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risoner > 지젝 필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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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정수 옮김 / 인간사랑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이 지젝의 비판가를 포함한 지젝 독자들에게 읽혀야 하는 이유는 한 가지 이상이다.
우선 그 이유들을 지적하기 전에 이 책의 제2판 서문에서 지젝 스스로 이 책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킬 것을 이야기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국내에서의 지젝에 대한 (비판적인 것을 포함한) 언급들이 주로 <숭고한 대상>에 집중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저자의 이 권고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 책에서 지젝은 한편으로 헤겔의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한 재독서를 시도한다. 이 '재독서'는 <숭고한 대상>에서의 헤겔 독해에 대한 재독서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지젝은 헤겔의 변증법과 라캉의 기표의 논리를 동일한 모체의 두 판본으로 다루면서, 양자가 서로를 해명하도록 배치했다. 이 이론적 독파의 결과물인 지젝식 변증법적 유물론은, 오늘날 지성적 영역에서 보기드문 수준의 성과물이며, 지젝을 단번에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그것은 독자들 편에서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독서와 사유를 요구한다.
지젝은 또한 이 책에서 <숭고한 대상>에서 견지된 민주주의에 대한 유보적 지지를 철회한다. 이점은 지젝 스스로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숭고한 대상>에 여전히 남아 있었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잔재를 명확히 규정하고 청산하기 위해 수년 동안 이론적 작업에 몰두했다고 고백한다. 그 이론적 작업/노동의 결과물이 다름아닌 <그들은>이다.
따라서 지젝이 최근에 와서, 그러니까 예컨대 9.11 사건이나 이라크 전쟁 이후에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보는 견해는 <그들은>에 대한 미독에서 오는 잘못된 견해이다. 이 책은 한 명의 철학자가 현실과 이론, 혹은 정치와 철학 양쪽에서 어떻게 진지한 대결을 전개해왔는가를 보여주는 보기드문 사례이다.
이 책은 <숭고한 대상>에 대한 교정작업일뿐만 아니라, 그동안 주로 대중문화적 영역에서만 소개되어온 '지젝'의 이미지 자체에 대한 훌륭한 교정이다. 지젝의 철학적 작업은 이 책에서 원형적 모습으로 전개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숭고한 대상>뿐만 아니라 지젝의 모든 다른 저술들에 대한 독서는 바로 이 책에 대한 독서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역자의 번역은 몇몇 오류들에도 불구하고 지지될 수 있는 것이다.