느끼지는 않는지?


박찬욱: 나는 1부만 보았다. 매우 아름다운 영화이다. 하지만, <올드보이>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아피샤: 어떻게 아직까지 <킬빌2>를 볼 수 없었는지?


박찬욱: 나는 대체로 영화들을 많이 보지 못한다. 일이 너무 많다.

 

아피샤: 그럴 만하다.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 생각엔 어째서 당신을 포함해 타란티노와 라스 폰 트리에 등 몇몇 거장들이 거의 동시에 복수에 관한 이런저런 영화들을 찍었다고 보는가?

박찬욱: 복수란 건 촉매이다. 그 속에서 인간이 멋지게 드러난다. 거기에는 언제나 한 인간을 파괴한 어떤 객관적인 원인, 사건이 선행한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은 가장 솔직하고 가장 강렬한 감정을 드러낸다. 문명사회는 악에 대한 응징의 수단으로서 개인의 복수를 부정한다. 하지만, 복수에의 열망이 그 때문에 없어지는 건 아니다.


아피샤: 복수에 관한 당신의 3부작 중 마지막 편은 언제 나오는가?

 

박찬욱: 지금 막 찍기 시작했다. 생각에는 2월말이나 3월초까지는 끝내려고 한다. 이번 영화는 한 여자의 복수에 관한 것으로,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의 모티브와 플롯을 합금한 것이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한 여자가 15년간 감옥살이를 한다. 그리고 풀려나서는 그녀가 겪은 일에 책임이 있다고 간주한 남자들에게 복수를 한다.

 


 

 

 

 

  

   

아피샤: 3부작을 끝낸 뒤의 작업에 대해서는 이미 정해두었는가?

 

박찬욱: 뱀파이어에 관한 영화이다. 제목은 <살아있는 악>이 될 것이다.

 

아피샤: 자신의 영화의 주제(혹은 플롯)에 대해서 아주 빨리 고안해낸다는 것이 사실인가?


박찬욱: 그건 비교의 문제이다. 가령 김기덕은 (나보다) 훨씬 더 빨리 작업한다. 그와 비교한다면, 나는 스탠리 큐브릭이다.

 

아피샤: 당신은 큐브릭을 좋아하는가? 당신이 좋아하는 감독들은 누구인가?


 

 

 

 

 

 

   

박찬욱: 한국 감독 중에 김기영이라고 있었다. 백과사전에는 그가 한국 쓰레기 영화의 왕이라고 씌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아주 대담하고 훌륭한 영화들을 찍었다. 그는 용기있고 타협하지 않는 예술가였다. 영화를 찍을 기회를 잃게 되었을 때, 그가 살던 집에는 화재가 일어나고 그는 불길에 타 죽었다. 비극적인 운명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그를 닮고 싶지는 않다.

 


 

 

 

 

 

 

 

아피샤: 그럼 당신이 닮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가?

 

박찬욱: 가능하다면, 마르 베르이만을 닮고 싶다...

 

 

네번째 책은 박찬욱 감독도 좋아하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세계를 해설하고 있는 홍대화의 <도스또예프스끼>(살림)이다. 박찬욱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유머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 유머는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면서 그의 문학적 교양을 인정해줄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복수는 나의 것>에 나오는 아나키스트들의 집단 살인 장면은 <악령>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라고 감독은 고백한 바 있다(말이 나온 김에 장석원의 첫시집 <아나키스트>도 신간이다). 참고로, 발레리 카프리스키가 주연한 안제이 줄랍스키의 영화 <퍼블릭 우먼>(1984) 또한 원작은 따로 있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주된 모티브로 하고 있는 영화이다. 줄랍스키는 그 이듬해에 소피 마르소를 주연으로 하여 <격정>(<성난 사랑>으로도 출시돼 있다)을 찍었는데, 역시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고전으로 치자면, 세르반테스의 <돈끼호떼>(창비사)가 민용태 교수의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됐고, 작년에 서거 100주년을 맞았던 안톤 체홉의 <4대 장막전>이 실제로 작품을 국내 무대에 올렸던 연출가 전훈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됐다(이 번역의 의의는 레제드라마가 아닌 공연텍스트로서 '체홉'을 읽어볼 수 있다는 점이겠다). 그리고 20세기 영국문학의 대표 작가 중 한 사람인 E. M. 포스터 선집으로 나온 두 권 <전망 좋은 방>(열린책들)과 <모리스>. 제임스 아이보리의 영화들과 함께 컬렉션을 만들면 되겠다.

 

 

 

 

 

 

 

  

 

 

그리고 마지막 책은 오랜만에 출간된 모리스 블랑쇼(1907-2003)의 책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마주한 공동체>(문학과지성사).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조르부 바타유에 대한 해석을 거쳐 동일성 지배 바깥의 공동체, 즉 조직, 기관, 이데올로기 바깥의 '공동체 없는 공동체'에 대한 사유를 명확히 제시한 장-뤽 낭시의 논문 '무위(無爲)의 공동체'에 대한 응답으로 씌어진 모리스 블랑쇼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와 그에 대한 낭시의 재응답인 '마주한 공동체'를 함께 싣고 있다. 중심의 부재 또는 빈 중심으로 현시되는 역설적이고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내재주의와 전체주의를 넘어서 있으며 전체의 고정된 계획을 갖고 있지 않는 공동체에 대한 가능성을 프랑스 철학계의 두 거목이 함께 모색하는 이 책은 20세기 이후 '공동체'와 '우리'의 관계에 대한 가장 급진적이며 멀리 나아간 논의를 담고 있다."

 

최근에 국내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고 있지만, 정치제도와 공동체라는 화두는 내년에 새삼/새롭게 숙고되어야 할 중요한 테마이다. 블랑쇼/낭시의 책은 우리의 사고를 점화시켜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프랑스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비평가 중의 한 사람이 블랑쇼에 대해서는 김현의 <프랑스 비평사>(현대편)가 유용한 길잡이이다. 그리고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레비나스가 쓴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동문선, 2003)이 소개돼 있다(사진은 두 사람, 블랑쇼와 레비나스이다). 그의 비평서로는 <문학의 공간>(책세상, 1990/1998)과 <미래의 책>(세계사, 1993)이 번역/소개돼 있다. 소설로는 <죽음의 선고>, <알 수 없는 사람 또마> 등이 금성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에 수록돼 있었다. 한편, 2003년 블랑쇼의 죽음 이후에 한 대학원신문에서는 블랑쇼 특집을 꾸미기도 했었는데, 그때 이번에 출간된 책의 역자가 쓴 글을 잠시 옮겨본다.

 

-자크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장례식에서도 그랬듯이 이번 블랑쇼의 장례식(그의 사망 나흘 후인 2003년 2월 24일)에서도 장문의 추도문을 낭독하였다. “어떻게 바로 여기서, 이 순간에, 이 이름, 모리스 블랑쇼를 말하면서 떨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로 시작하는 추도문은 블랑쇼를 읽었던 많은 독자들이 그의 죽음 앞에서 느꼈을 감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블랑쇼는 단순히 한― 아마도 위대하다고 불러야 할 ― 철학자도, 작가도, 문학비평가도 아니었다. 더욱이 그는 어떤 문예, 사상의 사조와 흐름을 주도하는 이론가도 아니었다. 그는 하나의 목소리였다. 벌거벗은, 초라한, 무력한, 사라져 가는 그러나 그래서 찬란한 우리 자신의 모습에로 우리를 부르는 목소리…. 그 목소리는 언제나 어떤 과거보다 더 먼 과거로부터 들려왔지만 또한 어린아이의 속삭임이기도 했고, 또한 절규이기도 했다. 같은 헐벗은 어린아이들, 즉 삶과 사회체제의 잔인함에 고통 받는 타자들의 숨결을 듣도록 우리를 부르는 소리 없는 절규….

-블랑쇼는 살아 있을 때, 은둔 때문에 오히려 ‘알려진’ 작가였다. 각종 매체(신문, 방송, 인터넷)에서 쏟아져 나오는 정보의 홍수를 문학이 비켜 나갈 수 없게 된 시대에, 각종 매체에 의존해 얻을 수 있는 선전효과를 무시할 수 없는 시대에, 블랑쇼의 은둔은 오히려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의 은둔은 그의 사상을, 그의 글쓰기, 그의 작품을 신비화시켰으리라. 그러나 나는 그 신비화 가운데 그의 작품이 오해될 것이라고, 그리고― 다음의 말을 어떠한 감정의 과장도 없이 쓴다 ― 그 신비화에 블랑쇼가 저항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블랑쇼는 작품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자 하지, 1인칭 ‘나’를 보여주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거리 아무데나 흩어져 있는 이름 없는 자들, 하지만 ‘헐벗은 어린아이들’로서의 ‘그’들로 하여금 말하게 했을 뿐이었다. '그’들, ‘나’라고 말할 수 없는 자들, 어떠한 1인칭의 권력도 소유하지 못한 자들, 다만 헐벗음으로만 그 권력을 거부하고, 그 권력에 저항할 수 있었던 자들. 필요하다면 결국 자신의 사라짐·지워짐을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침묵의 제 3자들, 3인칭의 인간들, 다시 말해 ‘우리’와 다르지 않은 타자들. 

-블랑쇼가 거부하고자 했던 1인칭의 권력(그 권력을 그가 의도 가운데 원했을지 모른다고 말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은둔을 통해, 나타나지 않음으로 그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을 그에게 돌려주어서는 안 된다. 신비화된 1인칭 블랑쇼로부터 그의 작품을 읽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다만, 단순히, 그의 작품에서 3인칭의 인간들, 타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데에, 작품으로부터 그를 이해하는 데에, 작품으로부터 한 개인 블랑쇼의 은둔·지워짐이란 3인칭이 말하기를 원했던 그에게는 바로 글쓰기의 실천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있다. 그는 살아있을 때, 단어들, 문장들 사이로 사라지기를 원했고, 이제, 그의 죽음 이후로, 그 사라짐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어야 할 과제는 그의 독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블랑쇼는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중 아무나, “‘그 누군가’가 죽는다”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그 말은, 정확히 하이데거에 반대해, 죽음으로의 접근의 경험이 ’나‘의 본래성을 회복하게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 오히려 ’나‘를 이름 없는 자의 비본래성으로 되돌아가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죽음으로의 접근, 즉 ‘나’아닌 타자가 되기, 비인칭적 실존에 기입되기, ‘내’가 통제할 수 없는―의미로, ‘나’의 존재의 ‘의미’로 포착할 수 없는― 익명의 실존으로 되돌아가기. 그렇게 귀결되는 블랑쇼의 죽음에 대한 사유와 그 자신의 죽음 사이에 어떤 연결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블랑쇼가 마지막으로 써서 출간한 작품에 붙인 제목은 <나의 죽음의 순간>(1994)이었다. 거기서 그는 나치의 총구와 마주한 그(또는 나)의 죽음의 순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그를 대신해 이 가벼움의 감정을 분석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 갑작스럽게 다가온, 물리칠 수 없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죽는―죽을 수 없는. 아마도 황홀경. 차라리 고통 받는 인간성에 대한 연민의 감정, 죽을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라는 것에서 오는 행복감. 그때부터 그는, 은밀한 우정으로, 죽음과 맺어졌다.” ‘나’의 죽음, 심각한 것이 아님, 정확히 말해 심각할 수 없음―수동성으로서의 죽음의 체험―, ‘가벼움’ 또는 아니면 ‘행복감’. 우리들 중 누구도 블랑쇼의 죽음의 순간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의 옆집에 살던 한 대학생이, 그가 죽은 지 얼마 후, 언론·방송에 그의 죽음을 알렸고, 그에 따라 그의 사망소식이 전해졌을 뿐이다. 

-위대한 한 작가의 죽음인가? 그의 죽음은 의미심장한 것인가? 아마, 다만, 단순히, 우리들 중 아무가 죽어갔을 뿐이다. 그러나, 분명, 우리 안에 있는 ‘내’가 죽어나간 것이고, 한때는 ‘나’(지금 쓰고 있는 필자, 내가 아니라 그의 독자 중 아무나 될 수 있는 ‘나’)를 스쳐갔던 시간이 이제 결코 돌이킬 수 없이 사라져버린, 아니 죽어버린 것이다. 결국 블랑쇼의 죽음이 전해주는 감정은 ‘나’의 어떤 부분이 도려내어질 때 다가오는 통렬함이다. 그러나 그 통렬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가 ‘내’가 잘 아는, ‘나’와 가까운 자였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가 결코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서, 나아가 무엇도 ‘가르치지 않으면서’, 글쓰기를 통해 전달되는 우정으로, ‘나’로 하여금 ‘우리’를 만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재난의 글쓰기’ 또는 ‘우정의 글쓰기’, 그 글쓰기를 그의 죽음과 별개로 여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멀리서나마 다시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렇게 죽음에 대해 가장 깊이 몰입했던 한 비평가의 죽음은 또한 그의 새로운 삶이기도 하다. 텍스트로서의 삶. 우리에게 그 삶이 주어졌고, 우리에겐 지금 그걸 읽을 '자유'가 있다...

 

05. 12. 06. 

 

P.S. 개인적으로 바타이유와 블랑쇼 읽기는 내년의 과제 중 하나이다. 그의 책들이 '고아원'에 보내지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내년엔 아마 벤야민이나 들뢰즈만큼 이들의 이름을 자주 들먹이게 될 것이다. 책이란 게 도대체가 읽어치워야지만 버릴 수라도 있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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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66)

 

2월의 끄트머리이고 겨울의 끝이다. 그리고 내일이 봄이다. 봄풍경이 들어서기까지는 몇 주 더 걸리겠지만(그림은 러시아의 풍경화가 레비탄의 '봄 홍수'(1897)), 교정이 재잘거리는 소리로 가득차는 건 당장 (대개의 입학식이 예정돼 있는) 모레부터이다(그러면 나도 덩달아 좀 바빠지겠다). 여기저기가 북적거리겠지만, 가장 북적댈 곳은 건 강의 교재들이 판매되는, 북새통같은 구내서점이겠다. 그런 게 변함없는 내 주변의 풍경이다(한적한 봄풍경을 맞아본 기억이 별로 없다!).

새학기 개강도 출판계에서는 일종의 특수일 것이다. 눈에 띄는 책들이 부쩍 많아진 것은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교재나 교양학술서 범주에 들어갈 만한 책들을 북적거리기 전에(!) 몇 권 꼽아본다(일단은 점심시간 동안만).  

 

 

 

 

가장 먼저 꼽을 책은 학술명저번역총서로 출간된 찰스 다윈의 <인간의 유래>(한길사, 2006)이다. 아마도 다윈 자신의 책으론 <종의 기원> 다음으로 유명할 이 책이 이제서야 국역본을 얻었다는 건 한참 뒤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또 한편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법이기도 하다(1871년에 나온 책이니까 135년만에 한국어본이 나온 셈이다). 다윈과 다위니즘에 대해서는 우리시대의 가장 탁월한 다위니즘 해설자 리처드 도킨스의 <에덴의 강>(사이언스북스, 2005)을 참조하는 게 좋겠다. 다윈의 자서전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갈라파고스, 2003)와 <30분에 읽는 다윈>(랜덤하우스중앙, 2004)도 워밍업으로는 좋겠다.

문제는 <인간의 유래>를 읽는 것이지만, 고전의 가치는 읽는 데에만 있는 게 아니라 모셔두는 데에도 있으므로 일단은 저마다 서가에 꽂아두고 볼일이다. 나만은 아니겠지만, 특별히 관심있는 대목은 다윈의 '성선택설'인데 그런 대목만 미리 챙겨읽는 게 흠은 아니겠다. 이때는 저래드 다이아몬드의 <섹스의 진화>(사이언스북스, 2005)를 반드시 참조할 필요가 있는바 곁에 두고 같이 읽으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더불어 좀 여유가 있는 '교양인'이라면 제이콥 브로노프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바다출판사, 2004) 정도를 <인간의 유래>와 나란히 꽂아두면 좋겠다. 이 책의 원제 'The Ascent of Man'(1973)는 다윈의 책 'The Descent of Man'을 뒤집은 것으로 "인간이 상상력과 이성, 정서적 예민함과 강인성으로 환경을 변화시켜온 문화적 진화의 상승과정을 담고 있"는 고전적 저작이다. BBC의 다큐 시리즈였는지라 DVD 타이틀로도 나와 있다.  

 

두번째 책은 패트리샤 처칠랜드의 <뇌과학과 철학>(철학과현실사, 2006)이다. 처칠랜드 여사는 남편 폴 처칠랜드와 함께 심리철학과 인지과학 분야의 저명한 학자이며(이 분야에 대한 개괄적인 책으론 김영정 교수의 <심리철학과 인지과학>(철학과현실사, 1996)을 꼽을 수 있다), 폴은 국내에 '심리철학 입문서' <물질과 의식>(서광사, 1992)으로 진작에 소개된 바 있다(저자의 성이 '처치랜드'로 표기됐었다. 국내 학계의 관행이 어느쪽인지 모르겠지만, 이 부부가 별거하는 것도 아닌데 '처치랜드'와 '처칠랜드'로 따로 검색되는 것은 보기에 안 좋다). 이번에 나온 건 패트리샤의 저작이며 훨씬 두껍다(766쪽이고 원저는 560쪽. 물론 두께가 지성에 비례하는 건 아니겠지만 폴도 분발해야겠다).  

책의 원제는 'Neurophilosophy'(1986, 1989)이고, 이미 20년전에 나온 저작이다. 컴퓨터공학의 발달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법한 분야인 만큼 다소 '낡아보이는'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거꾸로 20년을 버틸 수 있었다면, 이미 이 분야의 '고전'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는 뜻도 된다. 좀 낡은 책이 번역된 것인지, 고전적인 저작이 번역된 것인지는 관련 서평을 읽어봐야 알겠다(이런 서평도 제 때 써줄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주변엔 드문 것인지?).

 

 

 

 

뇌 얘기가 나온 김에 요로 다케시의 <유뇌론>(재인, 2006)도 언급해 두도록 하자. 소개에 따르면, "다치바나 다카시와 함께 일본 최고의 지성으로 손꼽히는 요로 다케시의 책. 2003년 출간되어 그해 일본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바보의 벽> 등의 저작을 통해 해부학자로서의 지식뿐만 아니라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폭넓은 사유와 새로운 시선을 제시한 바 있다. <유뇌론>은 요로 다케시 사상의 출발점이자 근간이 되는 저서이다. 유뇌론은 인간의 모든 활동을 뇌라는 기관의 법칙성을 통하여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입장이다. 유물론과 유심론 중 굳이 따지자면 유심론, 또는 관념론과 가깝다."(<뇌를 단련하다>란 다치바나의 책도 있지만, '뇌'에 대한 관심은 우리와는 대조되는 일본적인 특성의 하나가 아닐까란 생각이 문득 든다.) 

236쪽 정도의 분량이 그닥 미덥지는 않지만, 역시나 두께가 통찰에 비례하는 것도 아니므로 한번 일독해봄 직하다. '뇌를 향한 두렵도록 새로운 시선'이란 부제를 얼마나 감당하고 있는지 확인도 해볼 겸. '새롭다' 싶으면 이미 알게 모르게 많이 소개된 요로 다케시의 세계로 푹 빠져들어가면 되겠다. "일본에 있을 때 일주일에 한번쯤 술을 마셨던 일본 친구가 그의 책을 권했다. 그는 일본인이라면, 아니 누구든지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며 나무젓가락을 넣은 좋이에 '요로 다케시'란 이름을 써줬다. 그의 책 <유뇌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가운데 하나이다."라고 이 책을 추천한 전여옥 의원도 아마 '요로 다케시'의 팬인 듯한데, 겸사겸사 치매에 안 걸리는 법도 배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그런데 책에선 왜 "일본엔 요로 다케시가 있더라"라고 하지 않았을까?).

 

 

 

 

세번째 책은 한국칸트학회 편으로 나온 <포스트모던 칸트>(문학과지성사, 2006). 제목은 '포스트모던'하지만, 내용은 '칸트적인' 논문 모음집이다. 칸트학회장인 강영안 교수의 서명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의 기획자인 총무이사 서동욱 교수가 작성한 글임에 분명한 서문은 '그레고어 칸트와 그의 벌레 변신'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데, 거기서 주장되는바, "이 책은 바로 이 칸트의 변신 '모던 칸트'에서 '포스트모던 칸트'로의 '변신담'이다."

이 화려한 예고편에 이어지는 것은 그러나 '칸트와 하이데거', '칸트와 라캉', '칸트와 레비나스' 등등이며, '칸트와 하버마스', '칸트와 로티'로 마무리된다. 칸트의 변신담이라고는 하나 '칸트'는 거의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꼴은 아닐까? 그 서론에서 인용되는바, "나는 옷을 벗고 <순수이성비판>과 담배 한갑을 들고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무라카미 하루키, <1973년의 풋볼>)나 "뒷주머니에 <프롤레고메나>를 넣어둔 것은 그 탓이야. 내가 슬럼프인데도 계속 이기고 있는 것도, 모두 칸트 할아범의 덕분이지."(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같은 대목들이 '포스트모던 칸트' 현상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면, 그와 정면대결하여 '칸트와 하루키'나 '칸트와 일본야구' 같은 글 꼭지가 아마도 '포스트모던 칸트' 변신담에 더 적합할 것이다.  

해서, 이 변신담은 아직은 제목과 서문 정도에 머무르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 서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끝으로 이 책은 한국칸트학회 기관지 <칸트연구>의 특별호로서 16집 2호에 해당함을 밝혀둔다." 그리고 그렇게 읽을 때 이 논문집은 (벌레들이 기어다니는 엽기적인 식탁이 아니라) 읽을 만한 논문들을 두루 갖춘 풍족한 식탁이 된다.

 

'포스트모던'이란 말이 나온 김에 또 언급해 두는 책은 마크 포스터의 <포스트모던 시대의 새로운 문화사>(이대출판부, 2006)이다. 원제는 'Cultural History and Pstmodernity: disciplinary reading and challenges' (1997)이고, "포스트모던 시대의 맥락 속에서 문화사와 관련된 쟁점들과 논제들을 검토하고 역사학의 미래를 전망한 책. 역사학계에 퍼져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역사학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취할 수 있는 지혜를 밝히고자 했다. 문화사를 다루는 데 있어 작용하는 인식론적 조건과 프랑수아 퓌레, 린 헌트, 미셸 푸코 등의 실제 연구 기록들을 사례로 점검함으로써 논지를 구성했다"고 한다. 230쪽의 컴팩트한 분량이므로 단숨에 읽으면 되겠다. 아니면 국내 필자들이 참여한 <포스트모더니즘과 역사학>(푸른역사, 2002)이나 김현식 교수의 <포스트모던 시대의 역사란 무엇인가>(휴머니스트, 2006) 같은 책들과 천천히 비교해 보면서 읽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다.

<푸꼬, 마르크시즘, 역사학>(인간사랑, 1990)이란 책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된 포스터는 이후에 <뉴미디어의 철학>(민음사, 1994), <제2미디어의 시대>(민음사, 1998),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날기 전에 인터넷을 생각한다>(이제이북스, 2005) 등의 번역서명들이 말해주듯이, 주로 문화이론이나 미디어 이론 분야의 책들을 내왔다. 해서, '역사학'을 주제로 하고 있는 이번 신간은 한동안의 딴살림은 접고 애당초 그의 이름을 알린 <푸꼬, 마르크시즘, 역사학>의 '족보'를 다시금 잇고 있는 것으로도 읽힌다(그는 원래 직분은 역사학 교수로 돼 있다).  

 

 

 

 

네번째 책은 정치사상과 세계화 분야의 책으로 골랐다. 일단 가장 최근에 나온 두툼한 책으로 <현대 정치사상의 파노라마>(아카넷, 2006). "서구 정치사상의 중요한 줄기를 이루는 이데올로기의 개념과,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해설을 담았다"고 하니까 간단히 말해서 '교재'이다. 교재류의 특성상 '예리한 시각'을 담고 있을 법하지는 않지만, 교양의 토대는 튼튼하게 해줄 것이며 차후의 보다 깊이 있는 독서로 안내해줄 것이다. 작년에 바라다트의 <현대정치사상>(평민사, 2005)도 그런 책으로 보인다.

'정치사상'이 원론이라면 '세계화'는 작금의 현안이다. 이 주제와 관련한 책들은 차고 넘치지만, '세계화 시대의 양극화를 넘어서는 길'이란 부제를 단 <세계화의 두 얼굴>(이른아침, 2006)이 일단 눈길을 끈다. "세계화와 불평등, 그리고 양극화 문제에 대한 비판서. '모든 이들이 똑같이 부유해질 수 있다'는 청사진을 걸고 나온 세계화 운동이 오히려 국가간, 계층간에 빈부 격차를 심화시키는 현상을 분석하고 그 해법을 모색"하는 이 책은 "세계화 시대의 부자들과 빈자들의 현재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부자들이 세계화 물결을 타고 어떻게 세계 경제를 장악했는지, 그리고 빈자들이 어떻게 끝없는 가난의 덫에 걸려들 수밖에 없는지를 분석한다. 그리고 미국과 인도 등의 사례를 제시하여 이러한 양극화 현상이 국가 간에, 혹은 비(非)선진국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분석내용은 '상식적'인데, '넘어서는 길'이란 대안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 궁금하다.

작년 연말에 나온 <진화하는 세계화>(아이필드, 2005)는 부제가 '현대 세계의 문화적 다양성'이고 원제는 'Many Globalization'(2002)이다. 제목 그대로, 다수의 다양한 세계화의 진행현황에 대한 리포트적 성격의 책이다. 이 세계화를 둘러싼 찬반 양론은 실상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로 귀결될 듯한데, 이 '차이'를 조망해주는 책으로 <비전의 충돌>(이카루스미디어, 2006)이 또한 눈길을 끈다. 저자는 "수세기에 걸쳐 지속되어 온 보수와 진보 사이의 논쟁을 '비전의 충돌'이라는 아이디어로 분석했다"거 하며, "미국의 대표적 두뇌집단 중 한 사람인 정치학자 토마스 소웰이 미 행정부 정책 자문의 경험을 바탕으로 30년간의 사상사 연구를 집대성한 것"이라고 소개된다.

소웰에 따르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충돌해 온 두 가지 관점(비전)"이 있는데, "하나는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고 변하지 않는다는 '제약적 비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본성은 완벽해질 때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무제약적 비전'이다." 이러한 비전관은 마치 본성(nature)과 양육(nuture)이라는 생물학 화두의 정치학 버전 같다. 하면, 매트 리들리의 <본성과 양육>(김영사, 2004)도 같이 읽어봄 직하다(그렇게 다 찾아 읽으신 분은 내게 결론을 좀 알려주시압).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에드워드 루시-스미스와 주디 시카고가 쓴 <여성과 미술>(아트북스, 2006). '열 가지 코드로 보는 미술 속 여성'이 국역본의 부제인데, '여성과 미술'이란 주제사나 '페미니즘 미술사' 교재로 적합해 보인다.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 "세계 미술사에서 주변부로 밀려나 있던 여성 미술가들의 성취를 재조명했다. 남성 화가들의 그늘에 가려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위대한 여성 화가들을 발굴하여, 그들의 생애와 미술사적 업적을 소개한다"고 하니까.

공저자의 한 사람인 자마이카 태생의 영국 비평가 에드워드 루시-스미스(1933- )는 전방위 작가인 듯한데(시인에다가 사진작가까지 겸하고 있다), 많은 교양미술서들을 집필했고 또 국내에 많이 소개돼 있다(그림 읽어주는 할아버지?). 내가 갖고 있는 건 <서양미술의 섹슈얼리티>(시공사, 1999) 한권뿐이지만. 아래와 같은 사진이 그의 작품인데, 그만한 지명도라면 어쩌면 사진집도 국내에 소개될지 모르겠다.

덧붙여 교양미술 교재로도 쓰일 만한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의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현실문화연구, 2006)이 재출간됐다. 예전 판본에 대해 쓴 리뷰에서 나온 흑백 도판에 대해 아쉬움을 표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새로 편집하고 칼라 도판을 추가한 개정판"이 나온 것. 그런 수고에 비하면 상당히 저렴한 가격도 책의 장점이다. '교재' 정신에 충실한(턱없는 책값의 '교재'들을 나는 혐오한다).

06. 02. 28 - 03. 02.

P.S.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학자 자크 오몽의 책 <영화 속의 얼굴>이 번역돼 나왔다. 소개를 옮기면, "영화이미지들 중 가장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얼굴 이미지'에 대한 미학적 분석을 담은 책이다. '영화'라는 매체와 '이미지'라는 표현 수단의 관계에 대해, 나아가 '이미지'와 '현실'과의 관계에 대한 방대하고 심도 깊은 사유를 펼쳐 보인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영화학자 중 한 사람인 자크 오몽의 저서로, 그의 제자인 김호영 교수가 우리 말로 옮겼다." 그리고 예상과 다르게 400쪽이 넘는 듬직한 분량이다.

물론 <영화 속의 얼굴> 같은 책이 <영화미학>(동문선, 2003)처럼 영화학 교재로 쓰이지는 않겠지만, 내게 더 흥미로운 건 <미학>이 아니라 <얼굴>이다. 한국영화통으로도 잘 알려진 오몽이 이런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미 3~40년 전부터 한국 영화에는 임권택의 완벽하게 통제된 고전주의와 김기영의 장중하면서도 통속적인 가면 예술, 홍상수의 '모던한' 얼굴들, 봉준호나 박찬욱의 '기발함' 등이 평화롭게 계승되고 공존해왔다. 물론, 김기덕처럼 모든 장르와 스타일에 재능을 보이는 시네아스트들도 있었다... 판타스틱 영화나 초자연적 영화에서도, 조지 로메로의 산송장들이나 팀 버튼의 비현실적 피조물들, 혹은 만화영화로부터 유래된 슈퍼 히어로에서조차도,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여전히 '배우'의 얼굴이며 '타인의 얼굴' 이다."(강조는 나의 것, 레비나스의 상용구를 오몽에게서도 읽게 되는군!)

가령, 내가 작년에 본 영화들에서 <여자, 정혜>의 김지수나 <나의 결혼원정기>에서 수애의 얼굴은 영화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기억해 둘 만한 얼굴들이었다(이미지는 '이미지 버전'에 있음). '배우'의 얼굴이면서, '타인'의 얼굴. 그 무한자의 미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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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risoner > 지젝 필독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정수 옮김 / 인간사랑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이 지젝의 비판가를 포함한 지젝 독자들에게 읽혀야 하는 이유는 한 가지 이상이다.

우선 그 이유들을 지적하기 전에 이 책의 제2판 서문에서 지젝 스스로 이 책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킬 것을 이야기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국내에서의 지젝에 대한 (비판적인 것을 포함한) 언급들이 주로 <숭고한 대상>에 집중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저자의 이 권고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 책에서 지젝은 한편으로 헤겔의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한 재독서를 시도한다. 이 '재독서'는 <숭고한 대상>에서의 헤겔 독해에 대한 재독서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지젝은 헤겔의 변증법과 라캉의 기표의 논리를 동일한 모체의 두 판본으로 다루면서, 양자가 서로를 해명하도록 배치했다. 이 이론적 독파의 결과물인 지젝식 변증법적 유물론은, 오늘날 지성적 영역에서 보기드문 수준의 성과물이며, 지젝을 단번에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그것은 독자들 편에서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독서와 사유를 요구한다. 

지젝은 또한 이 책에서 <숭고한 대상>에서 견지된 민주주의에 대한 유보적 지지를 철회한다. 이점은 지젝 스스로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숭고한 대상>에 여전히 남아 있었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잔재를 명확히 규정하고 청산하기 위해 수년 동안 이론적 작업에 몰두했다고 고백한다. 그 이론적 작업/노동의 결과물이 다름아닌 <그들은>이다.

따라서 지젝이 최근에 와서, 그러니까 예컨대 9.11 사건이나 이라크 전쟁 이후에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보는 견해는 <그들은>에 대한 미독에서 오는 잘못된 견해이다. 이 책은 한 명의 철학자가 현실과 이론, 혹은 정치와 철학 양쪽에서 어떻게 진지한 대결을 전개해왔는가를 보여주는 보기드문 사례이다.

이 책은 <숭고한 대상>에 대한 교정작업일뿐만 아니라, 그동안 주로 대중문화적 영역에서만 소개되어온 '지젝'의 이미지 자체에 대한 훌륭한 교정이다. 지젝의 철학적 작업은 이 책에서 원형적 모습으로 전개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숭고한 대상>뿐만 아니라 지젝의 모든 다른 저술들에 대한 독서는 바로 이 책에 대한 독서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역자의 번역은 몇몇 오류들에도 불구하고 지지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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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 텍스트 비판

워크샵 참석차 2박 3일간 지방에 다녀왔다. KTX를 타고 대구에 내려가 팔공산에서 1박하고 경주 보문단지에서 2박을 한 후에 다시 KTX를 타고 올라왔다. 대구는 처음 내려가보는 것이었고, 경주는 11년만이었다. 그래봐야 별로 구경한 것이 없는지라 들러본 자취조차 벌써 지워졌겠다. 

 

직접 제 발로 걸어보지 않은 여정이란 별로 의미가 없다. 보문단지의 경우도 4월의 벚꽃이 진해만큼 아름답다고 하는데, (물론 아직 이르긴 하지만) 그 눈부신 벚나무길을 걸어보지 않았으니 경주에 다녀왔다는 말도 삼가해야겠다. 그러니, 경주에 다녀왔지만 '생활'은 발견하지 못했다(다음엔 새마을호를 타봐야할까?). 그나마 우산을 챙겨가서 쫄딱 비를 맞지 않은 게 다행인 것인지?(어제 대구에는 비가 좀 내렸다.)

  

텍스트를 읽는 것 또한 그러하다. 직접 텍스트의 가로수길을 제 발로 걸어보지 않는다면, 그저 KTX식 다이제스트로 대신한다면,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니 '읽었지만 읽은 것 같지 않은 책들'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목록에 포함되어야 한다. 나는 가급적 그 '슬프게 하는 것들'의 목록을 좀 줄여보고 싶다. 이런저런 텍스트들을 자세히 읽고자 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이다('텍스트의 발견'이 없다면, 읽기는 얼마나 단조롭고 무의미한가!).

그런 생각과 맞물려서 마침 생각이 나서 여기에 옮겨오는 건 고진의 텍스트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에 대한 자세히 읽기이다. 2003년 1월에 쓴 것이니까 그 또한 벚꽃과는 인연이 없던 계절에 작성된 것이다.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먼지를 털어서 창고에 넣어둔다(나중에 좀 때깔을 내서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읽기'에 부록으로 포함시킬 예정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과 관련하여 내가 갖고 있는 텍스트는 세가지이다. 첫째는 우리말 번역서 <유머로서의 유물론>(문화과학사, 2002)에 실린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E1이라고 부르겠다)이고, 둘째는 박유하 교수의 번역으로 <세계의문학>(94년 겨울호?)에 실린 '언어와 정치'(E2라고 부르겠다)이며, 셋째는 박 교수의 글을 쿤데라(소조)님이 교정해서 올린 카페(비평고원) 자료실의 '내셔널리즘과 에끄리뛰르'(E3라고 부르겠다)이다.

<유머로서의 유물론>에 실린 비평문들 가운데 내가 가장 관심있게 읽은 글이 바로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이다. 쿤데라님에 의하면, "이 글은 맨 처음 <비평공간> 92년 10월호에 발표되었다가, 93년 고진의 <유머로서의 유물론>이란 책에 실리게 된다. 그러다 이 논문을 수정 보완한 <내셔널리즘과 에크리뛰르>이란 논문으로 95년, <인문학 담론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재발표된다. 이때 이 논문에 대한 데리다의 서설이 유명하다."(데리다의 텍스트는 http://www.pum.umontreal.ca/revues/surfaces/vol5/derrida.html을 참조할 수 있다). 

고진이 데리다에게서 많은 시사를 얻었다는 이 글에서 고진은 거꾸로 데리다의 몇몇 논점을 비판하고 있고, 데리다 또한 그 비판이 부적절함에 대해서 반박하고 있기에 옆에서 지켜보기에 퍽 흥미로운 텍스트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관전에 앞서 먼저 해결되어야 할 것은 문제의 텍스트를 확정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자리에 앉아서 '게임'을 관람할 것인가를 확정하고, 자리 정리라도 해두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일이 필요한 것은 세 텍스트가 정확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며, 부분적으로 (내가 생각하기에) 오역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에크리튀르'란 불어의 번역. 보통, 문자, 글말, 문어 등으로 번역되는데, E2에서 박교수는 '문장어'라는 말로도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적절한 번역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문장과 계열관계를 이루는 단어나 구, 문단 등을 떠올려 보라). 어쨌든 에크리튀르는 구어(입말)와 대비되어 쓰이고 있다. 고진의 첫 번째 논점은 음성중심주의가 서양의 경우에만 국한되지/한정되지 않는 문제라는 것이다(E1, 62쪽). 그런데, 이 논점은 좀 이상한 논점이다. 그것은 음성중심주의(phonocentrism)란 것이 서양 형이상학적 전통에 국한된다라는 전제에 대한 반박으로서 제기된 것일 텐데, 그러한 전제를 주장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자신이 한번도 그러한 주장을 한 적이 없음을 자신의 반박문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고진이 좀더 정확하게 말하려면, 데리다가 말하는 음성중심주의가 서양뿐만 아니라 (데리다가 미처 다루지 않은) 동양에서도 발견된다라고 해야 한다.

어쨌든 이 문제는 음성중심주의가 근대 내이션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는 고진의 두 번째 논점(사실 이것이 고진의 핵심적인 주장이자 우리가 음미해 볼 필요가 있는 주제이다)과 함께 다음에 '메인-이벤트'를 다룰 때 다시 확인하기로 하고, 이 자리에서는 '텍스트 비판'에만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다. E1과 E2/E3는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문단의 배열은 사뭇 다르다(비교하는 작업마저 어지러울 지경이다). 고진 자신이 원텍스트를 수정한 듯한데, E2/E3가 <비평공간>(1992년 10월)에 발표된 걸 번역한 것이라고 하니까 <유머로서의 유물론>(1993)에 실린 E1이 더 나중에 발표된 것이고, 따라서 수정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우리말 번역은 99년판을 옮긴 것이다(거기에 증보나 개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따라서 여기선 E1이 저자의 생각을 더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E1의 두 번째 대목(64쪽 이하)에서 고진은 데리다의 소쉬르 독해를 소개하고 그것의 불충분성 혹은 결함을 비판한다. E1의 역자는 differance(디페랑스)를 옮기지 않았고, E2에서는 그것을 '차연'이라, E3에서는 '차이'라 옮겼다. 물론 일반적인 역어는 '차연'이다. 고진의 논점은 데리다처럼 소쉬르를 형이상학 비판이라는 문맥에서만 읽을 필요는 없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소쉬르가 문자를 언어학의 대상에서 제외시킨 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 "소쉬르가 문자를 언어학에서 배제한 것은, 그것이 음성보다 이차적이라는 생각 때문이 아니다. 문자가, 배제될 수 없을 정도로 음성 언어에 침투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E1, 65쪽) "소쉬르가 문자를 언어학에서 배제시킨 것은, 문자가 음성에 비해 이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문자에, 배제할 수 없을 정도로 음성 언어가 침투되어 있기 때문이다."(E2, 108쪽/E3) 여기서 E1과 E2/E3의 내용이 상반되는데, 물론 E1이 논리적으로도, 그리고 문맥상으로도 맞는 말이다. E2의 경우 역자가 오역을 했거나, 아니면 그보다 가능성은 낮지만 고진 자신이 잘못 썼거나 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제의 소쉬르 인용(내가 '문제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 대목을 확인하기 위해서 반나절 이상을 소비했기 때문이다). 세 텍스트 모두 <언어학 서설>에서 인용한 걸로 돼 있는데, 이건 전부 오역이다. 왜냐하면 고진이 인용하고 있는 텍스트는 소쉬르 <일반언어학 강의>이기 때문이다. 그걸 일본에서는 <언어학 서설>로 부른다 하더라도 우리말로 <언어학 서설>로 번역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고진의 인용.

"언어와 문자. 이는 연대적인 듯이 생각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들은 근본적으로 구별될 필요가 있다. 입말만이 언어학의 대상인 것이다. 언어학의 시간 속으로의 분류는 오직 언어가 받아 씌어지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문자의 중요성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실제로 그것들은 문명의 어떤 단계와, 언어활동의 사용상 어떤 완성도의 단계를 각인하고 있다. 그러므로 글말과 문자는 입말에 반작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글말과 입말의 혼동은 초기에 셀 수 없을 정도의, 유치한 잘못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E1)

이 대목에서 E2/E3는 '입말'을 '구어'로 '글말'을 '문장어'로 번역한다.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문어(written language)/구어(spoken language)를 굳이 글말/입말로 번역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도 의문이고('음성'이나 '문자' 같은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말이다), '문어'를 '문장어'로 번역한 것은 이미 지적했듯이 타당하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다. 문제의 인용을 우리말 <일반언어학 강의>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 알다시피 <일반언어학 강의>는 소쉬르가 쓴 책이 아니라 그가 제네바 대학에서 세 차례 강의한 내용을 그의 제자들이 세 번째 강의를 중심으로 노트를 모아 편찬해낸 책이다. 그런데, E1에서 '<언어학 서설>1908-1909'라고 한 건, 1908-9년에 행해진 소쉬르의 두 번째 강의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말 <일반언어학 강의>(민음사, 1990)과 그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인용문의 핵심은 문어가 아닌 구어만이 언어학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우리말 번역은 "언어적 물체는 쓰여진 낱말과 발음된 낱말의 결합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후자 하나만으로써도 이 물체를 구성한다."(최승언 역, 35-6쪽)이다. 나는 밤중에 소쉬르 관련 책들을 쌓아놓고 뒤적이다가 이 대목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언어학의 대상'을 정말 황당하게도 '언어적 물체'라고 번역해놓고 있는 것이다! '숨어있는 오역찾기' 게임이 있다면 거의 골든벨 수준에 해당하는 오역이다.

90년 간행 이후에 여러 판을 찍은 책에서(요즘은 절판된 걸로 나오는데) 어떻게 이런 오역을 발견할 수 있을까? 처음엔 재미있었지만(!) 차츰 처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컨대, (나도 그랬지만) 우리말 번역 <일반언어학 강의>를 아무도 읽지 않은/않는 것이다! 지난주(2003년) 한겨레 책세상에선 김재기 교수가 <일반언어학 강의>를 권유하는 리뷰를 실은 바도 있지만, 이런 번역이라면 핵생들에게 권하기 부끄러운 수준이다. 물론 딱 이 부분만 어처구니없는 오역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학 3학년만 돼도 이 정도의 오역은 하지 않는다.

어쨌든 흥분을 가라앉히고, <일반언어학 강의>의 옛날 번역판을 도서관에서 찾았다. 오원교 역(형설출판사, 1973)에서 이와 관련된 대목은 "언어와 문자법은 서로 다른 두 개의 기호 체계다. 후자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전자를 표기하는 일이다. 언어학의 대상은 쓰여진 낱말과 말해진 낱말의 결합인 것으로는 정의되지 않는다. 말해진 낱말만이 그것의 대상이다."(41쪽) 역시나 흡족한 번역은 아니지만, 최승언 역만큼의 오역은 아니다. 참고로 이 부분에 대한 바스킨(W. Baskin)의 영역은 이렇다: "Language and writing are two distinct systems of signs; the second exists for the sole purpose of representing the first. The linguistic object is not both the written and the spoken forms of words; the spoken forms alone constitute the object."

나는 이어서 혹시 두 번째 강의에 대한 번역은 없을까 하고 찾아봤는데, 다행히 도서관에서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두 번째 강의, 1908-1909'에 관한 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Eisuke Komatsu(예스케 고마츠?) 교토대 교수와 G. Wolf 교수가 편집한 불영 대역본이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강의의 발췌역이 작고한 김방한 교수의 <소쉬르>(민음사, 1998)에도 부록으로 실려 있다.

해당 부분에 대한 김교수의 번역은 이렇다: "언어의 위치를 정하고 분류할 수 있는 것이 따로 있을까? 시간 속에서 언어의 분류가 가능한 것은 언어가 쓰여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문자의 중요성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초기의 언어학이 범한 그 수많은 유치한 과오는 쓰여진 언어와 말하는 언어를 혼동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말하는 언어만이 언어학의 대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206-7쪽)

이 인용부분은 불영대역본과 일치한다. 즉 고진이 인용한 부분과 비슷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만, 의아하게도 똑같지는 않다. 차이가 나는 부분은, "언어와 문자. 이는 연대적인 듯이 생각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들은 근본적으로 구별될 필요가 있다... 실제로 그것들은 문명의 어떤 단계와, 언어활동의 사용상 어떤 완성도의 단계를 각인하고 있다. 그러므로 글말과 문자는 입말에 반작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부분들은 내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다. 글말과 문자의 입말에 대한 반작용 운운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리고 왜 불(영)어 원전에도 없는 내용이 일역본에는 들어가 있을까?

고진이 인용한 <일반언어학 강의>에 대해서 나로선 그 출처를 찾을 수 없었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 문제는 일단 미루어두기로 한다. 대신에 인용문을 쿤데라님이 다시 번역해 주셨는데, 조금 이해가 용이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명료하게 이해되는 건 아니다. 쿤데라님의 번역: "언어와 문자. 이것은 흔히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때에 따라선 근본적으로 구별될 필요가 있다. 구어만이 언어학의 대상이다. 통시적인 언어학적 분류는 언어가 쓰여지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자의 중요성을 완전히 부정해선 안 된다. 실제로 문자에는 문명의 단계와, 언어활동에서 있어 사용상 완성도 단계가 각인되어 있으며, 문어와 문자는 구어에 대해 반작용한다. 하지만, 문어과 구어의 혼동은 초기에 수많은 유치한 잘못의 원인이 되었다."

여기서 처음에 언어라고 번역된 건 불어의 '랑그'(=언어)일 것이다. 알다시피 소쉬르는 언어활동으로서의 랑가주를 랑그와 파롤로 구분하고 랑그만을 언어학의 대상으로 설정한다(랑그가 언어란 뜻이니까 언어가 언어학의 대상이라는 말은 아주 상식적이지만). 그런데, 사람들이 보통 언어라고 할 때 그것을 '쓰여진 말'과 동일시하는 바, 소쉬르는 거기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참고로 E2/E3의 경우 인용문의 '문장어' 옆의 원어 병기가 모두 잘못됐다. 'langue ecrite'를 E2는 'langue ercite'로 잘못 표기했고, E3는 'langue ereite'로 잘못 타이핑했다. 다시 읽어본 결과 E3는 E2의 '내이션'을 전부 '국민'으로 통일한 것과 각주가 미주로 돌려진 것 말고는 눈에 띄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이후엔 E1과 E2만을 비교하도록 하겠다.)

요컨대 랑그(언어)는 다시 문어와 구어로 나뉘는 바, 구어만이 언어학의 대상이라고 소쉬르는 확정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데리다는 소쉬르의 음성중심주의를 비판하며, 고진은 음성(중심)주의는 그런 식의 형이상학 비판이라는 문맥에서 벗어나 정치적인 문맥에서 이해할 때 보다 생산적이라고 주장한다.


 

 

 

 E1이나 E2 모두 영어로 'historical linguistics'에 해당하는 것을 '역사적 언어학'이라고 번역하는데, 내 생각엔 '역사언어학'이라고 옮겨야 한다('역사적 언어학'이란 말은 보지 못했다). 소쉬르가 공시언어학을 제창하면서 의식했던 것은 당시 언어학계를 풍미했던 '역사-비교 언어학'이고, 이러한 학풍(지금은 언어학의 한 분야가 됐지만)을 우리 언어학계에서는 관행적으로 '역사언어학'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와 같은 것을 일본(학계)에서는 '역사적 언어학(歷史的 言語學)'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말이 나온 김에 E1 번역에서 이런 관점에서 불만스런 부분 몇 곳을 지적하기로 한다.

"따라서 이런 데이터 없이는 왜 민족지학자가 결코 재정(裁定)을 내릴 수 없었을까가 질문되고 있습니다."(E1, 68쪽)에서 '재정'이란 말은 (내 감각으로는) 잘 쓰이지 않는 일본식 한자어이거나 일본어이다. 그것을 E2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민족지학자는 왜 이러한 자료 없이는 결코, 판단을 내리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 의문시되고 있습니다."(120쪽)라고 하여 '재정'을 '판단'으로 옮겼는데, 우리말로는 훨씬 더 자연스럽다(E1에서는 '재정'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결정함'이라고 각주를 달았는데, 그렇게 거창하게/거추장스럽게 처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목에서 E1은 "언어학자가 **어라고 동정(同定)하면"이라고 옮겼는데(이건 사실 실사는 놔두고 토씨만 옮기는 격이다), 이때의 '동정'은 한국어가 아니라 거의 100% 일본어이다. 그것은 마치 "언어학자가 **어라고 디파인(define)하면"이라고 옮기는 것과 같다(이런 게 독자를 우롱하는 일이란 걸 역자들은 알 필요가 있다). 다행히 E2에서는 "언어학자가 **어라고 규정하면"이라고 옮기고 있다.

하나만 더 예를 들자. E1에서 "나치스의 '제3제국'(아리아 인종에 의한 근대국가의 양기(揚棄) 출현으로 적중했던 것이다"(70쪽)라고 옮긴 부분. 제대로 교정도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인데, 원래대로라면 "나치스의 '제3제국'(아리아 인종에 의한 근대국가의 양기(揚棄))의 출현으로 적중했던 것이다"일 것이다. 여기서도 문제는 '양기'라는 일본어이다. 떨칠 양(揚)에다 버릴 기(棄)자를 쓴 걸로 미루어 짐작할 도리밖에 없는데, E2의 역자는 그것을 지양(止揚)이라고 제대로 옮겼다: "나치의 '제3제국'(아리아 인종에 의한 근대국가의 지양)에서 적중한 것이다."(122쪽) 지양은 물론 헤겔의 개념인데, 그것을 일어로는 '양기'라고 옮기는 모양이다.

여하튼 이런 몇 가지 사례를 놓고 볼 때, E1의 역자의 일어실력이란 게 신뢰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덧붙여 불만스러운 것은 각주 문제. E1의 경우 각주가 원주인지 역주인지가 밝혀져 있지 않고(모두 역주인가?), E2에는 붙어 있는 원주가 빠져 있다(고진이 뺀 것인가?).

다시 원래의 문맥으로 돌아와서, 고진이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는 글은 소쉬르의 <제네바 대학 취임강연>이다. 이걸 E1의 역자는 '쥬네브 대학'이라고 옮겼다. 사실 국내의 소쉬르 학자들도 불어인 '쥬네브'(혹은 주네브)라고 옮기는 수가 많은데, (무)의식적으로 티내는 치레에 불과해 보인다. 프랑스 파리를 영어식으로 '패리스'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니까. E1에는 내용이 빠져 있지만(66쪽의 각주로 처리돼 있다), 이 강의는 E2에 의하면 마에다 히데키(前田秀樹)가 번역/주석한 것이다(마에다의 저작은 <침묵하는 소쉬르>이다).

 

 

 

 

일단 감탄스러운 건, 이전에도 언급했지만, 일본의 소쉬르학 수준이고(이 취임강연을 도서관 등지에서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궁금한 건 고진의 소쉬르론이 얼만큼 독창적인 것인가 하는 점이다. 즉 그가 일본의 소쉬르학에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가 하는 점. 내가 알기에, 그리고 내가 읽은 소쉬르 입문서 등에서 소쉬르 언어학에 관한 정치적 해석은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대개는 기호학의 창시자로서의 소쉬르 조명으로 채워져 있다). 여담이지만, 최근엔 동경대 시리즈 <지의 논리>(경당, 1996)에서 소쉬르와 동시대 화가 파울 클레를 비교하는 글을 읽었는데, 역시나 계발적이었다(덕분에 클레의 책들을 사고 있다!). 일본 지식인들이 구조주의, 포스트 구조주의에 강한 면모를 보이는 것은 다 그런 베이스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고진은 그 취임강연을 근거로 소쉬르의 음성주의를 마치 <라쇼몽>에서처럼 상식과는 다르게 재구성한다. 그 주요 내용을 발췌하면 이렇다. "역사언어학에서는 문화=문명과 음성언어가 동일시되고 있다. 다시 말해 거기에서는 외적인 것의 우연적인 소산(이것도 '산물'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이 마치 '내적'인 연속성인 것처럼 상정된다. 언어학은 언어 외적인 것, 또는 '외적 언어학'의 결과를 언어의 법칙으로 취급해 왔다... 따라서 소쉬르가 '내적 언어학'에 구애되는(E2는 '천착하는'으로 옮겼다) 것은 '외적'인 것을 무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적'인 것의 소산을 내면화하고 있는 언어학을 비판하기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소쉬르가 언어학의 대상을 어디까지든 음성언어에 한정하는 것은, 그가 음성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역사언어학이 지닌 음성중심주의의 기만을 폭로하기 위해서이다."(E1, 66-67쪽/ E2, 110-1쪽)



소쉬르가 보기에 문자화된 음성("역사언어학자가 말하는 음성은 이미 문자이다"), 즉 에크리튀르의 외부성으로서의 음성은 "넓은 의미의 정치적 제관계"를 의미하며, 소쉬르가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그러한 정치성을 내면화시킴으로써 (마치 없는 것처럼) 소거해버리는/소멸시켜버리는 언어학이다. 그렇다면, 소쉬르를 음성(중성)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데리다의 태도는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다(물론 데리다는 이에 대해 변호한다). 고진이 보기에 (흔히 내적 언어학이라 불리는) 소쉬르의 언어학이야말로 대단히 정치적이며("역사언어학에 대한 소쉬르의 비판에는, 분명히 역사언어학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에 대한 비판이 있다." 70쪽), 소쉬르야말로 음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자인 것이다...

06. 0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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